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미향의 입술이 벌어진 채 그대로 굳었다. 범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승운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준영의 집에서 헤어질 때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의 눈에는 희번덕한 광기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승운아.”
긴 한숨을 내쉰 미향이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승운이 씩 웃어 보였다.
“걱정 끼쳐 죄송해요. 잘 생각해 보니, 내가 누구인지 잊으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도.”
서글서글한 예전 얼굴 그대로 돌아온 그의 모습에 미향은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승운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모레 오전에 경주에서 다미회 골프 모임이 있다던데, 저도 갈까 해요. 이사님들께 눈도장 찍기에 좋은 기회 같아서.”
미향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아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잇새로 감탄이 담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 정말 잘했다. 잘 생각했어, 승운아.”
“다들 저 때문에 애쓰시는데 멍청하게 굴 순 없잖아요. 저도.”
미향의 손을 쥔 채 고개를 든 승운의 눈이 범진에게로 향했다.
“뭔가를 좀 해 보려고요.”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던 범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승운이 미향 쪽으로 몸을 붙이며 속삭였다.
“JBK 파이낸셜 통해서 지분 매수하시려는 거죠?”
미향의 치뜬 눈이 속내를 확인하려는 듯 아들의 얼굴을 훑었다.
“어머니.”
승운은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저를 위한 일이더라도 전부 알 필요는 없다고 하셨지만, 그럴 수 있는 단계는 지났어요. 저 단순히 이사 직함 하나 달려고 명인일보 손 잡는 거 아닙니다. 어머니의 꿈이, 이제 제 꿈이에요.”
“승운아.”
“그러니까 감추지 말고 알려 주세요. 저한테 공유해 주세요. 그게 뭐든, 같이 할 수 있도록. 저도 이제 어머니의 힘이 되고 싶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도련님이 아니라.”
승운의 목소리는 제법 믿음직하고 호소력이 있었다. 범진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화사하게 미소 짓는 미향을 보며 눈썹을 세웠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금세 사무실을 가득 채웠지만 그가 느끼는 것은 위화감뿐이었다.
* * *
“권범진.”
지하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향해 걸어가던 범진이 고개를 돌렸다. 승운이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배웅은 사무실에서의 인사로 충분했는데.”
“내가 할 말이 남아서.”
좌우를 둘러본 승운은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여전히 눈이 기이하게 빛나고 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승운이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 일로 돈 얼마나 받아? 적진 않지?”
범진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승운의 입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갔다.
“그러니까 뭐야. 네가 하는 일이 재벌들 뒤에서 빨래나 해 주는 그런 거였어? 그런 일을 하는 사람도 다는 이사 직함이라니, 좀 싸구려같이 느껴지긴 하네.”
“그래.”
고개를 주억이며 범진이 대꾸했다.
“나도 그 싸구려를 얻으려고 이만한 돈을 쓰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승운의 눈에 날이 바짝 서는 것을 본 범진이 덧붙였다.
“효도한다고 생각해.”
“앞으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못하게 될 거야.”
운전석 문을 열려는 그의 등을 후려치듯 승운이 날카롭게 목소리를 냈다.
“나는 너 따위가 절대 될 수 없는 사람이 될 거니까.”
“이미 그래.”
순순히 두 팔을 벌리며 범진은 긍정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나승운 같은 인간이 될 수 없지.”
이를 악문 승운의 눈이 시커멓게 물들어 가는 것을 보며 범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고작 그것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한 거라면 후회할 거다. 명인일보, 호락호락한 상대 아니야.”
“장세라는 내가 알아서 해. 네까짓 게 신경 쓸 일이……!”
사납게 말을 뱉어 내던 승운은 저를 비웃듯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범진의 입술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범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진짜 케어해야 할 사람은 장세라가 아니라 장의태 사장이야. 장세라와 결혼한다는 건 장 사장에게 목줄이 잡힌다는 뜻이니까.”
“뭐? 누가 누구 목줄을 잡는다고?”
눈에서 불꽃이 튄 승운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범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는 어렵지 않게 아직 붕대가 감겨 있는 승운의 한쪽 손아귀를 억세게 뜯어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승운은 눈 깜짝할 사이에 팔이 꺾인 채 자동차 보닛 위에 짓눌렸다. 단단하게 뒤에서 그의 손목을 틀어쥔 범진이 등에 무게를 싣고 있었다.
“목줄이 길기만을 바라는 게 좋을걸. 그리고 나승운.”
바닥까지 가라앉은 목소리에 승운이 일어나려 몸을 튕겨 봤지만 꿈쩍도 하지 못했다. 팔꿈치로 그의 견갑골 사이를 뚫을 것처럼 힘주어 누르며 범진이 조용히 속삭였다.
“다시는 윤준영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 말로 하는 경고는 이번뿐이다.”
서늘한 눈으로 승운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은 것을 바라보던 범진은 일시에 힘을 풀며 뒤로 물러섰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승운이 꺾였던 팔을 감싼다. 얼굴이 시뻘게진 그를 지나쳐 운전석에 올라탄 범진은 시동을 걸었다.
묵직하게 울리는 엔진음에 승운이 뒷걸음질을 쳤다. 범진은 그대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룸미러로 보이는 승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짧게 혀를 찼다.
