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미향은 차에서 거칠게 내리는 승운의 뒷모습을 보며 얼른 따라 내렸다. 아들이 운전하는 차는 여러 번 타 봤지만 오늘만큼 험했던 적이 없었다. 그의 기분을 반영하듯 운전은 엉망진창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승운은 무엇을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았다. 얌전한 아들의 얼굴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그저 집으로 빨리 가야만 하는 사람처럼 미친 듯이 속도를 낼 뿐이었다.
그래, 차라리 다행이다. 뭐가 됐든 집에서 차분히 이야기하는 게 낫겠지.
그런 생각으로 미향은 현관으로 들어섰다. 마중 나오던 김 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승운을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오셨…….”
야만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얼굴을 얻어맞은 김 실장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미향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승운아!”
승운은 씩씩대지조차 않았다. 그저 우뚝 서서 뺨을 감싼 채 얼이 빠진 얼굴로 바닥을 더듬거리고 있는 김 실장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미향은 그가 무얼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녀의 예상대로, 승운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일어선 김 실장의 얼굴을 다시 한번 후려쳤다. 김 실장이 지푸라기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나승운! 얘가 미쳤……. 너 대체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다급하게 달려간 미향이 승운의 앞을 가로막았다. 흥분한 게 분명한 아들을 어떻게든 말릴 생각을 하고 있던 그녀가 멈칫했다.
승운의 얼굴에는 흥분한 기색이 없었다. 더없이 싸늘한 무표정만이 씌워져 있을 뿐이었다. 냉정한 그 모습에 가슴이 서늘해진 미향이 마른침을 삼켰다.
“너, 너 왜 이러니? 김 실장한테 왜 이래?”
“직접 물어보세요. 지금 제 행동이 과한지.”
침착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지만 김 실장을 노려보는 눈빛만은 불꽃이라도 튀는 것 같았다. 숨을 고르던 미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팔을 조심스레 잡았다.
“미안하다, 승운아. 다 엄마 탓이야.”
승운은 비척대며 일어나 미향의 뒤에 몸을 숨기고 떠는 김 실장에게 꽂혀 있던 시선을 서서히 돌렸다. 미향이 얼른 말을 이었다.
“너 혼자 나가서 산다고 하니까 엄마가 너무 걱정돼서, 그래서 김 실장에게 미리 너 가는 부동산에 손을 좀 써 놓으라고 했어. 근데 그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니?”
“어머니.”
승운의 무감정한 눈이 미향에게로 향했다. 지나치게 낯선 느낌에 미향은 하마터면 뒤로 한 발 물러설 뻔했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김 실장은 저를 유린하고 조종했어요. 제가 지켜 왔던 무언가를 깨뜨렸죠. 이 정도 대가도 예상하지 않았다면 저를 우습게 봤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김 실장?”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른 김 실장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승운이 그녀를 바라보며 한 발 다가섰다. 미향이 서둘러 그를 불렀다.
“승운아.”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느릿하게 초점을 미향에게로 옮긴 승운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도 알고 계셨어요?”
“뭐, 뭘 말이니?”
“김 실장이 제게 뭘 제안했는지 말입니다. 알고 오늘 그 자리에 계셨던 거예요?”
미간을 좁힌 미향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그 자리는 어제 오픈된 전시회에서 결정된 자리였어. 그림 구매에 관심을 보이는 바이어들과의 미팅 자리였다고. 이한희 부관장이 머무는 호텔이 거기였고, 갤러리랑 가까우니까…….”
“JBK 파이낸셜 권범진이 누구인지 아세요?”
“뭐?”
갑작스레 날아온 질문에 미향이 눈을 깜빡였다. 무생물 같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승운이 말했다.
“그림에 관심을 보이는 바이어라고요? 어머니가 언제부터 그런 천박한 사채업자 따위를 상대하셨죠? 그 새끼가 어떤 놈인지나 알고 상대하시는 거예요?”
“승운아!”
거침없이 튀어나온 험한 말에 미향이 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승운의 기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는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소리쳤다.
“범죄자일지도 모르는 새끼라고요! 경찰서나 드나들던 그런 저질 쓰레기 같은 새끼!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고 살았는지도 알 수 없는 수상쩍은 새끼! 그런 새끼를 도대체 어머니가 왜 만나…….”
“나승운!”
미향은 결국 점점 흥분하기 시작하는 아들의 뺨을 가볍게 내리쳤다.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고 있었지만 집 안 곳곳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들 앞에서 아들의 추한 행태를 더는 보일 수 없었다.
뺨을 감쌀 생각도 하지 않고 승운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바닥 언저리를 보고 있었다. 옅은 한숨을 내쉰 미향이 그에게 차분히 다가섰다.
“엄마가 하는 모든 일은 결국 너를 위한 거야. 하지만 너를 위한 일이라고 해서 네가 모두 알 필요는 없어. 넌 그저 네 몫의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단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결박당한 짐승의 숨소리 같은 것이 승운의 잇새로 튀어나왔다. 그가 낮게 읊조렸다.
“……그렇게 보호받는 건 어떤 기분이야?”
“뭐?”
불쑥 튀어나온 말에 미향이 눈썹을 세웠다. 승운은 여전히 허공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예전에 준영이가 그렇게 물었던 적이 있어요. 어머니 초대를 받아 우리 집에 다녀간 후에.”
언제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미향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저 초점을 잃은 듯한 아들의 얼굴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땐 대답을 못 했죠. 무슨 뜻인지조차 몰랐거든.”
입아귀를 비틀며 조소한 승운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는 미향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며 씹어뱉듯 말을 뱉었다.
