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완전히 다른 곳입니다. 성진금융은 70년대부터 종로구 시장 일수를 시작으로 규모를 키워 온 곳이고, 성진캐피탈은 저축은행에 기반을 두고 있는 곳이거든요.”
유려한 설명에 눈을 끔벅인 준영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삼두는 제 뺨에 날아와 박히는 그녀의 시선에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동종 업계라…….”
“아무리 생각해도 내 옆에 이렇게 두기엔 아까운 인재 같은데.”
과장되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준영이 아, 하고 손뼉을 쳤다.
“JBK에서도 정만수 씨 관리해야 하니까 기본 조사 정도는 했을 거 아니에요.”
“저는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앞만 바라보며 삼두가 기계처럼 대답했다. 눈을 가늘게 뜬 준영이 불퉁거렸다.
“누가 잡아먹나. 이것만 말해 줘요, 그럼. 채권자 겹치는 곳은 없죠?”
곤란한 얼굴로 핸들만 움켜쥐고 있던 삼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다면 보상금 노린 채권자 짓은 아닐 것 같고. 수법이 한 가지니까 범인도 하나일 것 같은데. 근데 주변 사람들 말을 들어 보면 다들 원한 살 사람은 아니라고 하거든요. 정만수 씨만 해도 소문이 나쁘지 않았고. 최 반장 말로도…….”
생각을 정리하듯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을 잇던 준영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아닌 척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삼두가 속도를 줄이며 그녀를 곁눈질했다.
“누님?”
“그 사람들이라고 했지.”
무심코 떠오른 생각을 말로 뱉어 낸 준영이 눈을 바짝 치떴다. 아까부터 내내 막힌 하수구 같던 머리가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이 아버지로서 얼마나 괴로웠겠냐고.”
“예?”
“정만수 얘기를 하고 있는데 왜 복수형이 나와? 왜 그 사람‘들’이라는 말을 쓰냐고요. 나야 다른 추락 사고와의 연관성을 의심하고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최 반장 입장에서 흘러나올 말은 아니지 않나?”
그리고 정만수와 가까웠고, 당일 같이 작업을 하고 있었지.
……하지만 아까 화를 낸 건 진심인 것 같았는데. 정만수와 정말로 친한 사이였는데 그 사람을 떠밀 이유가 있나?
“최영복에 대해 아는 거 있어요?”
생각을 굴리던 준영이 갑작스레 묻는 말에 또 눈을 부릅뜬 삼두가 시선을 굴린다. 준영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누, 누군지 모릅니다.”
“형님이랑 꽤 가깝게 지낸 것도 우연은 아닐 것 같은데. 정만수 씨랑 친하다니까 처음부터 노리고 들어간 거 아니에요? 정보 얻으려고. 형님 안전에 그렇게나 신경 쓰는 삼두 씨가 누군지 모를 리가. 몰랐다면 직무 유기지.”
과녁을 향해 정확히 표창처럼 날아오는 말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삼두의 얼굴이 벌겋게 굳었다. 그는 준영의 시선을 견디다 못해 입을 열었다.
“형님이 모든 걸 공유해 주시는 건 아니라서요.”
“삼두 씨.”
자세를 고쳐 앉으며 준영이 태연하게 말했다.
“이거 그렇게까지 비밀 유지해야 하는 일 아니에요. 당신네 형님도 이 일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보상금으로 한 방에 변제 끝낼 수 있는 방법은 날아갔지만 또 무슨 변수가 있을지 모르잖아. 범진이도 반대는 안 할걸요. 내가 직접 전화해서 물어봐도 대답해 줄 테지만 번번이 이런 걸로 전화하기 좀 그래서 삼두 씨한테 묻는 거라고요.”
물론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다. 범진이라면 왜 최영복에 대해 궁금해하냐고 물어본 다음 자기가 혼자 조사했을 테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상대는 권범진이 아니라 박삼두인 것을.
“요즘 한경 쪽 일 때문에 바쁜 것 같아서 굳이 안 건드리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네.”
준영은 일부러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척했다. 눈을 굴리고 있던 삼두가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그렇다고 아주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보다는 많이 알겠지. 말해 봐요.”
“아내와 딸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고, 수입은 나쁘지 않은데 저축하는 스타일입니다. 현재 빚은 없지만 예전에는 단기 사채를 쓴 적이 있고요. 딸이 어릴 때 사고로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준영이 작게 입을 벌렸다.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그 괴팍한 성미를 이해해 줄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혼 사유는 그 딸 사고 때문에?”
“시기로 봤을 때 그런 것 같습니다. 올해로 죽은 지 딱 10년 됐더라고요.”
고개를 끄덕이던 준영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게 다예요?”
“예. 제가 형님께 말씀드린 건 이 정도.”
“더 알아볼 수 있어요?”
신호에 걸린 삼두가 눈을 둥글게 뜬 채 그녀를 돌아보았다.
“최영복에게 왜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지시는데요?”
“정만수 사고에 뭔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요. 아, 참고로 삼두 씨가 안 해 주면 나는 직접 알아볼 거예요. 혼자 알아보다가 혹시라도 위험해지거나 사고라도 나면, 범진이한테는 말 좀 잘 전해 줘요.”
빙긋 웃으며 준영이 말하자 삼두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핸들을 잡았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어디까지 가능해요?”
