<69화>
마지막 말에 김천규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불안정하게 떨리는 눈을 감았다 뜬 그가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온 거요?”
“수소문을 좀 했습니다. 최영복 반장님께 조언을 듣기도 했고요.”
“최 형?”
김천규가 눈썹을 들썩이며 대번에 반가움의 표시를 한다.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전에 대해 가장 큰 목소리를 내시는 분이죠. 그분이랑 매일 싸우다가 결국 제가 져서 이러고 다니는 겁니다. 하지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고가 없도록 항상 주의를 기울이는 게 저희가 해야 할 일이겠죠.”
“그 형님 여전히 성질 못 죽이고…….”
김천규가 피식 웃었다. 최영복과의 친분은 저 표정 하나만으로도 알 만했다. 눈치를 살피며 준영이 투덜대듯 말했다.
“처음에 오자마자 계집애가 공사 현장에 함부로 발 들인다고 얼마나 혼났다고요.”
“위험할까 봐 그랬겠지.”
“네?”
조금 편해진 그의 말투에 준영이 되물었다. 김천규는 비딱하게 목발에 몸을 기댔다.
“딸내미 생각나서 그랬을 거라고. 어릴 때 죽었는데 살았으면 대학생쯤 됐을까. 보나 마나 안전모도 없이 뾰족구두 신고 들어오려고 하니까 형님 딴에는 걱정돼서 한 소릴 거요. 유독 젊은 아가씨들한테 엄격하거든. 전에는 술에 취해서 몸도 못 가누는 아가씨를 붙잡고 잔소리를 해 대더라니까.”
쓴웃음을 짓는 김천규의 표정에 맞춰 준영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혼자 사시는 것 같더라고요.”
“근데 혼자 사는 양반 같지가 않아. 어찌나 깔끔하게 하고 다니던지. 현장에서도 늘 좋은 냄새가 나서 여자 생겼냐고 물어보니까 웃으면서 섬유 유연제 냄새라더군. 온 가족이 같이 살던 시절에 부인이 항상 쓰던 거였다고.”
그러고 보면 준영도 영복에게서 쉰내를 맡아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인부들을 지나칠 때면 풍기는 그 흔한 땀 냄새를 덮을 정도의 포근한 냄새가 늘 그를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고생 많이 했을 테지. 나도 딸이 있어서 하는 소리지만, 먼저 앞세웠다고 생각하면.”
김천규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준영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수척한 얼굴의 엄마 옆에서 무어라 말을 걸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하나로 질끈 동여맨 머리와 통통한 볼에 생기가 넘쳤다.
“중학생인가요?”
“내년에 고등학교 들어가요. 해 주고 싶은 건 많은데 애비가 이 꼴이라. 늘 고생만 시키지.”
“이젠 괜찮겠죠. 빚도 갚았고, 넓은 곳으로 이사도 가니까요. 능력이 없으신 건 아닌 것 같네요.”
준영의 무미건조한 말투에 김천규의 얼굴에 금세 긴장감이 흘렀다.
“한쪽 다리를 영영 절게 된 대가요.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떨어질 때.”
느릿하게 말을 끌며 준영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상한 거 못 느끼셨어요?”
“경황없이 떨어지는데 뭘 느낄 수 있겠소? 이제 죽었구나 싶을 뿐이었지. 뭘 묻고 싶은 거요?”
김천규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내내 지켜보고 있던 그의 부인이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영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보상금을 지급한 건 삼진이고, 저는 한경 사람이니까. 경찰도 아니고. 다만, 궁금하지 않으실까 해서요.”
그녀는 고개를 낮춘 채 조용히 속삭였다.
“누구였는지, 이유가 뭐였는지.”
김천규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목발을 짚은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준영이 덧붙였다.
“만약 개인적인 원한이었다면 이걸로 끝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사를 가시는 건가요?”
“나가. 당장 나가라고!”
결국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준영은 문을 가리키면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김천규를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경찰 조사가 있을 겁니다. 더 큰 소송에 휘말리지 않으시길 바랄게요. 따님을 위해서라도.”
그대로 얼어붙은 김천규를 뒤로한 채 준영은 번잡스러운 짐으로 가득한 그의 집을 나왔다.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김천규 역시 알고 있다. 제 주변에 저를 민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만 돈 때문에 외면하는 쪽을 택했을 뿐이다.
누구도 알지 못하니 증언이 있을 리 없고, 뚜렷한 동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사고가 있었던 날 같은 현장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당연히 증거가 되지 않았다.
우리 현장에서의 일은 일단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형사 사건으로 넘어갔으니까. 경찰도 최영복을 의심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이후는 경찰에서 알아서 할 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잡음이 있는 상태이니 회사는 경찰 조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지켜보라는 입장이었다. 언제까지 부산에 있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뭘 어떡해? 증거가 없는데. 최영복이 자백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불퉁거리며 준영은 가방 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오늘 사람 만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무음으로 해 둔 휴대폰에서 두 자리 수의 부재중 통화 알림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두 남자가 그녀를 애절하게 찾고 있었다.
