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62화 (62/86)

<62화>

“계속 네 생각만 하고 네 얘기만 하고 있었는데, 실물이 오니까 좋다.”

준영의 목소리가 스치는 목덜미가 간지럽다. 그 숨결을 따라 가슴 언저리가 천천히 조여든다. 심장이 묵직하게 뛰고 있었다. 저절로 힘이 들어간 손이 그녀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어떻게 할래.”

그의 말에 준영이 조금 고개를 비틀었다.

“뭘?”

“나승운.”

눈을 깜빡이던 준영은 그의 어깨를 짚은 채 몸을 떼어 냈다. 범진의 새카만 눈이 자연스레 그녀를 찾았다.

“뭘 어쩌게?”

“그걸 묻는 거잖아.”

“묻는다는 말 하지 마. 예전에도 농담으로 안 들렸지만 지금은 더 하니까.”

진지하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도 범진은 부정하지 않고 눈썹만 들썩였다. 피식 웃은 준영이 손을 미끄러뜨려 그의 손을 찾았다. 단단한 손바닥을 반쯤 쥐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오늘은 내가 너무 자극했어. 빨리 끝내 버리고 싶은 마음에 성급했지. 시간을 좀 더 들여야 했나 봐.”

“잠깐 봤지만 나승운도 눈빛이 정상은 아니…….”

갑자기 끊긴 범진의 말에 준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범진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에 닿아 있다. 양쪽이 다 검붉게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범진의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낮게 내리뜬 눈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승운이 이랬어?”

나직한 목소리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차분하게 느껴졌지만 그래서 더 심상치 않았다.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짓눌리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손목이 원래 잘 부어.”

“그 자식 편드냐?”

“뭐. 그래서 어떻게 하게. 가서 묻어 버리게? 나 너 유치장에서 본 거 한 번으로 족하다.”

불만스럽게 눈을 치뜨는 범진의 뺨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며 준영이 투덜거렸다.

“도움이 필요할 거 같으면 말할게. 그때 모른 척하지나 마.”

범진은 잠자코 눈을 내리깔았다. 머릿속에 승운의 마지막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준영의 손목을 살펴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집부터 옮기는 게 낫지 않겠어?”

“어차피 이제 부산 갈 텐데, 뭐. 아직 일 마무리가 안 됐잖아. 서울에도 드나들겠지만 그건 일정이 불규칙하니까. 참, 나 삼두 씨랑 같이 부산 가? 내 가방…….”

“내 차에 있어. 삼두도 붙여 보낼 거고. 오늘은 내가 바래다줄게.”

“부산까지? 그럴 거 없어. 기차가 더 편한데.”

“그럼 기차로 같이 가든가.”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대답에 준영의 입술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울림이 낮은 범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서울 올라오면 우리 집으로 와. 회사 다니기도 멀지 않을 거야.”

제 손에 겹쳐져 있는 그의 손등을 보고 있던 준영의 눈썹이 치솟았다. 둥글게 눈을 뜬 그녀는 무표정한 범진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한집에서 살자고? 야, 권범진. 물론 내가 연애를 하자고 하긴 했지만 너무 빠르다고 생각 안 하니?”

“농담하는 거 아니야.”

묵직한 범진의 말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준영의 눈도 차츰 제자리를 찾았다. 범진이 곧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홍미향 이사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짐작하고 있을 테고, 나승운이 있으니 그쪽에서도 너와 내가 무슨 사인지는 눈치챘겠지. 어떤 식으로든 널 이용하려고 할 수 있어. 일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우리 집에 있는 게 안전해.”

일리 있는 말이었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준영의 입술이 짓궂게 휘어졌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날 스파이로 쓰시겠다?”

언젠가 범진이 했던 말을 따라 하자 미간을 치켜세운 그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넌 스파이로 적당하지 않아.”

“내가 왜? 똑똑한 건 이미 검증됐고, 거짓말도 잘하고, 한경 속사정도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는데. 아, 물론 널 도와주겠다는 건 아니야. 그건 별개의 일이지.”

