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차 키와 휴대폰을 챙겨 막 현관을 나서려던 범진은 띠, 하고 울리는 전자음에 고개를 돌렸다. 로비의 호출이었다. 미간을 좁힌 그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형님, 회장님 올라가십니다.
“없다고 해.”
- 듣고 계십니다.
딱딱한 대답에 범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버튼을 누른 뒤 휴대폰과 차 키를 다시 내려놓으니 얼마 되지 않아 벨이 울렸다. 문을 열자 떡 벌어진 어깨가 먼저 보였다.
올해 55세인 상춘은 예전만 못하다고는 해도 어지간한 20대를 한 손으로 제압하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여전히 매일 체력 단련을 하고 있었다. 그 습관을 지키지 못한 것은 3년 전 칼에 찔려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때뿐이었다.
하얀 셔츠에 여전히 검은 정장을 걸친 그가 매서운 눈으로 범진을 쏘아보았다. 범진은 대신 그의 뒤에 서 있는 중호에게 시선을 날렸다. 중호가 발치 언저리를 바라보며 머쓱하게 헛기침을 뱉었다.
“없다고 해?”
“이런 시간에 왜 돌아다녀요, 겁도 없이. 중호 정신 나갔냐? 해 떨어지면 집에 가둬 놓으라고 했지.”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중호가 하얘진 얼굴로 눈을 끔벅였다. 혀를 찬 상춘이 그를 툭 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이빨 빠진 호랑이 누가 노린다고. 꿈 있는 놈들이면 내가 아니라 널 노리겠지.”
“이빨이 빠졌으니 노리죠. 호랑이는 죽어야 가죽 남기는 거 몰라요?”
“이 녀석이.”
“넌 앉을 생각 마라.”
소파에 앉는 상춘에게서 눈을 돌린 범진이 중호를 향해 말했다. 덩치가 삼두 못지않았지만 그는 범진 앞에서 얌전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왜 여기 있어? 한남 쪽에 있을 줄 알았더니.”
“물 드려요?”
“내올 거면 술을 내와야지.”
“중호야. 의사 선생이 뭐라디?”
범진은 상춘의 옆에 서서 팔짱을 꼈다. 뒤에 서 있던 중호가 눈치를 살피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주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루에 한 잔도 안 된다고는 안 했다.”
“사전 하나 갖다드려라. 우리 회장님이 금주가 무슨 뜻인지 모르신다.”
상춘은 험상궂게 뻗은 눈썹을 찌푸리며 뻣뻣하게 서 있는 범진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속 쓰림을 느끼면서 중호가 힘겹게 끼어들었다.
“저, 저는 문 앞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중호가 잰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범진은 컵 두 개에 수돗물을 담아 상춘의 앞에 내려놓았다.
“한경 때문에요?”
불쑥 내뱉는 범진의 말에 상춘은 헛웃음을 흘렸다. 한입에 물컵을 비운 그가 거실을 휘이 둘러보았다.
“못 보던 새 많이 깔끔해졌네. 석 달 전만 해도 벽 하나를 술병으로 가득 채우고 있더니.”
“이럴 때도 있는 거죠.”
“윤준영 데리고 살 준비 하는 거냐?”
제 몫의 컵을 막 들이켜던 범진이 볼에 물을 한가득 품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상춘이 어깨를 으쓱였다.
“뭘 어떻게 알았냐는 눈을 하고 있어. 모르는 게 말이 안 되지. 내 앞에서 처음 술 취해서 쓰러졌을 때 잠꼬대하던 이름 아니냐.”
범진은 느릿하게 컵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요?”
“목포에서. 그리고 병원에서 사흘간 혼수상태로 있을 때도.”
“설마.”
상춘의 옆에 앉으며 범진이 물었다.
“준영이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이야기를 하는 거지.”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알고 계셨냐고요.”
한순간에 눈매가 날카로워지는 범진을 보며 상춘이 피식 웃었다.
“어렵진 않더라. 그냥 윤준영이 아니라 한경재단의 장학생이라는 표지가 있었으니까.”
범진은 허, 하고 혀를 찼다. 상춘은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어렵지 않은데 네가 안 찾아보기에 나도 입 다물고 있었다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가파르게 치켜 올라가 있던 범진의 눈썹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는다. 거뭇한 흉터가 남아 있는 눈으로 희미하게 웃은 상춘이 짐짓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근데 이거 뭐 집이 영 휑하네. 이쪽 벽지에 꽃이라도 발라 주랴? 젊은 아가씨들은 그런 거 좋아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안 나서는 게 도와주는 거니까.”
저도 준영의 취향을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꽃무늬 벽지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겠다. 범진의 엄포에 낮게 웃음을 터뜨린 상춘이 그를 보며 물었다.
“오랜만에 봤는데도, 여전히 좋던?”
범진의 눈이 조용히 상춘에게로 향했다. 나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없이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요.”
입가에 미소를 띤 상춘이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범진의 성정을 잘 알았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법이 없어 만사에 무덤덤해 보이지만, 그렇기에 진심을 담은 한 마디의 무게는 크게 다가오곤 했다.
그렇게 마음에 담아 뒀던 여자를 찾아보지 않은 이유도 잘 알고 있기에 지금의 결심이 얼마나 확고한지도 알 수 있었다. 상춘이 비딱하게 턱을 괴며 말했다.
“나도 인사나 한번 하자.”
“싫습니다.”