“어디까지 원하십니까?”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했는지, 이혼한 아내와의 관계는 어떤지, 아내 쪽의 재정 상태는 어떤지, 그리고 다른 사고 현장과의 접점은 없는지 정도? 다른 사고가 있었던 날 우리 쪽 현장에 출근했는지는 내가 알아볼게요. 출석표를 보면 되니까.”
삼두는 막힘없이 말을 뱉어 내는 준영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그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준영이 눈썹을 들썩였다.
“왜요?”
“저 같은 놈은 누님 같은 분께 걸리면 뼈만 남겠구나, 싶어서요. 이길 도리가 없네요.”
“형님도 못 이기는데 아우가 이기려고 하면 쓰나.”
씩 웃어 보인 준영이 다시 시트에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설렁탕이나 포장해서 할머니 김치랑 먹을까 봐요. 할머니 드시라고 수육도 좀 사고.”
“예.”
그녀의 생각이 마음에 들었는지 흔쾌히 대답한 삼두가 깜빡이를 넣고 핸들을 틀었다. 차가 부드럽게 회전하고 있었다.
* * *
- ……래서 아무래도 도와드리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말로만 그러실 분이 아니기도 하고, 또 솔직히 누님이 작정하고 저를 따돌리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요.
턱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쳐 내던 범진이 피식 웃었다. 삼두는 늘 구구절절 제가 얼마나 버티려고 애썼는지를 설명하곤 했지만 사실은 불필요한 일이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범진은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최영복이라.
그의 옆에 있는 동안 정만수에 대한 이야기는 가끔 들었다. 다른 인부들 말을 들어 봐도 그들의 친분은 가짜인 것 같지는 않았다.
오후 휴식 시간에 정만수는 종종 지갑에 끼워 둔 가족사진을 들여다보곤 했는데 그게 꽤 오래전에 찍은 사진이었던 모양이다. 죽은 딸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었는지 말을 걸면서 영복과 가까워졌다고 했다.
그런 최영복이 정만수를 밀었다면 동기는 무엇일까. 떨어지기 전 다퉜다면 정만수가 말을 했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니고.
“알았어. 원하는 대로 해 줘.”
제 말을 기다리고 있는 삼두에게 대답하며 범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최영복이 범인일 가능성은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준영이 그를 의심하고 있으니, 일단 그가 범인이라는 전제하에 동기를 예측해 볼 법도 했다.
‘돈? 언제나 돈이지.’
언젠가 그렇게 말하던 준영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최영복은 정만수와 가까웠고 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다. 빚에 시달리며 아내와 딸을 건사하려 애쓰는 모습에서 제 옛날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게 모두 진심이었다면.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다면.
에어컨의 서늘한 바람이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애매한 표정으로 웃던 영복의 얼굴이 떠올랐다.
단순히 애매한 표정이 아니었다. 너무 많은 감정이 뒤엉켜 있어서 읽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위험하지 않게 잘 지켜봐라. 나도 시간 되면 내려갈 테니까.”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직하게 말하자 삼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요, 형님. 따라붙는 차가 있습니다. 이틀째고요.
“3743?”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승운이었다. 그러나 삼두가 곧장 대답했다.
- 그 차는 아닙니다. 족쳐 볼까요?
“직접 나서지 말고 기회 만들어서 얼굴만 확인해. 한경에서 붙인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맞다면 일단 놔두고.”
- 알겠습니다.
삼두와의 통화를 마친 범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가득 내려앉은 어둠을 작은 빛들이 밝히고 있다. 야경이 나쁘진 않으니 역시 소파는 이쪽에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는 결국 세 번 위치를 바꾼 소파를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범진이 거처로 쓰는 집은 서울에만 네 개였다. 잠만 잘 수 있는 원룸부터 회장이 강제로 그에게 떠넘긴 제법 큰 펜트하우스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어느 집에 준영을 데려올지부터가 크나큰 난제였다.
보안을 생각하면 펜트하우스와 아파트가 낫겠지만 큰 평수는 쓸데없이 넓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출퇴근을 할 준영을 생각하면 역시 그 두 개가 나았다.
그렇다면 남는 방에 잡동사니를 가득 채워 못 쓰게 만들어 버리면 되겠지, 라는 계산하에 범진은 이 아파트로 결정했다. 딱히 생활을 하지 않아 다소 삭막한 느낌이 풍겼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꾸며 준영을 놀라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침실은 같이 쓴다고 해도 방 하나는 따로 있는 게 좋을 것이다.
준영의 집에서 봤던 그녀의 세간살이를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며 범진은 뻥 뚫린 거실을 둘러보았다.
소파에 앉아 야경을 내려다보는 준영의 모습이 그려진다. 부엌에서 물을 마시다 제게 다가와 허리를 끌어안으며 웃는 얼굴도.
그리움이란 잠시 묻어 둘 순 있어도 없앨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제 온몸에 빈틈없이 느껴지던 준영의 체온이 아직까지 생생했다. 그 숨결, 그 향기만 떠올려도 어린애처럼 가슴이 들뜬다. 당장 그 손을 잡고 품에 안을 수 없다는 것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잠깐 가서 얼굴만 보고 올까.
10시가 넘었으니 고속도로 상황이 나쁘진 않을 것이었다. 자고 있는 걸 깨우면 신경질을 내겠지. 하지만 그녀야말로 서른한 살 권범진에 대해 알아 둬야 했다.
얼마나 제게 미쳐 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