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안에서 갑자기 날아온 발랄한 목소리에 준영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승운은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 버렸다. 그제야 준영은 그가 왜 이렇게 당황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준영은 제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승운은 유학을 다녀온 후에는 이렇다 할 애인을 만들지 않았다. 적어도 제가 알기론 그렇다. 게다가 평소에도 찾지 않던 여자를 장세라와의 소문이 돌고 있는 이 시기에 만났을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무엇보다 김 실장이 제게 이 봉투를 굳이 이 시간에 가져다주라고 시켰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준영의 잇새로 헛숨이 흘러나왔다. 이건 그녀를 위한 판이 아니라 나승운을 위한 판이었다.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는 승운이 제게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낸 현장을 들키면 어떻게 될까. 그 스스로 느낄 수치심에 더는 제게 제 마음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없게 될 것이다.
정말 대단하시네, 홍 여사. 독하기도 하지. 이런 방법을 쓰다니. 여전히 아들 마음에는 아무런 배려가 없군.
“준영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이건 그러니까, 내, 내가…….”
“장세라 씨가 아니라면 몰라도.”
준영은 눈에 띄게 허둥거리는 승운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맞다면 축하드려요. 이건 팀장님께 전해 드리라고 지시받은 물건입니다.”
봉투를 떠안긴 준영이 그대로 돌아섰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쫓아 나온 승운이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준영아, 잠깐만. 내 말 좀 듣고 가!”
“나승운.”
또렷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준영은 슬리퍼만 신고 있는 승운의 발을 흘끗 쳐다보았다.
“설마 그 차림으로 로비까지 쫓아올 생각은 아니지? 네가 어떤 입장인지 똑똑히 생각하고 행동해. 안에 있을 장세라 씨도 잊지 말고.”
차갑게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우악스럽던 승운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눈동자를 어지럽게 움직이던 그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쉰다. 얼얼한 손목을 어루만지던 준영은 그의 손에 하얗게 감긴 붕대를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손은 또 왜 저래?
“그럼, 그럼 기다려. 얘기 좀 해.”
“난 할 얘기 없을 것 같은데.”
“난 있어!”
눈을 부라리며 강하게 말을 내뱉는 승운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준영은 차분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곧 결혼할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친구와 마주쳤어. 당장 민망할 순 있지만 나중에 웃으면서 나눌 이야깃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 안 그래?”
커다랗게 뜨인 승운의 갈색 눈동자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그대로 무너진다. 입술을 일그러뜨린 채 그는 천천히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래. 너는 그렇겠지. 너한테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
낮게 짓눌린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는 준영을 바라보며 비틀린 얼굴로 미소 지었다.
“가슴에 품고 살던 권범진이랑 다시 만나니까 나 같은 건 더더욱 안중에도 없어졌지?”
시종일관 담담하던 준영의 눈에 놀라움이 스치는 것을 본 승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한순간 무표정해진 얼굴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로비에서 기다려.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정리하고 나갈 테니까.”
준영은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는 승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권범진을 다시 만난 걸 어떻게 알았지?
서류상에는 어디에도 그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제가 언급한 적은 더더욱 없다. 범진과 그곳에서 마주친 것은 우연 중의 우연이었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왔었나. 내가 있는 곳에.
요즘 전화를 많이 한다 했더니.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 같아 준영은 양팔을 감쌌다. 에어컨 때문인지 한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범진의 이름을 말할 때의 승운의 눈빛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7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에도 준영은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늘, 어쩌면 모든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매듭을 짓는 자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운은 가볍게 관계를 맺는 성격이 아니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에는 여자와의 관계는 더더욱 제 눈치라도 보는 것처럼 멀리했다.
장세라를 싫어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텔에서 만날 정도로 끌려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김 실장의 지시로 미루어 봤을 때, 그녀가 무언가를 거래의 대가로 제시했을 가능성이 컸다.
애석하게도 승운은 더 높은 곳에 가려는 욕심이 없었다. 회사 일을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딱 그 정도에 그쳤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열정의 대상을 굳이 고르라면, 나다. 윤준영. 하지만 아무리 김 실장이라고 해도 나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거래의 대가가 무엇이었을까.
“……권범진.”
무심코 중얼거리고는 준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승운이 제 마음을 밝힌다면 그녀는 거절하면 된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끝날까? 그렇게 간단히?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내젓던 준영이 순간 멈칫했다. 로비에 널찍하게 마련된 카페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착각이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틀림없었다. 네 명 중 두 명이 아는 얼굴이었는데, 저 두 사람이 어떻게 한자리에 있을 수 있는지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준영아.”
뒤에서 날아온 승운의 목소리에 준영이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머리는 여전히 젖어 있었지만 리넨 셔츠에 재킷을 걸친 차림새는 제법 단정했다. 곁에 다가선 그가 고개를 낮춘 채 속삭였다.