나승운이 이 일에 완전히 참여하기로 방향을 틀었다면 몇 가지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있었다. 홍미향은 그렇지 않지만 제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승운은 변수가 될 수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준영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와 범진은 창가에 팔꿈치를 기댄 채 이마를 짚었다. 준영이 옆에 있으면 방이 넓고 좁고는 상관이 없다. 애초에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제 품 안에서 곤한 숨소리를 내며 잠든 그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는 심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따스한 체온과 부드러운 피부가 주는 달콤함은 또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다. 그저 그 순간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게 될 뿐이다. 길게 숨을 들이쉰 범진은 손이 이끄는 대로 준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던 그는 혀를 차며 차선책을 택했다.
- 예, 형님.
“어디냐.”
- 아, 지금 저기, 현장 돌고 있는 중입니다.
“준영이는.”
- 어, 그게…….
말끝을 흐리는 기색에 범진의 눈썹이 대번에 가파르게 솟구쳐 올라갔다.
“같이 안 있어?”
- 누님이 일을 좀 시키셔서요. 다른 사고 피해자들 정보 수집해서 이따가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변명하듯 삼두의 말이 빨라졌다. 범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준영이는 사무실에 있고?”
- 삼진건설 피해자를 만나고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삼진?”
- 예. 유일하게 보상금 처리가 끝난 피해자라서. 최영복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하고요.
“그래서. 넌 뭘 좀 건졌어?”
- 최영복이 수상하긴 합니다. 다른 사고 현장 중 두 군데를 뒤졌는데요. 둘 다 인부들이 최영복을 알고 있더라고요. 소개로 손이 빌 때마다 와서 일을 했답니다. 사고가 있을 때마다 이쪽에서 일한 기록들이 있어서 지금 피해자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최영복에 대해 혹시 아는 게 있을까 해서요. 아, 최영복 전부인 쪽도 한번 뒤져 봤는데 최영복이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돈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본인 저축액도 좀 있지만 부인 쪽도 재정 상태가 나쁘지는 않아요. 작은 꽃집을 하고 있는데 먹고사는 데 큰 문제가 없을 정도의 매출은 나오는 모양입니다. 월세도 한 번 밀린 적이 없대요.
“그래서.”
핸들을 틀며 범진이 나직하게 물었다.
“미행까지 따라붙은 준영이를 지금 혼자 뒀다고?”
그의 목소리에서 풍기는 스산함을 느꼈는지 삼두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삼두가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 아, 저, 그, 그게, 아직 환한 낮이기도 하고, 그, 한경에서 붙인 놈은 지켜보기만 하는 상황이고, 또 누님이 당장 알아봐서 해결하고 형님한테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다고 부탁을 자꾸만 하셔서……. 죄송합니다.
마지막 말을 듣지 않았다면 호되게 한 소리 했을 것이었다. 기가 막혀 고개를 내저으며 범진이 혀를 찼다.
“최영복이 다른 현장의 피해자들과도 사이가 좋았나?”
- 술도 한잔씩 같이 하면서 어울리는 사이였답니다. 아무래도 형편이 비슷해서 그런지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았다고 다른 동료들이 그러더라고요.
“도우려고 민 것일 수도 있어.”
- 예?
“보상금 받아서 빚 해결하라고 떠민 것일 수도 있다고.”
- ……예에?
삼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범진이 속도를 내며 말했다.
“빨리 확인하고 윤준영 찾아. 지금 전화를 안 받으니까.”
- 예. 여기만 들렀다 바로 가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범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이 범죄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떨어진 자들은 보상금 관련 협의 중이니 피해가 갈 만한 말은 입도 벙긋 안 할 것이고, 정만수는 누가 자기를 밀었는지 알지 못하니 증거가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미간을 치켜세운 채 범진은 다시 한번 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그의 초조함도 덩치를 부풀리고 있었다.
* * *
“그러니까, 무슨 일이라고 하셨죠?”
김천규는 목발을 짚고 있긴 했지만 상태가 많이 좋아진 편이었다. 준영은 이리저리 짐을 나르는 사람들을 피하며 내부를 훑어보았다. 인부들에게 지시를 하는 김천규의 부인은 잊지 않고 이쪽을 한 번씩 흘끔거리고 있었다.
“한경 리스크관리팀 윤준영이라고 합니다. 저희 쪽 현장에서도 최근 선생님과 비슷한 케이스가 발생해서 보상금 지급 과정 처리 중인데…….”
“나랑 관련도 없는데 왜 찾아온 거요? 바쁜 거 안 보입니까? 난 할 말 없으니 그만 가요.”
보상금, 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안색이 변한 김천규가 손을 거칠게 내저었다.
“선생님.”
한 발 앞으로 다가선 준영이 또박또박 말했다.
“저희는 재발 방지를 위해 현장 인부들의 의견을 모아 취합하는 중입니다. 더 이상의 안전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저희 쪽 목소리도 높고요. 특히 현장 감독이나 반장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습니다. 비록 저희 현장 사고는 아니었지만 비슷한 일을 겪으신 분의 이야기를 들어 두면 차후 안전 설비를 보강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동료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시간 좀 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