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뜨끈한 느낌이 들어 승운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여기가 어딘가. 사방이 컴컴했다.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 것 같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자 얼얼하게 찢기는 듯한 통증이 날아들었다.
손이 피범벅이었다. 정신없이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친 모양이었다.
입을 벌리자 탁한 숨이 새어 나온다. 사라지는 권범진을 보고 그대로 차를 끌고 나온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혹시라도 집에서 나온 준영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얼굴을 보게 되면 저는 그녀를 탓하고야 말 테고, 그렇게 되면 그것을 핑계 삼아 준영이 거침없이 칼을 들어 저와의 관계를 잘라 내 버릴 것 같았으니까.
이 감정은 결코 입 밖에 낼 수 없다. 지금까지 내지 않고 버텨 왔기에 준영과의 평행선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쯤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차를 돌린 것이 기억의 끝이다. 시간을 확인하자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차가운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더니, 피를 보고 흥분했는지 심장이 쿵쾅대며 뛰는 것이 느껴졌다.
승운은 깊이 심호흡을 하며 휴대폰을 찾았다. 이곳에 오기 전 준영에게 두 번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휴대폰으로 건 전화는 놓쳐도 메시지 한 번 보내 주지 않았다. 그걸 따지면 “용건을 메시지로 남겨 놨으면 곧장 연락했을 텐데. 급한 일이었어?”라고 묻곤 했다.
그녀가 의미하는 ‘용건’ 같은 것이 제게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한 말이었다.
휴대폰을 묵묵히 바라보던 승운이 단축 버튼을 입력한 뒤 휴대폰을 귀에 가져갔다. 뼈가 잘못되기라도 했는지 손이 퉁퉁 부은 게 느껴졌다. 이미 피의 일부는 굳어 있었다.
- 네, 도련…….
“김 실장.”
상대의 말을 자르며 나른하게 부르자 침묵이 돌아온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기가 막히게 감지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개들이 그렇듯이.
- 새로 집은 구하셨습니까? 제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고작 내 집을 구하는 데 김 실장 능력을 쓰는 건 너무 아깝지.”
- 아직 부족합니다. 집에 한번 들르세요. 여사님이 걱정하십니다.
승운의 잇새로 비딱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앵무새같이 여사님, 여사님 부르는 것밖에 못 하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김 실장은 어머니의 사람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쓸 만한 사람이 그녀밖에 없다는 것이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권범진이라고.”
두툼해진 손가락을 일부러 움직이며 승운은 이를 악물었다. 낮게 짓눌린 제 목소리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기억해?”
잠시 정적이 찾아왔지만 길지 않았다. 이내 김 실장이 대답했다.
- 네. 도련님과 윤준영 대리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범죄자였던 아이 아닙니까?
그래도 가끔 마음에 들게 말하는 것은 김 실장뿐이다. 승운은 코웃음을 치며 머리를 젖혀 시트에 기댔다.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어디서 뭐 하고 사는지 알아봐.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없는지, 재산 상태는 어떤지.”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승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왜 대답이 없어?”
- 윤준영 대리와 관련 있는 일입니까?
하, 하고 헛웃음을 흘린 그의 손이 휴대폰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어딘가 터졌는지 핏방울이 툭, 떨어졌다.
“엄마가 일 시킬 때도 이렇게 토를 다나?”
- 여사님의 지시는 늘 명확하기 때문에 제가 반문하는 일은 없습니다.
“권범진에 대해 알아봐. 이것보다 더 명확해야 한다고?”
- 이 지시의 목적을 알 수가 없어서요. 한경의 앞날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까?
뻣뻣하게 구는 김 실장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쥐고 흔들어 대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승운은 거칠어지려는 숨을 애써 억눌렀다.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김 실장이 한참 만에 기계적인 말투를 흘렸다.
- 다음 주 갤러리에서 새 전시회를 오픈합니다.
“거긴 안 간다고 했을 텐데.”
- 그곳에서 장세라 씨를 끝까지 에스코트하신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던 승운이 눈을 반짝 떴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기울었다.
“좋아. 거기 티타임이 있었지? 아, 물론 거기까지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적당한 곳에서 저녁 먹고 젠틀하게 집까지 바래다주면 되나?”
- 스위트룸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느슨해졌던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휘발되었다. 누군가 머리 위로 얼음물을 들이붓는 것 같았다. 승운은 제 귀를 의심하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뭐?”
- 안은 적당히 장세라 씨의 취향에 맞춰 꾸며 두었습니다. 프랑스에서의 교우 관계를 봤을 때 처녀는 아닐 테니 크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련님에 대한 호감 정도를 보면 오히려 그쪽에서 달려들 가능성도 크겠군요.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더러, 장세라랑 자라고?”
손이 떨려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분노와 수치심에 고스란히 요동치는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귓가에 의아하다는 듯한 김 실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 어차피 일어날 일입니다. 다음 달 중에 약혼 발표가 예정되어 있으니까요. 조금 앞당긴다고 생각하시면…….
“헛소리 집어치워! 누가 그 여자랑 약혼을 해? 없던 일로 해. 권범진에 대해서는 내가 다른 루트로 알아볼 테니까.”
