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길게 늘어진 머리를 적당히 헝클이며 준영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날은 한없이 맑았고, 욕실에는 그녀에게 온수를 선물하기 위해 냉수로 샤워를 하고 있는 범진이 있었다. 그 앞을 서성이는 준영의 입가에 미소가 매달렸다.
샌드위치 먹고 싶다.
딸기잼을 듬뿍 얹고, 권범진이 만든 달걀 범벅을 넣은 샌드위치.
그날 이후로 만들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던 샌드위치.
어느새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준영은 물소리가 멈추는 것을 듣고는 괜스레 머리를 한 번 더 쓸어 넘겼다. 옷매무새를 가볍게 털어 내고 있으니 욕실 문이 열렸다. 그녀는 턱을 꼿꼿하게 들고 외쳤다.
“오늘 샌드위치 해 먹자!”
“네, 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온 것은 삼두였다. 반팔 소매 아래로 드러난 근육이 두껍게 잡힌 팔을 멀뚱히 보던 준영이 순식간에 얼굴을 구겼다.
“왜 박삼두 씨가 여기서 나와요? 당신은 밤에 샤워하잖아. 아침엔 범진이랑 나고.”
“아, 이제 온수 나오니까 씻으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왜 당신이…….”
묘하게 허리를 굽히는 삼두의 정중한 태도에 따져 물으려던 준영의 눈썹이 일시에 치켜 올라갔다.
설마.
“권범진 어디 갔어요?”
예기치 못한 타이밍의 질문인지 삼두의 눈이 좌우로 바쁘게 굴러다닌다. 애꿎은 수건으로 머리만 벅벅 문지르던 그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 가셨습니다.”
허, 하고 헛숨이 튀어나왔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준영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돌아와요?”
“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오긴 와요?”
“그것도 잘 모르겠…….”
“번호 불러요.”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며 그녀가 내뱉은 말에 삼두가 말을 더듬었다.
“네?”
“권범진 전화번호 부르라고요.”
글자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 말하자 삼두는 죽상을 하며 얼른 고개를 도리질 쳤다.
“죄송합니다. 그건 때려 죽이셔도 안 됩니다.”
“그 자식이 말하지 말라고 했구나?”
그 자식이라는 표현이 불손하게 들렸는지 삼두가 반사적으로 눈을 치떴다. 굵직한 선의 얼굴에 근육질의 몸을 가진 그가 그런 표정을 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흉흉해질 지경이었지만 준영은 도리어 눈을 부라렸다.
“왜요. 뭐. 그 자식이라고 부른 게 거슬려요? 입이 고상해서 더한 욕을 못 하는 게 한스럽네. 하, 내가 정말 기가 막혀서. 이 타이밍에 도망을 가?”
심상치 않은 눈빛에 입맛을 다시며 눈을 피한 삼두가 헛기침을 하며 웅얼거렸다.
“형님은 도망을 가신 게 아니라 일이 있어서…….”
“그게 그거지!”
채찍이라도 후려치는 듯한 말에 삼두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그는 결코 준영에게 대항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잔뜩 흥분한 준영이 제자리를 서성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와, 정말 어이가 없네. 그거 알아요? 다른 사람은 다 이런 식으로 내 앞에서 사라질 수 있어도, 권범진은 그래서는 안 돼요. 같은 상처를, 심지어 알면서 두 번 줘? 그건 악의지. 악질적인 거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남기는 말 하나 없이 내 앞에서 또 사라지…….”
쏜살같이 내뱉던 준영이 갑자기 그대로 우뚝 멈춰 섰다. 긴장한 얼굴로 어느새 수건을 쥔 두 손을 얌전히 앞에 모으고 있던 삼두가 눈을 끔벅였다. 칼날 같은 그녀의 시선이 날아오고 있었다.
“근데 박삼두 씨는 왜 여기 있어요? 그 자식이 없는데.”
제 형님이 저렇게 아무렇게나 불리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삼두는 다소 불퉁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 정만수 일이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니까, 조금만 더 살펴보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는 김에 나보다 먼저 샤워도 하라고 하던가요?”
흠칫 놀란 삼두가 겸연쩍게 대답했다.
“예.”
다시 미간을 찌푸린 준영의 입술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어깨를 들썩이며 긴 한숨을 뱉어 낸 그녀가 팔짱을 꼈다. 삼두는 제 앞에 서서 곧장 저를 바라보는 준영의 시선에 괜히 목을 움츠렸다.
“또요?”
“어, 출퇴근을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딜 가든 회사 밖으로 나가면 지켜보라고 하셨고요.”
“감시를 붙이고 갔네.”
시큰둥하게 웃는 그녀의 말에 삼두가 입을 열었다.
“잘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준영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삼두가 우직하게 덧붙였다.
“저희 형님은 그런 말 잘 안 하십니다.”
뾰족하게 솟아 있던 준영의 기세가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그는 비로소 한숨을 삼켰다. 정신없던 머리가 조금쯤 진정되는 것 같았다.
말간 얼굴에 고운 이목구비가 서늘한 느낌을 풍기는 준영은 무표정하게 있으면 더없이 냉정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아마 범진의 그림자가 없었다고 해도 저 같은 사람은 함부로 말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남자는 도도한 미인에게 약한 법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누구던가.
삼두는 범진의 곁에 있었던 오랜 시간 동안 그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이런 식으로 범진을 편하게 대하지는 못했다. 범진이 가끔 삼촌이라 부르는 회장님조차도.
