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아래로 내린 준영의 손이 그를 스쳤다. 이미 단단해져 있던 몸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범진의 날렵한 턱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을 보며 준영은 그의 바지 지퍼를 천천히 내렸다.
“윤준영.”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반쯤 쉬어 있었다. 힘이 바짝 들어가 군더더기 없이 탄탄한 몸이 아름답다. 속옷 위를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자 범진이 억눌린 듯한 신음을 흘렸다.
그는 준영의 손목을 잡아채려 했지만 순간 멈칫했다. 부어 있는 그녀의 손목을 의식한 것이다. 입가를 끌어 올려 미소 지은 준영이 속삭였다.
“하고 싶어, 너랑.”
짧은 한숨과 함께 범진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살갗이 마찰할 때마다 짜릿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몸을 쓸어내리던 범진의 커다란 손이 안으로 향하자 준영의 허리가 들썩임과 동시에 속옷이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버, 범진아.”
“응.”
“권, 범진.”
“응.”
할짝이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가슴을 입술로 비벼 대던 범진이 달래듯 쉰 목소리로 대답한다. 준영은 제 몸 위에서 꿈틀대고 있는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강인하게 요동치는 근육이 그녀의 몸을 보호하듯 뒤덮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더, 빈틈없이 범진과 붙어 있고 싶다는 열망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체온이, 이 체취가, 이 무게감이 주는 느낌이 좋았다.
허벅지를 움켜쥐는 손길에 숨을 헐떡이던 준영이 범진을 마주 보았다. 열렬하게 달아오른 그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입술이 열리는 순간, 그가 몸속 깊이 밀고 들어왔다.
“흐윽!”
안을 꿰뚫는 느낌에 준영이 신음했다. 온몸이 바짝 수축했지만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상태였다. 범진이 그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괜찮아?”
느슨하게 허리를 쓸어 주는 다정한 손길에 준영이 가늘게 눈을 떴다. 범진의 턱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톡, 떨어졌다.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낸 저를 향한 걱정에 어릴 때의 그가 겹쳐진다. 미간을 찌푸린 채 숨을 참고 있던 준영은 그제야 들뜬 숨을 한 조각 뱉어 냈다.
“너 나랑, 흣, 그 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 생각나?”
엉덩이를 조금 뒤틀자 반쯤 이어져 있는 그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준영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꽉 짜인 근육이 솟아 있는 그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여기서 뭐 하냐고 했더니 자지, 라고 했잖아.”
“……윤준영.”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꽉 다물린 잇새로 범진이 그녀를 부른다. 그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그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심호흡을 한 준영은 땀이 배어 있는 범진의 등을 조금 당기며 말했다.
“그게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네.”
“너.”
경고하듯 짧게 말을 자른 범진의 눈빛에 여유가 날아갔다. 그가 키스를 퍼부으며 그대로 끝까지 허리를 쳐올렸다.
“하아!”
“사람 미치게 하는 데 도가 텄지.”
짓씹듯 말을 뱉은 범진이 한계까지 벌어진 몸을 가득 채운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를 튕길 때마다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스치는 곳을 따라 온몸의 감각이 꼿꼿하게 일어선다. 미지근하게 몸을 적시고 있던 쾌감이 어느 순간 불꽃처럼 터져 올랐다.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떨자 바닥까지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핥듯이 내려앉았다.
“그거 아냐, 윤준영.”
“무, 뭘?”
묘하게 불길한 느낌에 힘겹게 숨을 내쉬며 준영이 물었다. 선이 또렷한 범진의 입술이 길게 웃으며 속삭였다.
“넌 이제 죽었어.”
“그게 무슨…… 앗, 흐윽!”
제 목이 제 것이 아닌 듯한 목소리를 낸다. 거칠게 몸이 흔들릴 때마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대로 어딘가로 떨어져 버릴 것 같아 준영은 정신없이 범진의 몸을 부여잡아야 했다. 기꺼이 그녀를 지탱해 주는 범진의 움직임이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 * *
“다 됐어.”
다 된 건 냄새로 안다. 하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침대에 엎드린 채 준영은 손가락만 겨우 까닥였다. 기척이 없자 범진이 활짝 열린 문 쪽으로 다가왔다.
바지만 주워 입은 상태였지만 그는 매우 느긋해 보였다. 널찍하게 뻗은 어깨와 늘씬한 몸을 뽐내듯 드러내고 있는 범진을 노려보며 준영이 이를 갈았다.
“돌아갈 수 있다면 순진했던 열여덟 윤준영에게 꼭 한마디 해 주고 싶네.”
“이상하군.”
눈썹을 비딱하게 추켜올린 범진이 침대로 다가가며 말했다.
“내 기억 속의 윤준영은 순진했던 적이 없는데.”
“오지 마. 저리 가. 무슨 염치로 여길 올라와?”
한쪽 무릎으로 침대를 지그시 누르는 그를 흘끗 돌아보며 준영이 파리라도 쫓듯이 손을 파닥였다. 낮게 웃음을 흘린 범진이 그녀의 손가락을 가볍게 쥔 채 입을 맞췄다.
“배고프다면서. 라면 불어.”
“몸이 내 말을 안 듣잖아. 누가 실컷 해 댄 덕분에.”
“마지막에 내 위로 올라탄 게 누구…….”
“내 옷! 옷 좀 줘!”
준영의 발에 걷어차인 범진이 피식 웃으며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니트를 집어 들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낑낑대며 이불로 감싼 상체를 일으키고 있는 준영의 머리에 니트를 뒤집어씌웠다. 소매에 팔을 끼운 준영이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안아서 옮겨 줘?”
“됐어. 사람을 반 죽여 놓고 이제 와 친절한 척하긴.”