“장세라한테는 급한 미팅이 잡혔다고 했어. 내 차로 가자.”
“아니, 잠깐.”
우연인가, 아닌가. 생각이 많아 어지러워지는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던 준영은 막 이쪽을 바라보는 미향과 눈이 마주쳤다. 접대용 웃음을 짓고 있던 그녀가 알은척을 하듯 턱을 들었다.
설마.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려고 일부러 저기에 있었던 건 아니겠지.
준영은 한숨을 삼키며 승운을 돌아보았다. 미향을 발견했는지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치고 있었다.
“인사드려.”
작게 말하며 준영이 걸음을 옮겼다. 주먹을 말아 쥔 승운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미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엄마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왔어? 어서 와. 좋은 분들과 차 한잔 하고 있었다.”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미향은 아이보리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겸연쩍은 얼굴로 엄마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 승운이 그녀의 일행을 둘러보다 그대로 굳었다.
“이쪽은 H 증권 김익선 본부장님, 이쪽은 전 뉴욕 제티갤러리 부관장이셨던 이한희 님.”
“지금은 그냥 개인 수집가죠.”
머리가 희끗한 노부인이 부드러운 얼굴로 웃었다. 제대로 인사를 하는 것도 잊어버린 승운의 눈은 재킷 앞섶을 정리하며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남자에게 꽂혀 있었다. 미향이 이어 소개했다.
“그리고 이쪽은 JBK 파이낸셜의 권범진 이사. 제 아들 나승운입니다. 회사 경영기획팀을 맡고 있어요.”
“반갑습니다. 권범진입니다.”
푸른 색감의 셔츠에 넥타이, 슈트를 빈틈없이 갖춰 입은 범진은 그날 마주쳤던 사람과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보였다.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여유로운 표정은 마치 젊은 나이에 성공한 유능한 사업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날렵한 얼굴에는 마치 낯선 이를 맞닥뜨린 것처럼 일말의 동요도 없다. 범진은 희미하게 떨고 있는 승운의 주먹을 흘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손을 다치셨나 보군요.”
“아. 운동하는 걸 워낙 좋아해서.”
이미 전날 전시회에서 물어봤었던 미향이 대신 대답하며 반응이 더딘 아들의 안색을 살폈다. 김익선 본부장이 미소 띤 얼굴로 끼어들었다.
“번듯한 아드님을 두셔서 든든하시겠습니다.”
“아직 부족하죠. 그럼 저희도 슬슬 갤러리로 이동해 볼까요?”
경직되어 있는 승운의 팔을 위아래로 쓸어 주며 미향이 웃었다. 범진은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미 골라 둔 리스트가 있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죠. 가자, 승운아. 엄마가 네 도움이 좀 필요해.”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준영은 제게 짧게 스치는 그녀의 시선에 눈을 내리깔았다. 엄마에게 이끌려 가면서도 승운은 남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지만 뒤따라오고 있는 손님들과 눈이 마주쳐 고개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준영은 그들이 충분히 멀어지길 기다리다 범진이 움직이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계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얼씨구. 인사 한 마디 없이 등을 돌렸겠다?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모습으로 만나니 속이 은근히 들뜬다. 준영은 짧게 숨을 들이마셔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느릿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계단을 내려가자 막 새카만 차에 올라타는 범진이 보였다. 부산에서 타던 낡은 차와는 달랐다. 시동이 켜지는 것을 본 준영은 재빨리 달려가 바퀴를 틀어 자리에서 빠져나오던 차 앞을 가로막았다.
놀란 듯 눈을 치뜨는 범진을 보며 준영은 조수석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안 열어 주면 안 비킬 거야.”
팔짱을 끼고 서 있자 한숨을 쉬듯 눈을 가만히 내리깐 범진이 다시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준영은 저를 똑바로 보며 다가오는 그를 멀뚱히 응시했다.
머리를 조금 잘랐는지 훨씬 깔끔하다. 특유의 분위기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확실히 입은 옷이 달라서인지 느낌이 달랐다. 근처까지 다가온 그에게서는 은은한 향수 냄새까지 풍겼다.
권범진은 그냥 살 냄새가 최곤데.
무심코 떠올린 제 생각에 놀란 준영이 빠르게 눈을 깜빡이는 동안 범진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돌리자 조수석 문을 연 그가 비딱하게 서 있는 것이 보여 준영은 씩 웃고 말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범진이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위험한 짓 좀 하지 마.”
“그러게 왜 두고 가.”
코를 찡긋거린 준영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문이 닫혔다. 운전석으로 돌아온 범진이 짧은 한숨과 함께 문을 닫고 차를 출발시켰다. 준영은 벨트를 당기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 회사 잘되겠다. 임원이 직접 발로 뛰는 걸 보니까.”
범진은 대답 없이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의 옆모습을 대놓고 빤히 바라보던 준영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남자가 치사하게 뽀뽀만 받고 줄행랑을 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