“내가 널 그런 식으로 쓸 수가 없다고.”

빠르게 말을 뱉어 내던 준영은 덤덤하게 날아온 대꾸에 입을 멈췄다. 날카로운 범진의 눈매가 똑바로 그녀를 향해 있었다.

색이 짙은 눈동자를 바라보자 심장이 움찔거리는 것 같다. 흔들림 없는 그의 눈빛은 어쩐지 사람 마음의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괜스레 머쓱해진 준영이 발을 까닥이며 눈을 굴렸다.

“알았어. 그럼 신세 좀 질게. 한 침대 쓰자고만 하지 마라.”

“안 돼?”

“뭐?”

준영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느릿하게 숨을 들이쉰 범진이 낮추고 있던 몸을 천천히 세운다.

“얌전히 주제 파악하고 멀어지려는 사람 멱살 잡고 끌어다 앉혀 놓고.”

선이 또렷하고 강렬한 그의 얼굴이 가까워짐에 준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범진의 입꼬리가 매끄러운 사선을 그렸다.

“여기서 물러설 생각인 건 아니지, 윤준영.”

“너…… 아니, 나는…… 네가 그런 쪽에는 별로 감흥이 없는 줄…….”

“남자가 어떤 동물인지를 모르는군.”

희미하게 눈으로 웃은 범진이 손을 뻗었다. 준영은 그의 손이 흘러내린 제 머리칼을 스치는 감각에 목덜미를 움츠렸다.

“덜 마른 네 머리만 봐도 피가 쏠려.”

가라앉은 목소리가 피부를 간질인다. 범진의 손이 아래로 내려와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덮었다.

“손이 닿으면 말할 것도 없고.”

체온이 높은 편인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예 델 것처럼 뜨겁다. 숨을 내쉬는 것도 잊고 준영은 범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낮게 눈을 내리뜬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까처럼 생각 없이 안기는 건 고문에 가깝지.”

주변의 공기가 마치 얄팍한 유리벽이 된 것 같다. 미세한 소리만 내도 그대로 깨져 버릴 것처럼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준영은 이런 식의 긴장감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성적인 느낌을 풍기는 긴장감 말이다.

범진이 풍기는 압박감에 가슴이 짓눌려 숨이 막혔다. 조금만 방심하면 그대로 잡아먹혀 버릴 것만 같았다. 어깨를 조금 움츠린 준영이 입술을 달싹였다.

“너 갑자기 왜, 왜 이래?”

“뭐가.”

“너무 가깝잖아.”

범진의 눈썹이 비딱하게 치켜 올라갔다.

“입술부터 들이댄 네가 할 소리냐.”

“그때는……!”

발끈해서 눈을 치켜뜨던 준영이 그대로 굳었다. 순간 고개를 비튼 범진이 훅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느낌이 드는 입술이 그녀의 것에 맞닿았다. 깜짝 놀라 짧은 한숨을 뱉어 내는 사이 범진이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다.

제 뺨을 가볍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뒤로 밀리지 않게 목덜미를 받쳐 준다. 자연스레 입술이 벌어지자 미끈한 혀가 침범했다.

부드럽게 얽혔다 떨어지는 동안 맞물린 입술 새로 젖은 숨이 섞여 들기를 반복했다. 그것만으로도 가슴 어딘가가 벅차올라 준영은 어깨를 잘게 떨었다.

느릿하게 입술을 놓아준 범진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얼굴이 붉어진 준영이 바짝 눈을 올려 뜨는 것을 본 그의 단정한 입술이 보기 좋게 기울었다.

“네 말이 맞아.”

“무슨 말?”

입술이 젖어 있는데도 어쩐지 버석하게 마른 기분이다. 어색한 기분으로 되묻자 범진이 대답했다.

