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하루 종일 시선과 수군거림이 따라다니는 것 같았지만 준영은 워낙에 어릴 때부터 그런 환경에 익숙했다. 이제는 인부들 사이에서도 준영까지 사채를 끌어다 썼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범진을 지켜보느라 공사장 쪽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있던 삼두가 아주 당연한 듯 사무실 앞에 차를 댄 채 성실하게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탓이었다.
출근하는 길에 그것을 본 사무장이 차를 빼라고 말하러 갔지만 차에서 내리는 삼두를 보자마자 우물쭈물하다 그냥 들어오고 말았다.
‘잠깐 일이 있어서 댔나 봐. 어차피 공간도 좀 남으니까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자고.’
어휴, 하고 민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든 해 보라고 등을 떠밀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지 않아 삼두가 누굴 지켜보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망보는 사람처럼 시간마다 한 번씩 창밖을 바라보던 민숙이 가방을 챙기는 준영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근데 정말로 괜찮으신 거예요? 경찰이라도 불러 드릴까요?”
“괜찮아요. 옛날 고향 친구 동생이에요.”
“친구 동생요? 친구 동생이 왜 하루 종일 저렇게…….”
“수줍음이 많은지 용건을 말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스타일이라. 저는 김 주무관 만나고 바로 퇴근할게요.”
“네. 저기, 조심하세요.”
태연한 제 반응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민숙이 소곤거린다. 빙긋 웃어 보이며 준영은 사무실을 나왔다.
차 안에 앉아 있던 삼두는 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녀를 보고는 눈을 둥글게 떴다. 준영은 당당하게 조수석 문을 열어젖혔다.
“어차피 따라올 거죠? 구청 갈 건데.”
“타십쇼.”
차 없는 저를 배려해서 일부러 삼두를 붙여 두고 갔나 싶을 정도다. 준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삼두를 향해 웃음을 흘리며 조수석에 앉았다. 벨트를 매자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안 심심해요? 하루 종일 보기만 하는 거.”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묻자 삼두가 정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저한테는 지켜보는 게 일입니다. 심심할 수가 없죠.”
예상외로 진지한 대답에 준영이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멋있네.”
“예? 아니요, 그런 건 아니…….”
“김 씨한테 연락은 안 왔어요?”
당황한 얼굴을 좌우로 흔들던 삼두가 그녀의 질문에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별일 없냐고만 물어보셨습니다.”
“없다고 대답한 건 아니죠?”
눈을 둥글게 뜨며 묻는 준영의 말에 삼두도 덩달아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별일이 있나요?”
“없진 않지!”
당당하게 외치자 삼두가 사이드 미러를 확인하며 속도를 줄였다.
“무슨 일이 있는지…….”
“없으면 만들 거거든요, 내가. 중간에 성가실 것 같으면 그냥 권범진 전화번호 넘겨주든가.”
낮게 한숨을 뱉으며 삼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준영은 입술을 비죽이고는 가방에 넣어 온 서류를 뒤적였다.
“구청에는 무슨 일로 가십니까?”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판단한 삼두가 물었다. 서류를 눈으로 훑으며 준영이 대꾸했다.
“주무관 만나러 가요. 근처 건설 현장에서 신고된 사고 내용 좀 확인하러.”
“같이 들어가도 될까요?”
“삼두 씨도요? 어차피 보상금으로 정만수 씨 채무 변제할 가능성은 없다고 결론 내린 거 아니었어요?”
“정만수 씨가 아니라 누님 때문에요. 그 공무원이 여자를 좀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불쾌한 일 있으실까 봐서요.”
삼두의 말에 준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상태로 눈을 몇 번 깜빡이던 그녀는 입술 새를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삼키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근데 나를 누님이라고 부르는 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저 올해 스물여덟입니다. 형님이랑 동갑이시죠?”
“스물여덟?”
사실 서른다섯은 됐는데 의리 때문에 범진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는 줄 알았다. 제가 지나치게 놀랐음을 깨달은 준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딱 그렇게 생겼네. 그럼 범진이랑은 얼마나 알고 지낸 거예요?”
“6년쯤 됐습니다.”
흠, 하고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20대의 권범진은 어땠을까.
제가 복수 전공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느라 치열하게 학교를 다니고 회사에 들어와 일을 하는 동안 그의 시간은 어땠을까. 어떤 풍경이었을까.
“……여자 친구는 없었어요?”
“저요?”
삼두가 눈을 크게 뜨며 얼굴을 붉혔다. 준영이 말없이 무심하게 바라보자 그제야 그 의미를 눈치챈 그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우리 형님 허우대를 보십쇼. 어딜 가든 연예인이 따로 없었죠. 형님 관심 못 끌어서 절절 애끓는 아가씨들만 줄 세워도 지구 반 바퀴는 돌 거…….”
민망해서인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삼두는 불현듯 옆에서 날아오는 날카로운 시선에 흘끔 준영을 곁눈질했다. 그는 서둘러 핸들을 틀면서 헛기침을 했다.
“근데 형님은 아주 칼 같으셨죠. 허벅지에 손이라도 올렸다가는 분위기로 쥐 잡듯이 잡으니까 일절 그런 일은 없어졌고요. 형님이 유독 고량주에 약하신데, 언젠가 술에 취하셨을 때 왜 이렇게 여자를 멀리하시냐고 농담처럼 여쭤보니까, 여자만 보면 얼굴 하나가 떠다닌다고. 그래서 우리는 아, 형님이 마음에 담았던 분이 죽었나 보다 했…….”
