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도발하듯 내뱉은 말에 범진의 미간에 줄이 파였다.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줄행……. 멋대로 한 건 너잖아.”
“그래서. 싫었어?”
얼굴을 조금 들이밀며 물으니 흘끗 그녀를 본 범진의 이맛살이 조금 더 찌푸려졌다.
“대답 못 하면서.”
준영이 피식 웃자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사이드 미러를 확인했다. 아예 범진을 향해 몸을 튼 준영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오늘 호텔에 온 건 우연이야?”
“우연이 아니면.”
느릿하게 입을 연 범진이 비스듬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가 거기서 나승운이랑 같이 나올 걸 알고 갔을까 봐?”
묘하게 공격적인 느낌을 풍기는 그의 말투에 준영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팽팽하게 당겨진 뺨과 힘 있게 다물린 날렵한 턱을 확인한 그녀가 허,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나랑 나승운? 서류 전달해 주러 왔을 뿐이야.”
“어제까지 부산에 있던 사람이 이런 시간에 호텔까지 서류 배달이라. 나승운 개인 비서도 겸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서늘하게 중얼거리는 범진의 눈은 정면을 향해 있었다. 그 옆모습을 빤히 보던 준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심장 언저리가 간지러운 것 같았다.
신호에 걸려 차가 속도를 줄이는 틈을 타 그녀는 벨트를 힘껏 당긴 뒤 범진의 뺨에 번개같이 입을 맞췄다. 눈을 부릅뜬 범진이 그제야 그녀를 휙 쳐다보았다.
“너 뭐 하는 거야?”
“귀여워서.”
이를 드러낸 채 씩 웃자 어이가 없다는 듯 범진이 헛숨을 내쉬었다. 작게 웃음을 흘리며 준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인데, 난 나승운 결혼에 도움이 되기 위해 여기 온 거야. 전후 사정을 알았던 건 아니지만.”
“……명인일보?”
범진의 느릿한 대꾸에 준영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옅어졌다. 그녀는 주의 깊게 범진의 옆모습을 관찰하며 입을 열었다.
“너 한경에 관심 있어? 너무 많은 걸 안다.”
“돈 많은 사람들의 소문에는 귀를 열어 둬야지. 그게 장사 밑천이 되기도 하니까.”
다소 냉소적인 말투에 준영은 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야. 결혼 얘기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랑 나승운을 의심한 거야?”
“그때랑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범진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널 보는 나승운의 눈빛 말이야.”
준영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 잠깐의 순간에 그런 게 보였단 말인가. 차분하게 가라앉는 분위기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그녀는 얼굴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내 눈빛은? 그때랑 달라진 거 같아?”
범진의 턱이 또 한 번 팽팽하게 당겨진다. 그는 눈썹을 바싹 추켜올리며 낮게 말했다.
“운전하는 데 방해되니까 가만히 좀 앉아 있어.”
오늘 왜 이렇게 귀여워, 권범진. 미치겠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목구멍 아래로 밀어 넣으며 준영은 최대한 태연하게 손을 까닥였다.
“휴대폰이나 줘.”
“뭘 줘?”
“나 아침에 호텔까지 삼두 씨 차 타고 왔거든. 아직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란 말이야. 연락은 해 줘야지. 이럴 줄 모르고 가방도 다 그 차에 두고 왔네.”
허전하다는 듯 바지 양쪽 주머니를 쓸어 보이자 범진이 묵묵히 재킷 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단축 번호를 누른 뒤 건네준 휴대폰을 받아 드는 준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 삼두 씨. 저 형님 아니고 누님이에요. 어떻게 알고 삼두 씨 형님이 딱 호텔에 나타나서 지금 형님 차 타고 이동 중이거든요. 걱정하지 말고 다른 데 가 있으라구.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전화를 끊은 준영은 재빨리 제 번호를 입력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딘가에서 드르륵 울리는 진동 소리에 범진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뒷주머니에서 자기 휴대폰을 꺼낸 준영이 천연덕스럽게 그의 번호를 저장하며 꽁알거렸다.
“번호 따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원.”
“너…….”
아연해진 듯한 범진을 보며 준영이 그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웬만하면 내가 알려 달랄 때 곱게 알려 줘. 어차피 삼두 씨 두고 갔을 때 너도 우리가 예전에 하다 만 거 다시 할 생각이었던 거 아냐?”
막힘없이 날아온 말에 범진이 미간을 좁혔다.
“우리가 예전에 뭘 하다 말았는데.”
“연애.”
선이 고운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준영이 덧붙였다.
“하루 해 봤잖아. 아니, 30분쯤이라고 말해야 하나.”
핸들을 잡고 있는 범진의 팔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한참 만에야 겨우 한숨을 토해 내듯 말을 뱉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다른 남자랑 결혼했으면 좋겠어?”
“뭐?”
놀란 눈으로 그녀를 돌아본 범진이 서둘러 갓길에 차를 세웠다. 비상등을 켜고 잠시 숨을 고른 그가 미간을 좁힌 채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씩 웃어 보인 준영이 그를 물끄러미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난 싫어. 네 옆에 다른 여자 있는 거.”
범진의 새카만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멀끔하게 잘생긴 얼굴은 냉정해 보였지만 슬며시 벌어진 입술이 그가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준영이 말을 이었다.
“연락 안 되는 것도 싫고,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도 싫어. 너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알았으면 좋겠어.”
그녀에게 고정된 범진의 눈이 감정의 무게 추를 따라 깊이 가라앉는 것 같다. 좀처럼 표정을 읽기 힘든 그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던 준영이 눈썹을 까닥이며 말했다.
