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55화 (55/86)

<55화>

서울에서 차로 40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이렇게 한적하고 산세 좋은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흔들림 없이 움직이는 차 안에서 안경을 낀 채 자료를 훑어보던 미향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경영기획팀의 실적이 썩 좋지 않았다. 나쁘지도 않았지만 눈에 띌 만한 프로젝트가 2년째 없었다.

이성철 이사의 빈자리에 승운을 올리려면 단순히 지분이나 제 아들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납득이 갈 만한 기반을 닦지 않으면 나이 지긋한 임원들 사이에서 보나 마나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아들은 착하고 순하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강한 이미지를 남기려면 망할 때 망하더라도 크게 잘된 한 건이 필요하다. 성공 신화가 뒷받침이 되어 주면 그다음에 이어지는 실패는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있기 때문에.

독한 구석이 없어서 그래.

미향은 안경을 벗으며 뻑뻑한 눈을 잠시 감았다. 집도 고작 33평이 뭐란 말인가. 자기 입장을 알고나 있는지, 원.

제 조카이자 오빠의 아들인 승태는 독립할 때 120평짜리 펜트하우스를 골랐다. 그것도 두 채를 얻은 다음 굳이 돈을 들여 벽을 허물었다. 그 안을 가득 채운 호화 수입품 가구값까지 합하면 지금 승운이 얻으려는 아파트 열 채는 살 수 있을 것이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웃고 놀고 돈 쓰는 것밖에 없어서 작은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차려 줬는데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는지 3년째 매출이 성장하고 있었다. 소속 연예인이라고는 겨우 열 명 남짓인데 말이다.

그런 반면 승운이는.

가늘게 눈을 뜬 미향의 입술 새로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놀아나는 여자마다 연예인이나 이름 있는 어느 집 딸인 승태와 달리 그런 방면으로 제 아들은 정말이지 답답할 정도의 먹통이었다.

여건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성형외과를 주기적으로 찾는 승태에 비하면 승운의 외모는 흠잡을 데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승운을 욕심내는 집도 적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에 영 적극적이지 않은 승운의 태도가 문제였다.

이유야 뻔하지.

결국 혀를 차며 미향은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를 밀어 놓았다.

승운은 제 아들이지만 사람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부족하다. 그런 것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언론사의 든든한 배경이라도 만들어 주고 싶은 게 어미 마음이었다.

어쨌든 김 실장이 자신했으니 두고 볼 일이다. 그녀는 저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었다. 대체로는.

“도착했습니다.”

핸들을 잡은 운전기사가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미향은 고개를 끄덕이고 클러치를 든 채 차에서 내렸다. 짙푸른 나무들 사이에 깔끔한 건물 하나가 서 있었다.

단층인 그 건물은 일부러 이곳에 차를 세우지 않는 이상 눈에 잘 띄지 않을 위치에 있었다. 그런 목적으로 세워진 건물일 것이다. 미향은 손목을 돌려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잘 닦인 길을 걸어갔다.

일대일 미팅이 그쪽의 조건이었다.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DH 건설 현 회장의 부인인 인희와는 꽤 오래된 사이였다. 적어도 그녀에게 저를 위험에 몰아넣을 동기는 없었다.

오솔길의 끝에는 하얀 계단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있었다. 제법 묵직한 문을 밀고 들어가자 널찍하게 펼쳐진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고풍스러운 느낌의 내부는 마치 거인이 쓰는 커다란 서재 같았다. 층고가 무척 높았는데 벽에는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장으로 가득했고, 입구와 가까운 쪽에는 기다란 원목 책상과 의자들이, 계단 몇 개를 내려가면 바(BAR)와 의자 몇 개가 있었다.

탁 트여 있어 시원한 느낌을 풍겼지만 미향은 양쪽으로 문이 하나씩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저 문을 열면 방일까, 밖으로 통하는 통로일까. 정확한 구조를 알 수가 없었다.

취향이 싸구려 같진 않군.

조화로운 내부를 훑어본 뒤 미향은 고개를 돌렸다. 바 안쪽에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깔끔한 네이비 톤의 슈트는 마치 저와 미리 짜기라도 한 것 같다. 등을 보이며 서 있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넓고 단단해 보이는 어깨와 늘씬하게 뻗은 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늦은 건 아니겠죠? 시계가 고장 난 게 아니라면.”

제가 들어온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 남자를 흥미롭게 주시하며 미향이 입을 열었다. 그제야 그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편한 곳에 앉으시죠. 마실 것을 내가겠습니다.”

늙다리 회장이 나올 줄 알았더니.

눈썹을 치켜세운 미향은 입구 쪽과 가까운 원목 책상 앞에 앉았다. 오래지 않아 트레이를 든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러프하게 흩뜨린 머리칼은 정중하게 갖춰 입은 슈트와 어긋나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짙게 뻗은 눈썹과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인상적이다. 아니, 위압적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옳겠다. 가무잡잡한 피부가 매력적인 미남이었지만 동시에 베일 것 같은 눈빛은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은 듯한 날것의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젊다고 녹록한 상대는 아니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내려놓은 트레이로 향하던 미향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제가 즐겨 마시는 폴란드산 보드카와 물, 그리고 잔과 컵의 구성을 보자마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떨림을 감춘 채 애써 실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이렇게까지 취향이 맞을 리는 없고. 어디서 알아낸 정보예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뒷조사는 오래된 습관 같은 거라서.”

