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8
[집에 들러서 짐 좀 챙기고 만나는 게 낫겠다. 연락할게.]
오랜만에 돌아온 회사라 처리해야 할 잡일이 많았다. 거울을 들여다본 준영은 눈 밑이 퀭한 제 얼굴에 기겁해서 얼른 범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날아온 그녀는 서둘러 샤워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 캐리어를 챙기는 중이었다.
“아, 내 가방. 삼두 씨 차에 있는데. 갈 때도 설마 삼두 씨랑 가게 되려나? 자기가 내려가진 않을 것 같지?”
범진의 상황을 떠올려 본 준영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향과 함께 있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했다.
종종 미향의 정보책 노릇을 하고, 승운과 자주 만나는 데다 업무 특성상 회사의 흐름에 밝아야 하다 보니 그녀는 미향이 왜 범진을 만나는지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한경에 대한 미향의 야심을 알기 때문에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순서라고 볼 법한 일이었다.
추적할 수 없는 자금이 필요한 자와 그것을 다루는 자가 만날 이유가 달리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한경 내의 지분 다툼 같은 것은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설사 미향의 쿠데타가 성공해서 그녀 혹은 승운이 회사의 실권을 쥐게 된다고 해도 제 입장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성가신 일이 더 많아질 뿐이겠지.
고개를 저으며 준영은 마지막으로 속옷을 담은 파우치를 캐리어에 던져 넣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단색의 속옷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런 걸로 괜찮나?
“신경을 써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입술을 비죽이던 준영이 비딱하게 팔짱을 꼈다.
“하긴. 어차피 같이 안 갈 거잖아. 삼두 씨나 내 옆에 붙여 두고.”
아니, 애초에 그럴 생각이 있긴 있나?
준영은 눈을 굴리며 생각을 더듬었다.
범진이 왜 저를 밀어내려 하는지 정도는 진즉 알아챘으니 상관없다. 중요한 건,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맞췄지만 심장은 고공 점프라도 한 것처럼 미친 듯이 뛰고 있었던 저와는 달리 범진의 표정은 미지근했었다는 사실이다.
……옛날엔 분명히 자기가 날 더 좋아했으면서.
속옷 파우치를 집어 든 채 진지한 얼굴로 이리저리 돌려 보던 준영의 귀에 띠띠, 전자음이 울렸다. 누군가 그녀의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준영은 옅은 한숨을 삼켰다.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동 오류를 알리는 경고음이 이어졌다. 승운이 마지막으로 왔던 날, 그를 보낸 뒤 준영은 곧장 비밀번호를 바꿨다. 명인일보와의 혼사가 본격적으로 추진될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그와는 충분히 거리를 둬야 했다. 쓸데없는 스캔들에 휘말릴 생각은 없었다.
초인종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식탁 위에 올려 둔 그녀의 휴대폰이 드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영은 미향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저를 돌아보던 승운의 표정을 떠올렸다.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긴 했다.
“안에 있는 거 알아, 준영아. 문 열어. 얘기 좀 하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승운의 목소리가 둔탁하게 날아왔다. 짧게 혀를 찬 준영이 일어서서 현관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자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려던 승운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비밀번호 바꿨네.”
“부산 곧 내려가 봐야 해. 짐 챙기느라 정신없어.”
그녀의 무감한 말에 승운의 눈꼬리가 힘없이 처졌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나직하게 말했다.
“나 오늘 너무 힘들었어, 준영아. 10분도 못 내줘?”
준영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정리를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아까울 것도 없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서 얘기하자.”
“왜?”
반사적으로 반문하던 승운이 갑자기 매섭게 눈을 치뜨며 문을 확 잡아당겼다. 앞으로 휘청거린 준영은 순식간에 집 안으로 들어서는 승운을 돌아보았다.
“나승운!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승운은 대꾸도 하지 않고 집 안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 닫힌 방문을 모조리 열어 보고 나서야 그는 거실 한가운데 우뚝 멈춰 섰다. 준영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승운이 어색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돌렸다.
“범진이가 있는 줄 알았어. 정말로 짐 싸고 있었구나.”
준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헛숨을 내뱉었다. 펼쳐진 캐리어를 보던 승운이 천천히 무릎을 접으며 몸을 낮춘다. 그의 손이 제 속옷 파우치 언저리에 닿는 것을 본 준영이 서둘러 그것을 낚아챘다.
허공에 남은 제 손을 응시하던 승운이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본다. 준영이 날카롭게 말했다.
“권범진이 여기 있고 없고는 너랑 상관없어. 나도 숨길 이유 없고.”
“하지만 나한테 말하지 않았잖아.”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승운이 덧붙였다.
“범진이랑 다시 만났다는 거.”
가슴이 답답해진 준영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숨길 이유도 없지만 보고할 이유는 더더욱 없지.”
“보고라니……. 준영아. 그런 건 보고가 아니야. 친구 사이에 그런 일이 있으면 말할 수 있잖아. 게다가 나는 권범진을 알고 있는 유일한 네 주변 사람인데.”
