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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여명일 뿐-61화 (61/86)

<61화>

억누르려고 했지만 감정이 담겨 저절로 말이 빨라졌다. 준영은 홉뜬 눈으로 저를 보는 승운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꼬리가 희미하게 휘어졌다.

“승운아. 나는 네가 장세라와 침대에서 뒹구는 현장을 봤어도 생리적인 혐오감 외에는 아무렇지 않았을 거야.”

보기 좋게 서글서글한 느낌을 풍기는 승운의 눈매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 준영은 달콤한 말투로 속삭였다.

“나는 단순히 너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야. 너를 용서할 수 없는 거지.”

깊은 곳에서부터 응축된 듯한 숨을 토해 내며 승운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내가 권범진이 남긴 말을 전해 주지 않아서? 어차피 그대로 사라져 버릴 놈이었어. 다시 나타나지 않을 놈이었고! 그런 대단찮은 일로……!”

“나한테는 대단한 일이었어.”

그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준영이 냉랭하게 말했다.

“차라리 네가 그때 말해 줬더라면 더 빨리 털어 냈을지도 모르지. 비슷한 이름만 보여도 가만있지 못하고, 비슷한 체형에 비슷한 옷만 걸치고 있어도 강박적으로 쫓아가 얼굴을 확인하는 일 같은 건 안 했을 거야. 아무것도 모른다는 지옥이 어떤 건지 넌 몰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준영은 점차 고개를 떨구는 승운을 따라 시선을 낮추며 쐐기를 박았다.

“네 덕분에 권범진은 내 안에서 어떤 식으로도 정리되지 못했고, 지금까지 생생하게 살아남았어. 용서할 순 없지만 고맙다고는 말해 줄게. 다시 만났으니까.”

승운의 입술 틈으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소리 내어 웃기 시작한 그가 일그러진 눈으로 준영을 응시했다. 물기가 어려 반짝이고 있었지만 돌덩이처럼 느껴지는 눈동자였다.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짓씹듯 내뱉었다.

“너는 그 자식과 잘될 수 없어. 물론 시간이 필요하겠지. 오랜만에 만났으니 들떠 있을 거야. 저 속옷 차림으로 그 자식 앞에서 다리를 벌릴 생각이겠지만.”

순간 제 손목을 세게 낚아채는 손길에 준영이 작게 신음했다. 손목뼈가 시큰거릴 정도의 통증이었다. 부서뜨릴 듯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승운이 으르렁거렸다.

“너무 더럽히진 마. 적당히만 즐기라고. 나한테 왔을 때 그래도 내가 받아 줄 수 있을 정도는 돼야지.”

“이거 놔, 나승운!”

뿌리치려 했지만 승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녀의 손목을 더욱 잡아당겼다. 콧날이 부딪치고 숨결이 느껴질 정도까지의 거리에서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가슴을 내리치자 다른 손목마저 움켜쥔 승운이 빠르게 말을 뱉었다.

“용서할 순 없지만 고맙다고? 네가 내 앞에서 그렇게 오만할 수 있는 건 내가 그럴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야. 앞뒤는 가릴 줄 알아야 하잖아. 응? 준영아.”

“이거 놓으라고!”

“그러니까 내 말 똑바로 들어, 사람 돌아 버리게 하지 말고!”

거실이 크게 울릴 정도의 고함에 놀란 준영이 눈을 부릅떴다. 손목의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승운이 제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우습게 본 것이 아니었다. 힘의 우위를 떠나서 그럴 수 있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으로 나눈다면, 승운은 단연코 후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승운의 눈을 들여다본 그녀는 자신할 수가 없어졌다. 그가 제게 무엇을 하려는지 조금도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들거리는 눈으로 코앞까지 다가온 준영을 노려보는 승운의 뒷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잡아챈 것은 초인종 소리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현관 쪽으로 향했다. 단조로운 노랫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은 거실의 공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승운의 손에서 힘이 조금 빠져나가는 것을 감지한 준영이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옆집일 거야. 싸우는 것 같아서 왔나 봐.”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보내고 마저 하자.”

그녀의 손목을 쥔 채 승운이 현관으로 걸어갔다. 준영은 그제야 비로소 들리지 않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 목덜미가 다 뻐근했다. 꽉 잡힌 손목은 피도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승운을 말로 설득시킬 수 있을까? 누군지는 모르지만 도움을 청해야 하나. 그게 오히려 승운을 자극하지 않을까?

일단은 밖으로 나가야 한다. 집에서 둘만 있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초인종은 끈기 있게 울렸다. 준영은 뒤에 서 있는 승운에게 손을 잡힌 채 천천히 문을 열었다. 사실 이 집에 드나드는 사람은 나승운뿐이었기 때문에 문밖에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정말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옆집 사람인가, 하던 그녀의 눈이 어둑한 그림자를 확인하고는 휘둥그레 커졌다.

새카만 셔츠에 새카만 바지를 입고 머리를 자연스레 흩뜨린 범진이 거기 있었다.

“어떻게……?”

“윤준영.”

나직하게 그녀를 부른 범진의 눈이 그녀의 뒤에 있는 승운에게 닿았다. 깊이 파인 그의 눈매가 날카로운 선을 그리며 가늘어졌다.