- 어려우실 겁니다.
“뭐?”
언성을 높이자 또다시 머리가 핑 돌았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일까. 심장이 두 눈 위에서 널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는데 김 실장이 조용히 말했다.
- 몇 년 전 권범진에 대해 간단한 조사를 해 본 적 있습니다. 그자의 공식 기록은 도련님과 함께 다닌 고등학교 전입 신고 이후 스물한 살 때 목포에서 면허를 딴 게 마지막이었어요.
심장 박동이 둔해진다. 승운이 눈을 껌뻑였다.
“그게, 무슨 뜻이지?”
- 일반인들과 같은 생활 반응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럴 경우는 보통 둘 중 하나죠. 죽었거나.
잠시 말을 멈춘 김 실장이 짧게 덧붙였다.
- 일반인이 아니거나.
승운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제 차로 걸어오던 범진이 떠올랐다. 그의 기억보다 범진은 훨씬 위압적이었다. 고등학교 때 막연히 느껴지던 압도감과는 차원이 달랐다.
떡 벌어진 어깨와 꽉 짜인 몸매는 분명히 단련하는 몸이었다. 현장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노동으로 다져진 몸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가 창문을 두드리는 순간 그대로 창문을 후려치는 줄 알고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으니까.
평범한 사람은 절대 그런 기운을 뿜을 수 없다. 그것은 오래전 퇴화된 사람의 동물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기운이었다. 본능적으로 상대가 나보다 강하고, 그가 언제든 공격할 태세를 갖출 수 있음을 감지한 것이다.
- 여사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만 가 봐야겠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김 실장이 재촉하듯 빠르게 말을 뱉는다. 이를 악문 승운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낮은 신음을 삼켜 내는 그의 손목을 타고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6
JBK 파이낸셜. 업종은 대출, 캐피탈, 투자 기관.
홈페이지는 있었지만 아쉽게도 범진의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평범한 회사가 아니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범진이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지만 대신 그 회사가 제법 떡잎이 심상치 않은 회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JBK 파이낸셜은 개인,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 간의 거래인 P2P 금융업까지 중개하고 있었는데, 그쪽은 작년 온라인 투자 연계 금융법이 통과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된 분야였다. 남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을 때 이미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JBK 파이낸셜은 또 한 번 크게 성장했다.
게다가 대단한 전문가라도 있는지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 쪽에도 매출을 크게 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법으로 정해져 있는 대출 이자의 한도를 아슬아슬하게 지키면서 영업을 했기 때문에 다른 회사들과는 달리 영업 정지 한 번 먹은 적이 없었다.
투자를 하라면 아마 이런 회사에 했을 것이다. 상당히 영리하고 감각이 젊으면서도 전략적인 운영을 하는 회사였다.
준영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피곤한 상태에서 술까지 마시고 들어왔는데도 어제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가끔 폭주할 때가 있어.
지난 시간 동안 얼마나 무미건조하게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준영은 엎드린 채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어둠 속에서 눈만 깜빡이는 그녀의 입술이 슬며시 기울었다.
그렇게나 놀란 얼굴이라니.
옛날부터 범진은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았다. 돌부처처럼 만사에 무심한 듯한 표정이 기본값이었고 크게 웃는 일도, 물론 우는 일도 없었다. 저 역시 기껏해야 피식 웃는 걸 몇 번 본 게 전부였다.
그런 권범진을 놀라서 얼어붙게 만들었다. 내가.
스스로 뿌듯한 마음에 실소를 흘리던 준영은 이불을 힘껏 젖혔다. 밖은 이미 밝아 오기 시작했고, 그녀는 범진이 욕실에서 씻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발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준영은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굳게 닫힌 문을 주시했다. 어제 그런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 취했던 건 아니다. 베개맡에 있는 소주병이 증명하듯 한 병도 채 다 마시지 않았다. 그저 범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채자마자 일어난 충동에 굴복한 것뿐이었다.
그 바보는 예전에도 그랬다. 남들 앞에서 결코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권범진은 자신의 존재가 그녀에게 피해를 입힐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JBK에서 일한다는 걸 그런 타이밍에 밝힌 이유를 누가 모를 줄 알고.”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낀 준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정만수가 보상금을 받으면 빌려준 돈을 회수하려고 여기에 온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애초에 누군가 정만수를 떠밀었으니 한경에만 귀책사유를 묻기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럼 그냥 가 버리면 된다. 한참을 헤맬 그녀를 외면하고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굳이 제게 구구절절 힌트를 넘겨주며 스스로의 입장을 밝힌 건 준영으로 하여금 그 옛날 유치장에 갇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알은척하지 마.
나한테서 떨어져.
“……그때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알면서.”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준영의 눈매가 또렷해졌다.
권범진은 예나 지금이나 저에게 있어서 가장 이기적인 선택이다. 오로지 나 하나만 생각했을 때 가능한 선택. 나를 위해 모든 것으로부터 눈을 감을 수 있는 선택.
기지개를 켜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그리고 나는 어제 권범진한테 뽀뽀했다.
진도를 나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