“너도 내 결혼식 때 순순히 축의금 넣을 생각 없으면 그냥 나랑 하자, 연애.”
범진은 느리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이 단정한 그의 입술이 비딱하게 기울어졌다.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잖아.”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지.”
차분하게 대꾸한 준영이 가볍게 덧붙였다.
“해 보고 안 맞으면 그만두면 되잖아. 서류에 도장 찍고 결혼하자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몸을 사려?”
“뭐?”
눈썹을 삐쭉 올린 범진의 눈길에 준영은 그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럼 동의한 걸로 알게. 나 회사 들어가 봐야 하니까 그쪽에 세워 줘. 그리고 밤에는 다시 부산 내려갈 거니까 저녁 같이 먹자. 내가 연락할게.”
“윤준영.”
나직하게 그녀를 부른 범진이 고요한 눈으로 말했다.
“난 시작하면 그만 못 둬. 안 하는 게 낫다고.”
경고처럼 들리는 말에 준영은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바보 같긴.
시작은 이미 했으면서.
“……그래서?”
그녀는 희미하게 남아 있던 웃음을 거두며 시트에 등을 기댔다.
“다른 남자 찾아볼까?”
그녀의 말간 옆얼굴을 바라보던 범진은 이내 담배 연기를 내뿜듯 긴 한숨을 뱉어 내며 눈가를 꾹 눌렀다. 짓눌린 목소리가 손 틈새로 흘러나왔다.
“후회할 거야, 너.”
“안 하면 더 후회할 것 같아. 그러니까 차라리 걱정할 시간에 온 마음 다 바쳐서 나한테 잘하지 그래?”
머리를 뒤로 기댄 채로 준영은 그를 흘끗 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는 범진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준영도 덩달아 미간을 치켜세웠다.
“왜. 또 뭐가 걸려서 그러는데?”
“내가 당연히 널 좋아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 당당함이 기가 막혀서 그런다.”
“몰랐던 건 아니지? 너 티 많이 나.”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범진의 잇새로 건조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알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핸들을 쥐며 조용히 덧붙였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준영의 입가로 미소가 흘렀다.
무거운 것 같기도, 한없이 가벼운 것 같기도 한 공기가 차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창밖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며 자꾸만 벌어지려는 입술에 힘을 주고 있던 준영이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기념으로 손이나 잡고 갈까?”
모처럼 인내심이 바닥난 범진의 한숨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까분다.”
“나 이제 네 여자 친구거든?”
뾰족하게 반발한 준영이 구시렁거렸다.
“손도 안 잡을 거면 나중에 다른 건 어떻게 해?”
“너…….”
난데없이 멱살이라도 잡힌 것처럼 입을 벌린 범진이 그녀를 돌아본다. 준영은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너야말로 서른한 살 윤준영을 좀 알 필요가 있겠어. 순수하고 공부밖에 모르던 네 아련한 첫사랑하고는 많이 다를걸.”
얌전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범진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가 입술 한쪽을 슬쩍 기울이며 말했다.
“내 첫사랑은 그런 이미지가 아닌데.”
“그럴 리가. 그럼 뭔데? 나 아니라고 말할 생각은 하지 마.”
눈을 가늘게 뜬 준영이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뱉었다. 범진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괴팍하고 손이 매운, 자기밖에 모르는 고집쟁이 정도?”
“하. 괴팍? 고집쟁이? 와, 듣기만 해도 되게 별로 같은데 왜 좋아하셨을까?”
“그냥.”
지나치게 무성의한 대답에 날카롭게 눈꼬리를 치켜세우던 준영은 나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 애라서.”
범진의 말은 단순했지만, 순간 말문이 막힐 만큼의 무게감이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달콤함이 차오르는 것 같아 준영은 애써 입꼬리에 힘을 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자꾸만 뺨이 실룩거렸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멀리서 회사 건물이 보이고 있었다.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준영이 입을 열었다.
“왜 홍미향 이사님이랑 같이 있었냐고 물어보면 대답해 줄 거야?”
비슷하게 풀어져 있던 범진의 눈매가 일순 또렷한 선을 그렸다.
“아니.”
“알았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준영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그녀를 살피듯 곁눈질하며 범진이 물었다.
“그게 끝이야?”
“나 그분 성향, 상황 잘 알아.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라서. 그리고 내 짐작이 맞다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준영이 이어 말했다.
“내가 상관할 일 아니잖아. 한경의 후계 싸움 같은 거.”
흠, 하고 범진이 희미하게 웃었다. 신호등을 지난 그가 건물 입구 근처에 차를 세웠다. 벨트를 푼 준영이 문손잡이를 잡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저녁 시간 비워 놔. 알았지?”
“점심이나 거르지 마라.”
“내 번호 저장해 놓고. 전화 안 받기만 해.”
엄하게 말을 내뱉은 준영이 좌우를 살피고는 차에서 내렸다. 건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범진이 헛웃음을 흘리며 제 휴대폰을 들었다. 최근 통화 목록의 전화번호를 눈으로 읽고 저장 버튼을 누르자 이름을 입력하는 칸이 떴다.
시간을 들여 ‘준영’ 두 글자를 조심스레 눌러쓴 그는 오랫동안 그 이름을 바라보다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젖혔다.
윤준영은 정말이지 태풍이다.
맞닥뜨린 이상 제 의지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수밖에.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며 범진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차 안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준영의 향기가 짓궂게 놀리듯 그의 주변을 부드럽게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