“남자 필요해?”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이 확 잡아당겨졌다. 안으로 파고든 범진이 그녀와 승운의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당황한 승운은 준영의 손을 놓친 채 뒤로 물러섰다.

“궈, 권범진.”

“자주 본다. 그것도 의외의 장소에서.”

준영을 완전히 등 뒤로 감춘 범진이 느긋하게 턱을 들었다. 그의 눈이 빠르게 집 안 상황과 승운의 표정을 훑어보았다. 동공이 부풀 정도로 흥분한 승운이 가까스로 호흡을 가라앉히고는 입을 열었다.

“나한테 준영이 집은 그런 장소가 아닌데. 항상 드나드는 곳이었거든.”

“이젠 아니지.”

덤덤하게 그의 말을 자르며 입꼬리를 올린 범진이 옅게 웃었다.

“신경 좀 써라. 나한테 오해받기 싫으면.”

너른 어깨에 딱 맞는 검은 셔츠를 입은 그의 복장은 단순했지만 묘한 위압감이 있었다. 그럼에도 승운은 귀에 거슬리는 말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는 입아귀를 비틀며 이죽거렸다.

“오해? 네가 뭔데 너한테 오해를 받는다는 말을 하지?”

“내가.”

범진은 흘끗 뒤를 돌아보며 느릿하게 물었다.

“뭐지, 윤준영?”

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승운은 그저 그녀의 두 팔이 뻗어 나와 범진의 허리를 꼭 끌어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눈가가 경련하는 것을 본 범진이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용건 끝났으면 그만 비켜 주지. 안 끝났어도 비키고. 우리가 시간이 얼마 없어서.”

승운은 그의 눈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이 순간의 흉포함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웃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등줄기가 바짝 조여들고 입 안이 말라붙는 것 같았다.

“그래. 마침 가려던 참이었어.”

억지로 말을 뱉어 내며 승운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다음에 또 보자. 준영아, 부산 조심해서 내려가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그는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한순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범진은 여전히 등 뒤에 달라붙어 있는 준영의 체온에 눈썹을 까닥였다. 허리를 조이고 있는 손은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나승운 몰래 만난 게 찔려서 그래? 한두 번도 아닐 텐데 뭘 새삼.”

놀리는 말을 해 봤지만 준영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대번에 인상을 쓰며 3단 콤보로 대꾸를 해야 정상인데 말이다.

미간을 좁히던 범진은 그제야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손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윤준영. 얼굴 좀 보여 봐.”

“싫어.”

등에 묻혀 나온 목소리는 다행히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썹을 치켜세운 그가 재촉했다.

“그럼 무슨 일인지 말을 해.”

“……풀렸어.”

“뭐?”

“다리에 힘이 풀렸다고.”

그제야 옆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민 준영이 퉁명스레 말을 뱉었다. 혀를 찬 범진이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당기며 몸을 돌렸다.

“안아 달라는 말을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지.”

“아, 잠깐. 야!”

몸을 낮춘 범진이 어깨로 그녀의 상체를 밀듯이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허공으로 치솟은 준영이 버둥거렸지만 안정적으로 그녀의 허리와 허벅지 뒤를 받친 범진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자연스레 닫혔다.

“사람을 무슨 짐짝처럼, 이건 안아 주는 게 아니잖아.”

준영의 불평을 무시하며 범진은 눈에 보이는 식탁 위에 그녀를 앉혔다. 눈높이가 맞아야 제대로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두 팔 사이에 그녀를 가둔 범진이 치뜬 눈으로 바라보자 준영이 좌우로 눈동자를 굴렸다. 눈가가 조금 발긋해진 것을 빼면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주의 깊게 제 얼굴을 샅샅이 보고 있는 그의 시선에 준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삼두.”

“아. 나승운 여기 있는 것도 알고 온 거야?”

“차를 봤어.”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범진의 눈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별수 없이 시선을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느릿하게 물었다.

“큰 소리가 나던데.”

“좀 싸웠어. 넌 내가 연락한다니까 그새를 못 참고 찾아오냐.”

“응.”

범진은 농담처럼 뱉어 낸 그녀의 말에 순순히 대꾸했다.

“안 참기로 했거든.”

준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범진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내 눈엔 ‘좀’ 싸우는 것 같지 않았는데, 혹시 나 때문이야?”

“나승운 때문이지. 계속 덮고만 있던 게 오늘 터진 거고. 차차 해결될 거야. 너 향수 뿌렸어? 좋은 냄새 나.”

“윤준영.”

나직하게 그녀를 부르며 범진이 조용히 덧붙였다.

“너 계속 떨고 있는 거 알아?”

준영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이내 보란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쌀쌀맞게 말했다.

“근데 안 안아 주고 뭐 해?”

범진은 저를 향해 준영이 길게 팔을 뻗는 것을 보았다. 말투는 태연했지만 표정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나승운.

……이 개새끼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의 손이 허리에 닿자마자 준영이 서슴없이 그의 목을 휘감는다. 따뜻한 무게가 몸에 실렸다. 부드러운 어깻죽지에 코를 박자 준영의 향기가 넘실대며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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