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64화 (64/86)

<6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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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사실이래? 정 씨가 떨어진 게 누가 밀어서 그랬다는 게?”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작업을 마치고 내려와 안전모를 막 벗고 있던 영복이 고개를 돌렸다. 한쪽에서 철근을 정리하고 있던 동료가 눈을 둥글게 뜨며 물었다.

“뭐? 누가 그런 소리를 해?”

“홍식이가 그러는데 지금 사무실에 경찰이 와 있다네, 그 사건 조사하러. 정 씨가 신고를 했대.”

퇴근을 준비하며 주변을 정리하던 사람들의 동작이 일제히 멈췄다. 먼지가 쌓이듯 희미하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불온한 공기가 떠돌았다.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정만수가 사고를 당한 시간대에는 야간작업을 하는 몇 명만이 현장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공사 현장으로 이어지는 길은 사무실을 거쳐서 들어오게 되어 있다. 외부인이 아무렇게나 드나들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즉, 어쩌면 야간작업을 같이 했었던 사람들 중 정만수를 떠민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뜻임을 모두가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 쪽에 보상금 얘기할 때가 아니었구먼.”

누군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서로 어색하게 눈길을 주고받는 사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인기척에 그들은 동시에 시선을 들었다. 딱 떨어지는 블랙 슈트를 입은 준영이 서 있었다.

“어이, 윤 대리. 우리가 무슨 얘길 하나 들었는데 말이야.”

“맞습니다.”

무덤덤한 그녀의 대꾸에 목수인 서 씨가 미간을 험상궂게 찌푸렸다.

“뭔 말도 안 꺼냈는데 맞대? 우리가 무슨 얘길 할 줄 알고.”

“정만수 씨 얘기 아닌가요?”

준영의 말에 서 씨가 입술만 비죽였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제 앞에 모이는 것을 본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귀에 꽂히는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만수 씨 일에 큰 관심을 보이셨던 만큼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정만수 씨는 그날 누군가에게 떠밀려서 추락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경찰 조사가 시작될 거예요.”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수군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준영은 그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그날 오후에 혹시 낯선 사람을 봤다거나, 함께 야간작업을 하신 분들 중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언제든지 저를 찾아 주세요. 참고로, 이미 아시겠지만 안전 설비 지적받은 부분은 전부 보강했습니다. 앞으로도 부디 개인 안전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고개를 가볍게 숙여 깔끔하게 인사를 한 뒤 돌아서서 걷던 준영은 제 뒤를 따르는 발소리에 흘끗 고개를 돌렸다. 백발이 성성한 영복이 목덜미를 긁적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거, 김 씨가 요즘 안 보이는데, 혹시 무슨 얘기 들은 거 없나 해서.”

여전히 그녀가 마뜩잖은지 영복은 다른 데를 보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런 태도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어쨌든 범진을 찾는다는 것은 그를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준영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글쎄요. 저도 잘. 걱정되세요?”

“아니, 뭐, 이 바닥 처음 굴러들어 온 놈치고는 일도 제법 하고 눈치도 있었으니까. 한 달 넘게 잘 나오다가 하루아침에 안 나타나니까 이상하지.”

“다른 일자리를 찾은 모양이죠.”

준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꽤 속정이 깊은 타입인 모양이었다. 가만 보면 영복은 쉰내를 풍기며 나타나기 일쑤인 다른 사람들에 비해 무척 깔끔했다.

땀과 먼지 냄새가 뒤엉킨 것은 별수 없었지만 그래도 영복에게서는 부드러운 섬유 유연제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혼자 산다고 들은 것 같은데 성격은 투박하지만 꼼꼼하게 살림을 돌보는 모양이었다.

“근데 저치랑은 무슨 관계래?”

“네?”

영복의 말에 준영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눈짓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삼두의 차가 있었다.

“김 씨도 없는데 왜 자꾸 나타나는지.”

“해 끼치지는 않을 거예요. 혹시 제 걱정 하시는 거라면 감사하고요.”

태연하게 대답하자 보란 듯이 이맛살을 찌푸리던 영복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믿을 수가 없구만. 만수가 떨어진 게 누가 밀어서 그런 거라니.”

준영은 그를 흘끗 보았다. 그나마 정만수와 가깝게 지낸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했던가.

“그날 같이 일하셨죠?”

“그랬지. 그 전에 비가 좀 와서 일이 늦어진 상황이라 급하게 하게 된 작업이었어.”

“작업 여부는 누가 결정하나요? 감독?”

“대부분 그렇지.”

“그럼 어느 날 야간작업을 하게 될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건가요? 구성원은 어떻게 꾸려지죠?”

쉼 없이 날아오는 그녀의 질문에 영복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감독 붙잡고 물어봐.”

“반장님이 먼저 말 시키셨잖아요. 저랑 얘기하고 싶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영복은 당당하게 말하는 준영을 보며 허, 하고 실소를 내뱉었다. 그는 허리를 쭉 펴며 말했다.

“오래 일한 사람들은 대강 알지. 비가 왔었으니까. 구성원이야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짜여지는 거고.”