“그렇다면 네가 생각하는 친구와 내가 생각하는 친구가 다른 모양이네.”
“그래.”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승운이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건 예전부터 달랐어.”
준영은 제 정면에 선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승운이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넌 알고 있었을 거야. 내가 왜 네 옆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맴돌고 있는지.”
준영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본 승운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준영아. 너는 나한테 유일한 사람이야. 너는 누구와도 달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너랑 가까워지고 싶어서 정말 노력했어. 그건 부정할 수 없을 거야.”
한숨이 차올라 준영은 시선을 비스듬히 틀었다. 승운의 말이 절절하게 이어졌다.
“절대로 곁을 내주지 않는 네 옆에 있는 게 힘들어서 포기해 보려고 노력한 적도 있어. 다른 여자를 만나고, 같이 자기도 했어. 하지만 아니야. 그런 순간에도 내가 유일하게 그리워한 사람은 너뿐이었어.”
이런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오랜 시간 나 하나만 마음에 품고 있었다니 얼마나 가상한가.
게다가 상대는 나승운이다. 재벌가 아들 같지 않게 성실하고, 때로는 소박하면서도, 외모부터 재력까지 모든 걸 가진 한경의 도련님.
승운이 한 발 더 다가섰다. 그는 조심스레 준영의 손을 들어 올렸다.
“나한테 와, 준영아. 내가 부족하다는 거 알아.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노력해 볼게.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 볼게. 너한테 가장 좋은 것만 줄 수 있도록 노력할게. 네가 있어 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만 있어 주면.”
준영은 제 손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붕대가 감긴 손의 감촉이 거칠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말을 내뱉는 승운의 시선이 따가울 정도였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야.”
승운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무어라 입을 열려는 그를 가로막으며 준영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나승운. 나는 한 번도 너를 그런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권범진 때문에?”
더러운 것을 뱉어 내듯 승운이 입아귀를 일그러뜨렸다. 그는 형형한 눈으로 준영을 응시하며 쏘아붙였다.
“그 자식은 절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어. 너까지 진흙탕으로 끌려 내려가게 될 거라고. 넌 그 자식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전혀 모르잖아.”
“내가 너한테 유일한 사람이었다면.”
준영은 침착하게 손목을 비틀어 빼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권범진이 그래.”
꽉 다물린 승운의 턱이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그녀의 잇새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으니까. 뭐 대단한 일을 했다고 그렇게 잊히지 않나 했어. 같이 밥 먹고, 공부하고, 이야기를 조금 나눈 기억뿐인데.”
잡혔던 손목이 조금 얼얼하다. 준영은 그곳을 더듬어 감쌌다.
“말한 적 없지만, 난 어릴 때의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가 않아. 좋은 기억이라고는 한 손에 꼽을 만큼도 없거든. 특히 고등학교 때는 정말, 매일이 지긋지긋했지.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의 멸망이 와도 아, 그렇구나, 이제 끝났구나,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어.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거든. 하루하루 늪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어. 무력하고, 절망적이고.”
그 순간들이 떠올라 준영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그녀는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런데 권범진이 있어서, 나는 그때 가끔 웃기도 했어. 집에 들어가 내 상황을 보면 미쳐 버릴 것 같은데도 그 애가 있어서 가끔 웃고, 가끔 설레고, 가끔은 꿈을 꾸기도 했어.”
“……그만해.”
“그 시절 그 애만큼 완벽한 내 편은 없었거든. 나는 권범진 앞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었어.”
“그만하라니까!”
승운이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불온한 공기가 내려앉는다. 준영은 무감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입술을 움직였다.
“재작년이었나. 너 한 달 정도 샌디에이고에 출장 다녀왔을 때 말이야. 우리 집에 와서 잠든 적 있었어. 이미 꽤 취해서 내가 말리는데도 집에 있던 와인 한 병을 기어코 다 마시고 나서 거실 소파에 쓰러졌지.”
기억을 더듬듯 승운의 미간이 바싹 좁혀 들었다.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다음 날에 확인해 봤으니까. 준영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넌 많이 취하면 내 앞에서 권범진 얘길 꺼내곤 했는데, 그날은 조금 달랐어. 범진이가 떠나던 날의 이야기를 해 줬거든.”
승운의 떨림이 멎었다. 그의 눈이 천천히 확장되는 것을 응시하며 준영은 조용히 말했다.
“권범진은 아마 죽었을 거야. 그날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차를 타고 떠났거든. 너도 알잖아. 그 후로 동네에 깡패처럼 생긴 놈들이 드나든 거. 와인을 마시면서 네가 그렇게 말했어.”
“아니야. 나는 그런 적이…….”
“너한테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는데, 말해 줄까? 그렇게 물어서 나는 관심 없는 척을 해야 했지.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 소파로 기어갈 때까지도 넌 말하지 않았어. 네 옆에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으니까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더라. 유언이었을 거야. 혼자 둬서 미안하다고 했으니까,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