권범진이라는 남자는 모든 면에서 결코 편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형님의 말에 대거리를 하는 사람도, 형님의 분위기에 조금도 눌리지 않고 맞서는 사람도, 심지어 냅다 입술까지 들이받을 정도로 겁 없이 과감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의 모든 행동을 형님이 용납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형님에게 그럴 수 있는 것이겠지. 뭐가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다소 그런 쪽에 둔하긴 했지만 이런 유일한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삼두도 모르진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준영이 한없이 경이로웠다.
분명히 그녀는 제가 모르는 형님을 알고 있을 것이기에.
“그래, 뭐.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라고 치자.”
작게 중얼거리는 준영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삼두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방금까지 귀신처럼 화를 내고 있던 그녀가 어느새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반으로 접으며 미소 짓자 사늘한 기운이 단번에 걷히고 마치 상큼한 향이 탁 터져 나오는 것 같다. 삼두는 유순한 얼굴로 제게 다가오는 준영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웃을 때 더 경계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눈앞의 여자는 바로 그런 사람의 대명사라는 게 느껴졌다. 그의 동물적인 감이었다.
“그럼 김 씨 없이 우리끼리 친분을 좀 다져 볼까요? 나한테 마침 소주 한 병이 있는데.”
“아니요. 저는, 그, 화장실이 급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왠지 알 것 같다. 저 제안을 받아들였다가는 무슨 이유에서든지 제 입으로 형님의 전화번호를 하나씩 불러 주고 말 것이다. 그런 불길한 예감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은 삼두는 준영이 또다시 무어라 하기도 전에 방으로 도망치듯 뛰어갔다.
“……멋없긴. 메시지 하나 남기고 가면 되지, 사람을 남기고 가냐.”
준영은 기지개를 켜며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이미 삼두는 사라진 후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의 입술이 비딱한 곡선을 그렸다. 할머니가 끓이는 누룽지의 구수한 냄새가 온 마당에 퍼지고 있었다.
* * *
미향은 김 실장이 들고 있는 재킷에 팔을 끼워 넣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나이에 이런 미팅 자리에 직접 나가게 될 줄 몰랐네, 나 참.”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기밀 유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도 틀리진 않는 것 같습니다.”
늘 그렇듯 공손하게 김 실장이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미향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흐리게 보이는 주름들이 거슬렸지만 깔끔하게 손질한 머리와 빈틈없는 화장은 마음에 들었다.
김 실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쪽에서 알아볼 수 있는 정보가 너무 없다는 게 조금 불안하긴 합니다.”
“현 회장 사모가 경영권 방어할 때 신세를 졌다고 하더군. 그리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안전한 거야. 우리가 알아볼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겠지. 사채로 돈 굴려서 그만큼 번듯하게 회사 키운 걸 보면 어디 보통내기겠어? 근본이 무지렁이 깡패였다면 더더욱.”
재킷을 가볍게 당겨 매무새를 잡은 미향이 손목을 내밀었다. 시계를 채워 주며 김 실장이 말했다.
“찻집 밖에 경호 인력 세워 두겠습니다.”
“너무 가까이는 말고. 겁먹은 것처럼 보이잖아.”
“호출은 이쪽 버튼 누르시면 됩니다.”
미향은 시계를 돌려서 튀어나온 버튼을 보여 주는 김 실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홍 사장 쪽은. 별 눈치 없지?”
“네.”
“그 애는.”
걸음을 옮기는 미향의 뒤를 따르며 김 실장이 보고했다.
“윤준영 대리는 현재 부산에 출장 가 있습니다. 예정되어 있었던 일정은 아니고요. 공사 현장에 잡음이 있어서 처리하러 간 모양입니다. 2주 일정인데 더 길어질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설마 얼굴 못 본다고 그렇게 예민해져 있었던 건 아니겠지? 유학 가 있을 때도 떨어져 있고 그랬잖아.”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미향이 돌아보는 것에 김 실장은 고개를 숙였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아직 파악 중입니다.”
“이런 상태로 갤러리에나 제대로 올지 모르겠네. 이사회 움직임이 만만찮으니 그 전에 명인일보와의 관계에 쐐기를 박아 놔야 하는데.”
미향의 짧은 한숨이 끝나기도 전에 김 실장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오실 겁니다.”
놀란 미향의 눈이 둥그렇게 부풀었다.
“승운이가 그래?”
“네.”
김 실장의 대답은 간결하고 확고했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그녀를 바라보던 미향의 얼굴에 웃음꽃이 번졌다.
“우리 김 실장이 또 나 모르게 무슨 마법을 부렸구나. 수고했어. 하여튼 내 주변에 내 성에 차게 일하는 사람은 김 실장뿐이지.”
제 어깨를 살포시 두드리는 손길에 김 실장의 딱딱한 눈매가 안경 너머로 누그러졌다. 미향은 그제야 걱정을 덜어낸 얼굴로 현관으로 향했다.
“승운이 집은 구했나?”
“도련님은 33평 아파트를 선호하시는 것 같지만 중개사 통해서 52평 쪽으로 분위기 잡아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혼자 살 생각이어도 그 좁은 데서 어떻게 살겠다고. 착하고 소박한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곧 세라도 드나들게 될 테니까 적당히 신경 좀 써 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 실장이 미리 꺼내 둔 구두 중에서 적당한 것을 골라 신자 앞서 나간 김 실장이 문을 열어 주었다. 미향은 허리를 반듯하게 세운 채 또각또각 걸어 나갔다. 유난히 눈부신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