능숙하게 재킷 단추를 풀며 남자가 맞은편에 앉았다. 묵직한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필요 이상의 굽힘은 없었다.

이걸 아는 이는 몇 없는 데다 모두 그녀의 집안 사람이다. 그걸 아무렇지 않은 척 드러내는 것은 능력에 대한 과시이자 위협이나 다름없었다.

몸이 긴장으로 굳어진 것을 의식하며 미향은 반듯하게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여유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반갑습니다, 홍미향 이사님. JBK 파이낸셜의 권범진이라고 합니다.”

승운이 또래쯤 될까 싶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미향이 비스듬히 웃으며 팔짱을 꼈다.

“첫 만남에 서로 인사하는 자리라 그 회사의 결정권자가 나오실 줄 알았는데.”

“회장님은 외부 미팅에는 참석하지 않으십니다. 몇 년 전에 칼을 맞은 적이 있거든요. 제법 요란했죠.”

미향의 눈이 빠르게 두어 번 깜빡였다. 범진이 보드카를 그녀의 잔에 채우며 덧붙였다.

“물론 건재하십니다.”

“다행이네요.”

제 잔을 채운 범진이 가볍게 잔을 들어 보였다. 미향 역시 미소를 띤 채 잔을 들고는 한입에 삼켰다.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강렬한 향이 목구멍을 훑으며 내려갔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그녀는 입을 헹궜다. 범진이 말을 꺼냈다.

“자금 세탁이 필요하시다고 들었는데.”

“투자도 가능한가요?”

“규모는 얼마쯤 보십니까.”

“얼마나 가능하죠?”

미향의 말에 범진의 입술이 매끈하게 기울었다. 그는 빈 잔들을 다시 채우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런 방어적인 태도는 거래에 도움이 안 됩니다, 이사님. 가뜩이나 신용 하나 믿고 하는 거래인데 처음부터 서로 원하는 걸 명확히 하지 않으면.”

다시 잔을 들어 올린 범진이 그녀를 응시하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대부분 아주 지저분한 끝을 보게 되더군요.”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앞에 두고 긴장해 본 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범진은 젊어 보였지만 스스로 일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 특유의 무게감을 풍기고 있었다.

미향은 그를 뾰족하게 쳐다보며 제 몫의 술을 들이켰다. 코로 새어 나오는 숨이 독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세탁은 40억. 투자도 그 정도면 좋겠어요. 돈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난 보이지 않는 돈이 필요한 것뿐이…….”

“알고 있습니다. 작년 영업이익만 1조 300억을 낸 한경의 후계자이시니까요.”

한경의 후계자.

그 말이 저를 얼마나 가슴 뛰게 하는지를 알고 내뱉은 말이라면 정말이지 인정해 줘야 했다. 사람 다루는 실력과 정보력을.

헛웃음을 흘린 미향은 비로소 길게 숨을 내뱉었다. 어깨가 조금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기간은 어느 정도나 걸리죠?”

“자금 마련은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어떤 형태의 투자가 편하실지는 저희 쪽 변호사가 보낸 자료를 확인하신 뒤 결정하셔도 늦지 않을 것 같군요. 댁에 돌아가시면 도착해 있을 겁니다.”

미향은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지는 걸 느꼈다. 일 처리가 빠른 것뿐만 아니라 치밀하다. 미간을 좁히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녀가 눈으로 웃어 보였다.

“이렇게 쉬울 줄은 몰랐는데. 큰돈은 아니지만 적은 액수도 아닌데 결정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한경의 홍미향이라는 이름이면 담보로 차고 넘치죠.”

보드카 병을 가볍게 흔든 범진의 날렵한 눈매가 느슨하게 휘어졌다.

“게다가 약점도 분명하시고.”

“약점? 내가?”

코웃음을 친 미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빈 잔에 보드카를 따르며 범진이 입을 열었다.

“보이지 않는 돈을 원하시는 이유 말입니다.”

잠시 유해졌던 미향의 표정에 서늘함이 스쳤다. 그녀의 눈이 보드카 잔의 테두리를 훑고 있는 범진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저희는 괜찮습니다. 채권추심에는 이골이 나 있으니까요. 품이 조금 들겠지만 늘 하던 일이라 나간 것 이상으로 회수할 자신은 있습니다. 물론.”

깨끗한 자세로 한 번 더 잔을 비운 범진이 씩 웃었다.

“더 큰 걸 잃을 사람이 일을 그르칠 리는 없을 테지만요.”

시선이 첨예하게 부딪쳤다. 소리 없이 입술만 당긴 웃음으로 응대하는 미향의 뺨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양 무릎을 내리치며 훌쩍 일어선 범진의 목소리가 홀을 가로질렀다.

“일단 그림 몇 개 주시죠. 그게 시작입니다.”

미향은 등을 돌린 채 바 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겨우 머금고 있던 숨을 뱉어 냈다.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해 왔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위축된 적은 없었다. 대부분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시작했고, 그녀의 어깨에는 사회적 통념이 갑옷처럼 둘러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미향은 제가 완전히 다른 곳에 발을 디뎠음을 인정해야 했다. 저 권범진이라는 자가 어떤 부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했다.

그가 저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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