“이제는 대답할 수 있어요. 눈먼 등신이 되는 기분이라고.”
싸늘한 표정을 지은 승운은 그대로 등을 돌려 집을 나갔다.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에 미향은 한참 만에야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한 김 실장이 작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서재로 들어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미향이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진열장에서 보드카 한 병을 낚아채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정신에도 김 실장은 컵과 물병을 챙겨 서재로 향했다. 의자에 앉아 보드카를 병째 한 입 들이켠 미향이 물병을 마다하며 손을 내저었다.
“됐으니까 내 아들이 왜 저러는지 말해 봐.”
“제가 도련님과 거래를 하나 했습니다.”
계속하라는 듯 미향이 눈짓했다. 김 실장이 부어오른 얼굴을 숙였다.
“한 남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봐 주는 대신 어제 장세라 씨와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고, 도련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런데 제 정보가 늦었어요. 답을 드리기 전에 그 남자와 마주쳐 버린 게 거슬리신 모양입니다. 제가 부족했습니다.”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던 미향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알아봐 달라고 했다는 그 남자가 설마.”
“JBK 파이낸셜의 권범진 이사입니다.”
허, 하고 미향이 한숨을 내뱉었다.
“승운이가 그자를 어떻게 알고 뒷조사를 해 달라고 한 거지?”
“고등학교 때 도련님이 반성문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윤준영 대리와, 또 한 명과 얽혀서요.”
김 실장의 대답에 미향은 미간을 좁힌 채 조용히 잔에 보드카를 따랐다. 독한 향이 금세 서재 안에 퍼지고 있었다.
“기억나. 그래서 내가 그 촌스러운 학교까지 가서 냄새나는 노친네들에게 한마디 하고 왔었지. 그때 그 다른 한 명이 무슨 문제가 있지 않았던가?”
“그 이후에 동네에서 일어난 퍽치기범으로 몰려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얼마 후 진범이 잡혀 풀려났지만요.”
술을 한입에 삼켜 낸 미향이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때 그 애가, 권범진 이사다?”
“그렇습니다. 몇 년 전 도련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걸 듣고 대비해 둬야겠다는 생각에 행방을 조사했는데, 일반적인 수준의 조사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가만, 가만.”
미향은 손가락을 까닥이며 김 실장을 제지했다. 생각을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JBK에는 내가 먼저 접근했으니 다른 계획이 있었을 리는 없고. 아침에 그 호텔에서 보자고 한 것도 나니까 오늘 이 만남은 전부 우연이라고 볼 수 있겠군.”
김 실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에 비해 팽팽한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미향이 눈을 치떴다.
“그럼 준영이는 권 이사를 알아봤을 거 아냐?”
“각별한 사이였던 모양입니다. 유치장 사건 이후 어느 날 갑자기 권범진이 증발했는데, 그의 행방을 찾으려고 경찰서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도 두 사람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다는 걸 몰랐다고 하더군요.”
“그 애가 그렇지. 어릴 때부터 깜찍한 구석이 있었어.”
코웃음을 친 미향이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래서 내 아들이 저렇게 화가 났군. 그 애를 권 이사에게 뺏기기라도 할까 봐.”
“죄송합니다.”
“김 실장이 뭐가 죄송해?”
“명인일보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쯤에서 윤준영 대리를 향한 도련님의 마음을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과한 수를 둔 것 같습니다.”
“준영이가 거기 있었던 것까지가 김 실장 계산인가?”
“네.”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미향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라는?”
“여사님 오시기 전 체크아웃 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내일 장 사장 쪽이랑 필드 약속이 잡혀 있으니까 그때 분위기를 보면 되겠군.”
미향은 그제야 물병을 들어 입을 헹군 뒤 빈 컵에 물을 뱉어 냈다. 뻐근한 어깨를 가볍게 매만지며 김 실장에게 시선을 준 그녀가 피식 웃었다.
“고개 들어. 따귀 좀 맞은 걸로 김 실장답지 않게 뭘 그렇게 처져 있어?”
그 말에 비로소 김 실장의 얼굴이 정면을 향했다. 미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했어. 저러는 것도 한두 번이겠지. 못 가진 장난감 생각에 이렇게 미련하게 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일찍 쥐여 주고 질리게 만들 걸 그랬어.”
오늘이야 이래저래 감정이 격해졌을 테니 다소 과한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폭발했다는 것은 결국 준영과는 안 될 사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는 뜻과 같다.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왔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으니 그렇게 화가 났을 것이다.
“준영이 쪽에 사람 하나 붙여. 어릴 때 그런 사이였는데 이제 재회했으니 그냥 지나치진 않겠지. 이쪽만 약점 잡힌 격이라 마음에 안 들었는데 뭐라도 쥐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윤준영이 권 이사의 약점이 되어 주면 더 좋고.”
사늘하게까지 느껴지는 미향의 말에 김 실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피곤하네. 저녁 전엔 스파 좀 가야겠어.”
김 실장이 작게 하품을 하는 그녀를 살펴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사님.”
“말해.”
“저도 이번 자금 관련 업무에 참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도련님이나 윤 대리의 일도 있고 하니, 알아 두는 게 전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흠, 하고 숨을 내뱉은 미향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 건은 한 팀장이랑 처음부터 벌인 일이니 쭉 가는 게 나아. 그리고 김 실장이 내 수족인 거 다 아는데 괜히 눈에 띌 것 없어. 만약의 경우 잘라 내기 좋은 사람인 게 편하고.”
마지막 말에 김 실장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미향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얼굴 찜질해야겠다. 좀 쉬어. 난 갤러리 일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쉬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미향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서재를 나섰다.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