열심히 말하던 삼두는 또다시 서늘해지는 기운을 느끼고는 얼른 말을 고쳤다.
“는데 살아 계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마 옆을 돌아볼 마음이 들지 않아 그는 내비게이션만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구청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고도 험하다. 그때 준영의 낭랑하지만 다소 기계적인 말투가 그의 귀를 때렸다.
“하하. 빨리 보고 싶어 죽겠네요, 권범진.”
“예, 저도 너무 보고 싶습니다.”
진심을 듬뿍 담아 말하는 삼두의 튼실한 어깨가 축 내려앉은 것을 보고 준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더 괴롭혀서 범진에게 SOS를 치게 만드는 방법도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삼두가 마음에 들었다. 사람 평가에 인색한 그녀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얌전히 서류를 다시 들여다보던 준영은 진동 소리에 휴대폰을 꺼냈다. 내키지 않는 이름이었지만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삼두에게 살짝 눈짓한 뒤 그녀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윤준영입니다.”
- 내일 서울에 좀 올라와요. S 호텔 1203호에 도련님이 계실 겁니다. 로비에 맡겨 둔 서류 봉투 찾아서 전달해 드리면 돼요. 시간은 오전 9시 반쯤이 좋겠군요.
“갑자기 무슨 서류를 그렇게 급하게…….”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지만 이미 통화는 끊겨 있었다. 혀 차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김 실장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았다. 애초에 지금만큼 제 사고 능력이 향상된 것은 이런 불친절 때문이기도 하니까. 설명도 듣지 못한 채 무방비하게 시키는 대로 했다가 민망한 꼴을 당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휴대폰을 노려보던 준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호텔. 그리고 그런 시간에 나승운에게 로비에 맡겨 둔 서류를 전달하라.
이 일을 굳이 나에게 맡긴 이유가 뭐지? 부산에 내려와 있는 걸 모르나?
모르더라도 이상하다. 로비에 맡겨 놓을 수 있다면 그냥 직접 전달하면 되지 않는가.
나여야 하는 이유.
……그 시간에 승운이 호텔에 있는 게 다른 사람 눈에 띄면 안 되나? 근데 나승운은 왜 호텔에 있는 거지? 그것도 평일에.
“저, 누님. 도착했습니다.”
조심스레 들리는 삼두의 목소리에 준영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구청 건물이 보였다. 벨트를 풀던 그녀가 삼두를 돌아보았다.
“난 내일 첫 기차 타고 서울에 좀 가야 할 것 같아요.”
“승용차가 편하시면 이걸로 가시죠.”
삼두가 망설임 없이 하는 말에 준영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서울도 같이 가려고요?”
“어딜 가든 회사 밖으로 나가시면 지켜보라고 하셨으니까요.”
그게 서울까지 통용될 줄은 몰랐지.
준영은 삼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직하고 성실한 걸 보니 더 마음에 든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좋아요. 간 김에 권범진 얼굴이나 같이 보고 옵시다.”
삼두는 차에서 내리는 그녀와 제 어깨를 번갈아 보다가 얼른 문을 열어젖혔다. 준영의 뒤를 쫓는 그의 입가에도 희미하게 미소가 스쳤다.
* * *
적절한 타이밍이라면 타이밍이다. 정신이 없긴 했지만 어차피 한 번은 서울에 올라왔어야 했다.
미리 뒷좌석에 담요를 깔아 둔 삼두 덕에 염치없이 올라오는 동안 단잠을 잔 준영은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씻은 뒤 시간 맞춰 호텔로 향했다. 물론 삼두의 차를 타고 말이다. 운전기사를 둔 생활이 이런 건가 싶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통행이 많은 시간은 아니었다. 로비에서 이름과 사원증을 내보이자 직원이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봉투는 얇았고 밀봉되어 있었다.
나승운과 호텔, 둘의 조합에 이런저런 상상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준영은 냉정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시간을 확인한 뒤, 그녀는 정확히 9시 30분에 벨을 눌렀다.
승운은 일찍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하는 걸 즐겼다. 경영기획팀의 업무 특성이 있기도 하지만 지금이면 운동 후 간단하게 식사를 한 뒤 출근해서 아침 회의를 진행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잠시 기다렸지만 응답이 없어 준영이 막 다시 한번 벨을 누르려 문에 다가갔을 때,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또 뭡니까.”
승운은 목욕 가운을 걸친 상태였다. 머리가 아직 젖어 있는 걸 보면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준영은 그가 냉소적인 표정을 지은 채 머리를 가볍게 털다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신경질이라도 난 것처럼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승운의 눈이 점차 부풀었다.
“주……, 준영아.”
뭘 그렇게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랄까. 준영은 안부를 묻듯 가볍게 말을 던졌다.
“평일에 호텔엔 무슨 일이야. 오전에 출근 안 해?”
“아니, 아니야. 이건, 이건 그런 게 아니야.”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승운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준영은 대수롭지 않게 들고 있던 봉투를 내밀었다.
“아니긴 뭐가. 그럴 수도 있지. 이거나 받으시죠, 팀장님. 전달할 물건…….”
“자기야. 뭐야, 또 룸서비스 시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