“생각해 본 적 있었어. 만약에, 내가 일부러 찾지 않았는데도 어느 날 정말로 우연히 너와 마주치는 날이 온다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준영이 서서히 눈을 들었다. 까맣게 빛나는 범진의 눈이 흔들림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어떻게 해서든 잡으라는 뜻이 아닐까 하고.”

그는 조심스레 흐트러진 준영의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손가락이 스치는 모든 곳에 불씨가 옮아 붙는 것 같다. 왜인지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범진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날 혼자 둬서 미안했다. 윤준영.”

심장이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것 같았다. 순식간에 준영은 그때로 돌아갔다. 그날, 범진을 기다리다 캄캄한 창고 집에서 혼자 눈을 떴던 그 순간으로.

불과 조금 전 제 입으로 승운에게 한 말이다. 그리고 재작년 승운의 입을 통해 처음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이렇게까지 울컥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꾹 눌러 왔던 감정들이 마치 속박에서 풀려나듯 순식간에 범람하고 있었다.

흐느낌과도 비슷한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범진의 손이 그녀의 뺨을 천천히 훑었다.

안도할 수 있는 손. 이 손만이 줄 수 있는 감정들을 얼마나 그리워했었던가.

“네 말대로 후회하느니 온 마음 다 바쳐서 잘해 줄게.”

범진이 속삭이는 말에 준영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눈앞이 흐려져 있었다.

“당연하지, 이 나쁜 놈아.”

손을 뻗자마자 그녀를 끌어안은 범진의 입술이 다시금 겹쳐졌다. 아까처럼 부드럽지도, 신사적이지도 않았다. 콧날과 입술이 아플 정도로 비벼지고 짓눌렸지만 준영은 그의 목덜미를 꼭 잡은 채 매달렸다. 그동안 품어 왔던 모든 것을 전해 주고, 돌려받는 것 같은 키스였다.

어느새 몸이 붕 떠올라 그녀는 반사적으로 범진의 허리에 다리를 두르며 매달렸다. 잠깐 숨을 헐떡이는 사이 범진이 그녀의 가슴 언저리에 입을 맞췄다. 그의 콧날이 가슴을 스치는 감각에 아랫배로 짜릿한 감각이 흘러내려 가는 것 같았다.

“침실이 어디야?”

“저쪽.”

고갯짓으로 가리키자 범진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침대에 가볍게 떨어진 준영은 셔츠를 뜯듯이 벗으며 제 위로 천천히 덮쳐 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감출 수 없을 만큼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다.

두 팔 아래 그녀를 가둔 범진이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느릿하게 어루만진다. 이마와 눈썹, 눈가를 따라 뺨을 감싸는 손바닥의 열기가 좋았다. 준영이 그 손을 잡아 입을 맞추자 낮게 억눌린 신음을 뱉어 낸 범진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아…….”

그의 입술이 살갗에 비벼질 때마다 몸이 저절로 들썩였다. 조금씩 차오르는 흥분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고개를 뒤틀던 준영이 움찔했다. 니트를 젖히며 들어온 범진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고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거실의 조명이 비추는 게 빛의 전부였다. 하지만 어두운 와중에도 범진의 열띤 눈은 선명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아, 흐읏.”

피부를 더듬던 손이 속옷을 풀어냈다. 가볍게 움켜쥐던 손가락이 예민한 곳을 스치자 준영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있던 범진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두 팔을 올리고 니트가 벗겨지는 모든 순간이 떨림으로 가득했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준영은 동작을 멈추고 가만히 저를 내려다보는 범진의 시선에 어깨를 움츠렸다.

“뭐, 뭘 그렇게 봐?”

깨끗하게 드러난 제 몸을 따라 눈으로 선을 그리듯이 바라보던 범진이 중얼거렸다.

“예뻐서.”

품평하는 눈이 아니었다. 그저 솟아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민망했지만 저 역시 그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준영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빨리 안아 줘.”

“……넌 그 입 좀…….”

“널 위해 하는 소리잖아. 거기 괜찮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