삼두가 좀 더 절실해 보인다는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서른한 살 권범진에 대해 조금씩 알아 가고 있는 그녀의 머리는 다른 가설을 내놓았다.
삼두가 열세 번을 거는 동안 권범진이 고작 네 번밖에 전화를 걸지 않은 이유.
“……오고 있는 거 아니지?”
예전 같았다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 치부했겠지만 실제로 권범진은 어제 보고 싶었다는 이유로 제게 왔었고, 미팅이 있다며 다시 올라갔다.
또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눈을 굴리며 한숨을 내뱉은 준영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 어디야.
“너야말로 어디야? 고속도로 위라고는 하지 마.”
낮게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가 희미한 숨을 토해 낸다. 긴장이 풀리며 새어 나오는 듯한 소리였다. 준영이 입을 딱 벌린 채 물었다.
“설마 진짜로 오고 있어?”
- 내 얼굴 보는 게 싫어?
범진이 태연하게 묻는 말에 준영은 허공을 향해 도리질 쳤다.
“그러, 그런 게 아니잖아. 부산을 하루 사이 두 번 오는 사람이 어딨냐!”
- 네가 국내에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허, 갈수록.
준영은 헛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얼굴이 간질거리고 있었다. 실룩거리는 입술을 꽉 깨문 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별일 없으니까 피곤하게 올 거 없어. 사람 만날 일이 많아서 휴대폰 무음으로 해 놓은 거였거든.”
- 어차피 이후 일정 없어.
“잠 한숨 못 잤을 거 아냐. 이렇게 와서 또 언제 올라갈 건데? 내일? 오늘 밤?”
- 나한테 잔소리할 생각 말고 싫으면 빨리 서울로 보내 달라고 해. 그게 내 수면 시간을 보장하는 길이니까. 끊는다.
덤덤한 목소리로 전화를 툭 끊는 소리에 준영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그 너머로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는 범진이 보이는 것만 같아 그녀는 코를 찡긋거리며 중얼거렸다.
“누가 싫댔나.”
고개를 들자 노을이 번지고 있는 하늘이 보인다. 다양한 색으로 물들어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긴 한숨을 뱉어 냈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 * *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저도 이것들만 정리하고 금방 갈 거예요.”
준영은 퇴근하는 민숙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물론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사실은 일 때문이라기보다 범진이 오면 같이 이동할 생각으로 남은 것이었다.
아니, 뭐, 혹시 범진이가 시간이 많다고 하면 시내에 괜찮은 숙박업소를 찾아봐야 할 수도 있으니까. 할머니와 삼두가 있는 데다 벽도 얇은 그 집에서 뭔가를 하기에는 영 마음이 편치 않으니 말이다.
특히 권범진의 그 집요함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준영이 제 뺨을 찰싹 두드렸다. 삼두에게는 형님이 오시니 먼저 집에 가 있으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본사에서 TANDOZ 관련 리뷰를 요청하는 서류를 훑어보고 답변을 정리한 뒤 준영은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거의 왔을 법한 시간인데 휴대폰은 아직 잠잠했다.
“와, 나 입술이 하얗게 질렸네.”
거울을 흘끗 본 준영이 립스틱을 꺼냈다. 입술을 바르며 무심코 창밖을 보던 그녀의 손이 정지했다. 현장 쪽에서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휴대폰을 들고 사무실을 나간 그녀는 어둠에 잠긴 공사 현장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잘못 본 게 아니다. 흐릿한 빛이 깜빡이듯이 보였다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저긴…….”
정만수 씨가 떨어진 곳이잖아.
오늘은 보고된 야간작업이 없었고 인부들은 해가 지기도 전에 모두 퇴근했다. 저곳에 누군가 있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미간을 단번에 좁힌 준영은 사무실 밖에 놓인 안전모 하나를 눌러쓴 채 그대로 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전등에 의지해 발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해서 4층 계단까지 오르던 그녀는 갑자기 저를 향해 눈부시게 날아드는 빛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 균형을 잃은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윤 대리?”
걸걸한 목소리에 준영의 입술이 비딱하게 기울었다. 그녀는 바람에 헝클어지는 머리칼을 붙잡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최 반장님?”
휴대폰 불빛을 그녀의 얼굴에 쏘아 보내고 있던 영복이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준영은 계단을 마저 올랐다. 평지에 서자 종아리에 뻐근함이 느껴졌다.
“다들 퇴근하신 줄 알았는데요.”
“작업할 때 뭘 두고 가서, 찾는 중이었지.”
“내일 낮에 찾으시지. 급하셨나 봐요.”
“윤 대리야말로 이런 시간까지 혼자 남아서,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해?”
“혼자 남은 건.”
휴대폰을 조심스레 뒷주머니에 꽂으며 준영이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영복이 고요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안전등의 오렌지색 불빛이 그의 얼굴에 묘한 그림자를 그려 내고 있었다.
거세게 불어온 바람이 목덜미를 스친다. 땀이 배어 나와 있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