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협박하는 듯한 말투의 끝이 달콤하다. 천천히 제 등을 쓸어내리던 손길이 엉덩이를 쿡 움켜쥐는 것에 준영이 몸을 뒤틀며 불분명한 발음을 뱉었다.
‘안 돼. 내일은 진짜 할 일이 많아. 최영복 관련해서 알아볼 것도 많고.’
‘뭐든 조심해서 해. 끼니 잘 챙기고.’
범진의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그게 너무 따뜻하고 기분이 좋아서 준영은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계속해 줘.’
‘은근히 어리광이 있네, 윤준영.’
‘세상에서 그거 볼 수 있는 사람 너뿐이야. 영광인 줄 알아.’
그녀의 웅얼거림에 범진이 피식 웃었다. 당연하지, 하고 속삭이는 숨결 속에 미소 지은 채 준영은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보호하듯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범진의 품이 더할 수 없이 안락했다.
기억을 더듬던 준영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입력하려던 그녀는 이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래지 않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 일어났어?
“왔으면 24시간은 머물러야지. 꿈인 줄 알았잖아!”
투덜거리자 범진이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 처음부터 얼굴만 보고 가려던 거였어. 오전에 참석해야 하는 미팅도 있고.
“잠도 제대로 못 잤으면서.”
- 그거 걱정돼서 전화했어?
왔던 길을 몇 시간 만에 다시 올라가고 있을 그를 생각하자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간질거린다. 준영은 입술을 비죽였다.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 왜.”
가만히 정적이 흐른다. 민망함에 눈을 굴리던 준영이 순간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아니야. 시간 계산하지 마. 핸들 틀지 마. 진짜로 오라는 거 아니야. 나도 지금 씻고 나가 봐야 된다고.”
- 10분 정도는 어떻게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못 내. 그러니까 운전이나 조심해. 끊는다.”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고는 준영은 얼른 전화를 끊었다. 심장이 괜스레 콩닥거린다.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와 그녀는 이불 속에 다시 코를 묻었다.
미쳤어, 권범진. 미쳤어, 윤준영!
“으악! 으아악!”
발버둥을 치며 괴성을 지르자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준영이 눈을 번쩍 떴다.
“누님, 무슨 일 있으세요? 누님?”
문 뒤로 삼두의 거대한 그림자가 비쳤다. 준영은 서둘러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겼다.
“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 지금 나갑니다.”
목을 가다듬으며 엉거주춤 일어선 그녀는 휴대폰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한시라도 빨리 모든 일을 마치고 권범진과 같이 있고 싶다. 하루 종일 마음껏 끌어안고 뽀뽀를 퍼부어 주고 싶었다.
주먹을 불끈 쥐며 준영은 문을 벌컥 열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해치워 버리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 * *
“없네요. 말씀하신 날짜는 다 휴일이었습니다.”
사무장의 말에 준영이 미간을 좁혔다. 주변 지역의 현장에서 사고가 난 날 최영복은 이쪽 현장에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은 즉 다른 현장에 있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나요? 그러니까, 한쪽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가 다른 곳에서도 일하는 경우가.”
“최 반장이 다른 곳에서도 일을 합니까?”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요.”
눈을 깜빡이며 준영은 사무장을 마주 보았다. 그는 턱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흔한 일은 아니죠. 일단 특정 인부를 일부러 지목해서 부르는 일 자체가 잘 없으니까. 최 반장이야 워낙 오래 일해서 인맥이 넓은 데다 부르면 부르는 대로 찾아가서 일을 하는 스타일이고, 또 성실한 편이니까. 이런 대규모 현장이 아니라 개인 사업자나 직영 공사 쪽 현장에서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요.”
사고가 있었던 다른 현장에 대한 정보는 있지만 그쪽 피해자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직 없다. 영복이 아무나 밀어 대는 사이코패스가 아닌 다음에야 그들과 어떤 식으로든 접점이 있을 것이었다. 분명히 어느 정도의 친분이.
그걸 어떻게 알아봐야 하나.
생각을 이리저리 굴리며 서류를 넘기던 준영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김용재 주무관에게 들은 이야기와 본사에서 보내 준 자료를 취합한 서류였다. 개중 단 한 명의 피해자에 대한 정보는 있었다.
유일하게 보상금을 지급받은 삼진건설 현장의 피해자.
이 사람이 최영복을 알아보면 그땐 진짜 확신이 생길 텐데. 하지만 그는 이미 보상금을 받았으니 누군가에게 떠밀렸다는 사실을 밝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주의 깊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최영복이 현장에 있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피해자를 떠밀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최영복이 자백하도록 압박하는 수단은 될 수 있을 테지만 말이다.
그 사람이 입을 안 열면 그쪽 현장 감독을 통해 알아보는 방법도 있다. 생각을 정리한 준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외부에 좀 다녀올게요. 시간 봐서 현장에서 퇴근하겠습니다.”
막 무어라 말을 하려던 사무장은 번개같이 튀어 나가는 그녀를 잡지 못했다. 그는 혀를 내두르며 제 자리로 향했다.