“왜 싫어?”
진심으로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는 상춘을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며 범진이 대꾸했다.
“안 그래도 신경 쓸 일 많아요. 다른 것까지 얹어 주고 싶지 않습니다.”
“참 나, 벌써부터 아주 끼고도는 폼이……. 넋 나간 미래가 보인다, 보여.”
상춘은 입을 딱 벌린 채 그를 흘겨보다 덧붙여 말했다.
“한경 홍미향 이사의 측근이라는 건 알지? 입사 때부터 공공연히 드러냈다던데.”
“자의적인 건 아닙니다. 홍 여사 아들이 준영이를 좋아해요. 오래됐죠.”
“명인일보와 얘기가 오가는 걸 보면 며느릿감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저와의 관계를 알고 사람을 붙인 것 같습니다.”
범진의 말에 상춘이 짧게 혀를 찼다.
“홍 이사 쪽 사람들이 네 뒷조사를 한다더라.”
“뭐라도 쥐고 싶겠죠. 홍 이사가 바라는 대로 지분 매수가 완전히 끝나고 아들인 나승운을 임원 자리에 올려놓을 때까지의 담보가 필요한 걸 겁니다.”
“담보라.”
고개를 주억이던 상춘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야 우리 일을 하면 그만이지만, 저쪽에서 뭐라도 눈치챌까 봐 그게 걱정이군.”
“오래 안 걸립니다.”
“그래.”
상춘이 현관으로 걸어가며 다리를 조금 절뚝이는 것을 본 범진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다리는 괜찮으세요?”
“뭘, 몇 년이 지났는데. 이제 멀쩡하지.”
“해만 지면 쑤신다면서요.”
“나이 들면 다 그래, 인마.”
피식 웃은 상춘이 구두를 신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일이 끝난 다음에도 윤준영은 한경에 적을 두고 있을 셈인가?”
“준영이 뜻에 달려 있겠죠.”
범진의 무심한 대답에 상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천하의 권범진이 아주 꽉 잡혀서는. 싫은 소리 한 마디도 못 하지?”
“했다가 도망가면 책임지실 거예요?”
“에라이, 나오지 마. 보기 싫다.”
“배웅 아닙니다. 나도 나가려고 그러는 거지.”
“이 시간에 어딜 가는데?”
의아한 눈으로 묻는 상춘을 향해 범진은 그저 눈썹을 까닥여 보였다. 휴대폰과 차 키를 챙기는 그를 멀뚱히 보다가 이내 기가 차다는 듯 상춘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열자 중호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말씀 끝나셨습니까. 어, 형님은 왜…….”
“부산 간댄다. 처자식 생기면 아주 징글징글할 놈이야.”
“예? 이 시간에 부산에는 무슨 일로요?”
“회장님이나 잘 모셔. 어두워지면 밖에 못 나오게 아예 방문을 잠가 버리든가. 알아들어?”
또다시 중간에 낀 중호는 죽을상을 하며 그저 고개를 숙였다. 상춘은 앞장서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범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혀를 차는 그의 주름진 눈가에 옅은 웃음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 * *
준영은 멍하니 눈을 떴다. 몽롱한 정신이 꿈과 현실을 구분 짓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사방이 환해져 있고 고소한 냄새가 나는 걸 보면 아침 먹을 시간인 것은 분명했다.
꿈을 꿨는데. 권범진이 옆에 있는 꿈.
“……꿈 맞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준영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잠들기 직전과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목덜미를 긁적였다.
“믿을 수가 없다, 윤준영. 권범진이 그렇게나 보고 싶었니? 상사병 걸린 10대 소녀야 뭐야. 별 꿈을 다 꾸네.”
조소하며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차던 준영이 멈칫했다. 그러곤 얼른 이불 속에 코를 박았다. 은은하게 남아 있는 시원한 향기에 준영은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였어?”
새벽, 한참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라 모든 감각이 둔해져 있어 그녀는 반만 덮고 있던 이불을 완전히 젖히며 들어오는 손길을 뒤늦게 감지했다.
꿈결에 화들짝 놀라지 않은 것은 익숙한 체향 때문이었다. 한순간 범진과 제 침대에 누워 있던 때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때와 똑같이 길고 탄탄한 팔이 모로 누운 그녀의 몸을 감쌌다. 등 뒤를 덮쳐 오는 듯한 높은 체온에 순식간에 몸이 더워졌다. 가뜩이나 선풍기 하나로 겨우 버티고 있었기에 그 열기에 준영은 반쯤 눈을 뜨고 말았다.
‘너 뭐야?’
‘자. 잠깐 보고 싶어서 온 거니까.’
부드러운 속삭임과 함께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가볍게 토닥인다. 잠을 부르는 나른한 손짓에 눈꺼풀이 무거워져 계속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길게 숨을 들이쉰 준영이 뒤척이며 몸을 돌렸다. 단단한 가슴이 코끝에 닿아 범진의 허리에 팔을 두르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그가 한 팔로 팔베개를 해 주었다. 덥지만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많이 보라고 돌아누운 거야.’
중얼거리자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이마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느낌이 나 괜히 입꼬리가 비실비실 풀렸다.
‘나 깰 때까지 있을 거야?’
‘아마, 아니.’
‘그럼 나 지금 눈 떠야 하는 거 아니야?’
‘내일 휴가 낼 거면 눈 뜨고. 곱게 못 잘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