“정만수 씨한테 원한 품은 사람은 없어요? 돈 문제가 얽혀 있다거나.”

무심하게 물어본 말에 영복은 가만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얼핏 무표정해 보였지만 무어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이 온 얼굴에 퍼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침묵 속에 천천히 숨을 들이쉰 영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팽팽하던 얼굴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만수는 착한 놈이야. 가족밖에 모르지. 보상금을 받아서 빚만 다 갚을 수 있었어도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

준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비딱하게 입술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애초에 도박을 하지 않았다면 빚을 질 일도 없었겠죠.”

정만수에 대한 신용 평가 서류는 진즉 읽었기에 썩 호의적일 수는 없었다. 다소 냉랭하게 흘러나온 그녀의 말투에 영복이 대번에 인상을 썼다. 목소리가 거칠게 튀어나왔다.

“곱게 자라서 뭘 모르는 모양인데,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야.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고.”

살다 살다 곱게 자랐다는 말을 다 듣다니. 준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실수라고 해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 특히나.”

그녀는 날카로워지는 영복의 눈매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 실수 때문에 그렇게나 아낀다는 가족들이 막대한 피해를 봤다면 더더욱.”

두 사람 사이에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영복의 눈이 매섭게 선을 그렸다.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뱉었다.

“가족을 생각했으니까 그런 선택까지 몰린 거잖아. 더 잘 살게 해 주고 싶어서. 고생하지 않게 해 주기 위해서.”

“아하, 그래서 도박을 하셨다? 듣던 중 가장 바보 같은 변명이네요. 가족을 위한다는 이유로 가족의 삶을 저당잡힐 거였으면 적어도 다른 가족의 동의를 얻었어야죠. 제정신이 박혔다면 동의를 할 리 없겠지만.”

단단한 근육이 붙은 영복의 목에 핏대가 불뚝 섰다. 그가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며 준영을 쏘아보았다.

“나락으로 몰린 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지? 모두가 당신처럼 정당한 길을 걸을 수 있는 건 아니야. 그 사람들이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괴로웠을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나?”

“아니요. 하고 싶지도 않네요. 제 귀에는 무책임한 변명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아서요.”

준영의 쌀쌀맞은 대꾸에 꽉 말아 쥔 영복의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차에서 내린 삼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벌게진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던 영복이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돼서 좋겠군.”

“도박으로 진 빚을 갚으라고 보상금을 줄 수는 없는 일이라. 회사는 자선 단체가 아니거든요.”

퉤, 하고 발밑에 침을 뱉은 영복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준영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긴장한 탓에 손이 뻣뻣해져 있었다.

한 대 맞는 줄 알았네. 왜 저렇게 죽자고 달려들어? 정만수랑 그렇게나 친했나?

“누님, 괜찮으세요?”

“잠깐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근처까지 온 삼두의 말을 빠르게 막으며 준영은 미간을 좁혔다.

뭔가 이상하다. 뭔가가 날파리처럼 머릿속을 날아다니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입맛을 다시며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배가 고파서 그런가 머리가 안 굴러가네. 저녁에 뭐 먹을까요?”

“저야 아무거나 좋습니다. 이제 퇴근하십니까?”

“네. 합니다, 퇴근.”

손을 까닥이며 준영은 차로 걸어갔다. 삼두가 깍듯하게 열어 준 문 안으로 올라탄 그녀는 딱딱하게 경직된 어깨를 두드렸다. 곧 운전석에 탄 삼두가 매끄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조만간 서울에 가게 될 것 같은데, 서울에서도 삼두 씨 내 옆에 있는 거예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형님이 따로 말씀이 없으셔서.”

으흠,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준영은 가방 안에서 서류를 꺼냈다. 범진이 말해 준, 이 지역 건설 현장의 추락 사고 관련 자료였다. 그녀는 눈으로는 서류를 훑어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할머니가 적적해하시겠네. 갑자기 우르르 빠져나가면.”

“김치가 아주 맛있었는데 말입니다.”

삼두의 시무룩한 말에 준영이 픽 웃었다. 그녀는 금세 서류 속의 내용에 빠져들었다.

사실 다른 피해자들은 그녀와, 아니, 정확히는 한경과 관련이 없었다. 경찰도 증언을 확보하긴 하겠지만 이 사건들을 딱히 연관 짓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준영의 입장에서는 정만수를 민 범인과 그들 사이에 무언가 접점이 있다면 알아 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어찌 됐든 비슷한 시기에 갑자기 추락 사고가 많이 일어난 것은 분명한 이상 징후이니 말이다.

서류를 빠르게 읽어 나가는 준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어쩜 이렇게 다들 비슷하지?”

“예?”

운전을 하던 삼두가 조심스레 그녀를 바라보았다. 준영은 서류를 뒤적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나이는 4, 50대, 이혼을 한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딸 하나 있는 3인 가정이고, 다들 빚더미에 앉아 있네요. 그런 것치고 인성에 대한 평가는 하나같이 나쁘지 않고, 가족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고. 채권자를 의심하자니 이름이 가지각색이고. 성진금융하고 성진캐피탈은 같은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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