“뭐 저렇게 급하게 돌아다니나 몰라. 점심때 탕수육 먹고 싶다고 해 놓고는.”
“저는 좋은데요, 탕수육.”
민숙이 파티션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사무장이 금세 정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둘이서 무슨 탕수육을 먹나. 추어탕이나 시켜 먹지.”
얼굴을 찌그러뜨리던 민숙은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본 사무장이 눈을 끔벅였다.
“아, 들어가도 돼요? 다음 주 일정표 좀 확인하려고.”
안전모를 쓴 영복이었다. 입고 있는 티셔츠와 조끼가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민숙은 얼른 냉수 한 컵과 함께 서류를 내밀었다. 사무장이 다가서며 웃었다.
“차질 없이 진행돼서 다행이야. 한여름 되기 전에는 끝내야지.”
“윤준영 대리가 그래도 예전 놈보다는 낫더군요. 어딜 또 급하게 나가는 것 같던데.”
“아, 최 반장. 혹시 다른 현장에서도 일하나?”
민숙이 건넨 물을 막 들이켜던 영복이 멈칫했다.
“네?”
“아니,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하기에.”
사무장의 말에 그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기며 되물었다.
“누가, 그런 걸 궁금해합니까? 윤 대리가?”
“뭘 또 열심히 뒤적뒤적하더라고. 경찰 쪽에서 물어본 건지 어쩐 건지. 하여튼 젊어서 그런지 일을 정신없이 한다니까.”
영복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사무장을 흘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직접 말해 주는 게 좋겠네요.”
그럼, 하고 영복이 천천히 사무실을 나갔다. 멀뚱히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사무장이 민숙을 돌아보았다.
“추어탕 시켰어?”
10
범진은 마시던 차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햇빛이 쏟아지는 갤러리 안의 사무실은 냉방이 지나친 탓에 싸늘했다. 슈트를 갖춰 입은 그는 천천히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래서요?”
빈틈없이 하나로 틀어 올린 머리의 미향이 붉은 입술을 끌어당기며 미소 지었다. 새하얀 투피스에는 티끌 한 점 없었다.
“그런 인연이 있는 줄은 몰랐죠. 내 아들의 동창생이었다니. 그 학교에 가 본 적 있는데, 어쩌면 스쳤을 수도 있겠네요.”
“글쎄요. 인사 한번 제대로 한 적 없는 사이라.”
“우리 윤준영 대리와도 아는 사이라던데?”
“그게.”
미향의 은근한 말에 범진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한경과의 일에 어떤 영향이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범진의 말투는 높낮이가 없었지만 묘하게 압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쓸데없는 일로 시간 낭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미향은 눈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없기를 바라고 꺼낸 말이에요.”
“꺼내지 않으셨으면 없었을 일이죠.”
몸을 낮춘 범진이 다시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미향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작업은 50프로 정도 끝났는데, 주주총회는요?”
“다다음 주 금요일로 잡혀 있어요.”
“그전까지 마무리하겠습니다.”
용건은 빠르고 간결하게 나누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미향도 엉겁결에 함께 일어섰다. 문 쪽으로 걸어가던 범진이 아, 하고 고개를 돌렸다.
“윤준영에게 붙인 사람은 주총 이후에는 없어졌으면 합니다. 불편해서요.”
의외의 일격에 미향의 눈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범진은 건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럴 여유가 있으시면 홍인섭 사장 쪽을 신경 쓰시죠. 나승운이 이사 자리에 앉는다고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놀랐음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던 미향이 허,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준영이와 어지간히 가까운 사이인 모양이군요.”
“이사님은 그저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좁힌 범진이 날카롭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승운과의 연을 끊는 건 내가 할 거니까.”
제 속을 꿰뚫고 있다는 듯한 말에 미향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녀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막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에게 쏠렸다.
“팀장님, 이런 식으로 들어가시면…….”
곤란한 얼굴로 뒤따라 들어온 비서가 미향의 눈치를 살폈다. 승운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뱉었다.
“나가요. 중요한 얘기 할 겁니다.”
순식간에 사무실 안의 공기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발을 동동 구르던 비서는 미향의 눈짓에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갔다. 범진이 미향을 흘끗 바라보았다.
“저도 이만.”
“인사도 안 하고 모른 척 가려는 거야, 범진아? 서운하네.”
밝은 아이보리 컬러의 재킷을 걸친 승운이 단추를 풀며 의자에 앉았다.
“앉아. 너도 우리 일 돕고 있는 상황이니까 들어 둬서 나쁠 건 없을 거야.”
저를 돌아보며 빙긋 웃는 승운의 표정에 범진의 시선이 다시 미향에게로 날아갔다. 미향이 당황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승운아, 그때도 말했듯이 권 이사는 그림을 보러 온 바이어…….”
“세라랑 날짜 잡았어요. 번거로운 격식 같은 거 안 좋아하는 성격이더라고요. 기사는 다음 주 중 명인일보 경제지 통해서 제일 먼저 나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