불퉁하게 말을 뱉은 준영은 그러면서도 옆에 서서 자연스레 허리를 감싸 주는 범진을 밀어내진 않았다. 그에게 반쯤 기댄 채 부엌으로 간 준영은 의자에 앉았다.
식탁 한가운데 놓인 라면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진한 국물 색을 보는 순간 허기가 그녀의 위장을 급습했다.
범진이 건넨 젓가락을 받아 든 준영이 입에 라면을 밀어 넣었다. 웃지 않으려 했지만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온다. 맞은편에 앉으며 그녀를 곁눈질한 범진이 물었다.
“왜 웃어.”
“여전히 맛있는 게 웃겨서.”
라면이야 다 똑같은 맛일 게 뻔한데도 이상하게 범진이 끓인 라면은 특별하게 맛있다. 어릴 때 단기간에 가장 많이 먹어 본 맛이라 그런 것일까.
매콤하면서도 감칠맛이 나는 라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준영의 눈썹이 비딱하게 올라갔다.
“달걀 안 풀었네.”
“나도 안 풀어 먹어, 이제.”
범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눈을 깜박이던 준영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난 이제 풀어 먹는데.”
라면을 옮겨 담던 범진의 눈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침묵 속에서 준영은 라면을 후루룩 먹었다. 어딘가 고장 난 것인지 자꾸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몇 시야?”
준영의 질문에 범진이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넘었어.”
“오늘은 못 가겠다. 내일 첫차 탈까 봐.”
“그래, 그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범진이 한 젓가락에 라면 절반을 먹어 치우는 것을 본 준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국물을 홀짝이던 그녀는 슬쩍 말을 꺼냈다.
“너도 여기 있을 거지?”
“집에 갈까 했는데.”
“뭐? 왜? 부산까지 같이 가겠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내려가기 전에 우리 집이 어딘지 한번 가 보는 게 낫지 않을까 했는데, 피곤하면 그냥 여기 있어. 다음에 가면 되니까.”
“아, 난 또.”
덤덤한 그의 대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준영이 고개를 주억였다. 범진이 흘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두고 갈 줄 알았냐.”
“제정신이면 안 그럴 줄 알았어.”
코를 찡긋거리며 웃은 준영이 젓가락질을 하는 걸 보며 범진도 눈으로 웃었다. 둘 다 배가 고팠던 탓에 라면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식기를 싱크대에 가져가 물로 헹구며 범진이 물었다.
“정만수 일은?”
“음, 경찰 설득하는 중이야. 정만수 씨는 거의 작업 끝났고.”
소파로 가서 비스듬히 앉아 배를 두드리며 준영이 대꾸했다. 범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가 끝나?”
“경찰 쪽에 누가 밀어서 떨어졌다고 증언하는 거 말이야. 그게 시작이니까.”
범진의 입술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하여튼 똑똑하지, 윤준영.
“물세례는 또 안 당했냐.”
“물이면 다행이게?”
“뭐?”
막 스펀지에 거품을 내던 범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준영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눈물 세례였지.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을 때 앞으로 살면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위험 요소에 대한 내 설명이 너무 리얼했나 봐. 그 정도면 거의 미래를 한번 보고 온 셈이거든.”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린 범진이 고개를 내저으며 식기에 거품 칠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준영이 소파에서 일어나 슬금슬금 다가갔다.
범진은 문득 뒤에서 감겨 오는 팔의 감촉에 손을 멈췄다. 허리를 끌어안은 준영의 뺨이 등에 닿아 있었다.
“형사 사건으로 넘기면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을 거야. 생각보다 서울에 금방 돌아오게 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뭐가?”
나직하게 되묻자 준영이 웅얼거렸다.
“불편하지 않겠냐고. 덜컥 집에 오라고 해 놓고는 후회하고 있을까 봐. 발 뺄 기회 줄게. 지금 말해.”
식기를 헹구던 범진이 짧은 한숨과 함께 물을 잠갔다.
“네가 도망칠 생각 하는 건 아니고?”
“내가?”
“왜. 자 보니까 별로야?”
몸을 뒤로 돌리자 준영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게 보였다. 범진은 젖은 손으로 그녀의 콧등을 톡 건드리며 말했다.
“싫어서 우는 것 같지는 않던데.”
“야!”
당황한 준영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범진이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준영은 슬쩍 제 엉덩이를 감싸며 내려오는 손길에 미간을 치켜세웠다.
“뭔데, 이거?”
“너 도망 못 가. 난 발 뺄 기회 같은 것도 안 줄 거고. 그리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범진이 그녀를 천천히 당기자 하반신이 완전히 맞닿았다. 그가 나직하게 말을 뱉었다.
“이렇게 생각 없이 안기는 건 고문이라고.”
얼마나 지났다고 그의 몸이 또다시 단단하게 형체를 갖춘 채 열기를 뿜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뛰는 속도를 달리하는 것 같았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준영은 헛기침을 하며 매끄러운 그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고문은 참아야 할 때가 고문인 거지.”
의외의 말에 범진이 가늘게 뜬 눈을 깜빡였다. 준영이 눈꼬리를 올리며 새침하게 말했다.
“우리 첫차 탈 때까지 시간 많아.”
입술을 비죽이며 개구쟁이 같은 눈웃음을 짓는 그녀를 본 범진의 턱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너 진짜, 하고 한숨처럼 중얼거린 그가 단숨에 준영을 훌쩍 들어 올렸다.
작게 웃음을 터뜨린 준영은 탄탄한 그의 목덜미를 감싸 안고서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소파에 나동그라진 그녀의 웃음이 잔뜩 들뜬 신음이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