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준영은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목덜미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입술이 더욱 깊이 맞물렸다. 열이 오른 목에 닿아 있는 손가락이 차갑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범진은 눈조차 감지 못했다.
찰나였지만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 뒤 준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어둠 속에서조차 맑다. 부드러운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나 예전의 윤준영 아니고, 너도 예전의 권범진 아니겠지. 하지만 난 이대로 너 안 보낼 거야. 예전 그대로가 아니면 어때? 비에 젖은 나한테 인사도 하기 전에 티셔츠부터 뒤집어씌울 생각하는 권범진이면 충분하지.”
경직되어 있던 심장이 속박에서 풀린 것처럼 느리게 뛰기 시작한다. 아득한 기분으로 범진은 겨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윤준영.”
“JBK 파이낸셜에서 일하는 권범진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알아볼게. 상종 못 할 나쁜 놈인지 아닌지 말이야.”
준영의 몸이 멀어진다. 손잡이를 당겨 차 문을 열어젖힌 그녀는 흘끗 범진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너 방법 잘못 골랐어. 정말 끊어 내고 싶었으면 내가 비를 맞든 기절하든 모른 척 지나갔어야지. 혹시라도 찬물에 씻을까 봐 매일 먼저 샤워하는 주제에.”
차 문이 경쾌하게 닫히는 소리에 범진은 뭉쳐 있던 숨을 겨우 내뱉었다. 고개를 돌리자 종종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가는 준영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한 모든 말들이 가슴을 쿡쿡 찌른다. 정말이지 당해 낼 수가 없다. 헛웃음을 흘리며 범진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가락이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 있는 입술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자신은 일반인과 평범하게 함께할 수 없다. 그게 준영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녀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인 영향을 주느니 차라리 앞으로 만나지 못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들쑤시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 윤준영.
차게 식어 가는 머리와는 다르게 심장은 주인을 찾은 듯 열렬히 박동한다. 짧게 한숨을 내쉬던 범진은 드르륵,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보다 집어 들었다. 삼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저어, 형님.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매우 어색하게 늘어지는 목소리를 듣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범진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며 조용히 말했다.
“뭘 봤든 못 본 걸로 해라.”
- 그, 그럼요, 형님. 저는 잠깐 눈이 멀었었거든요. 아까 하이빔을 직통으로 봐서 그런가 봅니다.
“왜 밖에 나와 있어?”
- 그게, 아까 집에 들어왔다가 출출해서 잠깐 시내 편의점에 다녀왔는데요. 골목 안쪽에 못 보던 차가 세워져 있어서 말입니다.
일정한 속도로 걸음을 옮기던 범진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삼두가 말을 이었다.
- 운전석에 사람이 타고 있습니다. 두 시간째 그 자리에 계속 있고요.
“어디.”
- 형님 뒤쪽에 있는 하얀색 벤츠입니다. 3743.
범진은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넣으며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과연, 전봇대 뒤쪽에 세워진 벤츠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검은 인형이 보인다. 선팅이 짙게 되어 있어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주먹을 가볍게 털어 낸 범진이 성큼성큼 운전석 쪽으로 걸어가 차창을 두드렸다.
“사람 타고 있는 거 아니까 얼굴 좀 봅시다.”
이 동네에 이런 차가 서 있을 만한 이유라고 해 봐야 자신밖에 없다. 하지만 딱히 짐작이 가는 상대는 없었다. 애초에 이런 방식으로 얌전히 눈에 띄길 기다리는 것은 제 세계의 방식이 아니었으니까.
차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범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경찰이라도 불러야 하나. 누굴 스토킹하는 겁니까? 어디 보자. 차 번호가, 3743?”
짐짓 앞으로 걸어가 번호판을 보는 척하자 그제야 차창이 조금씩 열린다. 문을 열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창문을 연다는 점에서 상대의 방어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비딱하게 웃은 범진은 창문 쪽으로 다가가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버텼다. 저 창문으로 뭘 휘두를지 모르니 최소한의 대비는 해야 했다.
잠시 기다리자 그의 뜻을 알아챘는지 뒤늦게 문이 열리고, 깔끔한 슈트를 갖춰 입은 남자가 내렸다.
“이런 데서 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부드러워 보이는 굽이진 머리칼. 귀공자처럼 매끈하고 서글서글한 얼굴.
그가 누구인지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승운이 희미하게 눈으로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오랜만이다, 권범진.”
보였을까. 이 거리에서.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같은 회사에 있어. 나승운 어머니가 운영하는 재단 도움으로 학교를 졸업했거든.’
준영의 말이 떠올랐지만 그 말을 기억하지 못했더라도 범진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앞에 마주한 남자의 눈빛에서 읽히는 역사로.
승운은 많이 변하지 않았지만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차분하고 사회적인 얼굴로 웃고 있는데도 어쩐지 검게 요동치는 그림자가 보이는 듯했다. 범진은 눈썹을 까닥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며 입을 열었다.
“윤준영 찾아왔냐?”
“가까운 지사에 볼일이 있어서 지방 내려온 김에 얼굴이나 볼까 했더니. 넌 어떻게 여기에?”
승운의 눈이 제 모습을 빠르게 훑어 내리는 것을 느낀 범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근처 현장에서 일해.”
아, 하고 승운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범진의 눈썹이 비스듬히 위로 올라갔다.
예전의 나승운이었다면 저렇게 웃는 것이 단순히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을 테지만 지금의 나승운은 달랐다. 그는 그 짧은 웃음 한 번으로 많은 걸 내비치고 있었다.
우월감과 경멸, 그리고 되찾은 여유.
“준영이도 참. 너 만나서 반가웠을 텐데 나한테도 좀 알려 주지. 준영이 하는 일이 좀 바빠. 우리 회사 핵심 부서거든. 워낙에 공부 잘했잖아.”
가늘게 뜬 눈으로 범진을 보며 승운이 조곤조곤 말을 뱉었다. 범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렸다.
“인사하고 가라.”
“언제부터야?”
어딘가에 거구를 구겨 넣고 숨어 있을 삼두를 찾아보려던 범진은 제 뒷덜미를 잡아채는 말에 걸음을 멈췄다. 한 발 다가온 승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는 지나칠 정도로 변화가 없어서 마치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느껴졌다.
“뭐가.”
“준영이랑 만난 거. 알고 여기로 온 거야?”
목소리는 솜털처럼 부드러웠지만 왜인지 살을 할퀴는 느낌이 들었다. 범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나보다 윤준영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않겠냐.”
“싸웠거든. 내가 여자를 좀 만나서. 준영이 자존심 알잖아.”
입꼬리를 조금 더 당기며 승운이 중얼거렸다.
“그냥 만나기만 한 건데 오해를 했나 봐. 내가 잘못했지. 우리 오래된 사이야.”
범진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승운은 모든 것이 여유롭기 그지없었지만, 애석하게도 한 가지만은 숨기지 못했다. 세게 말아 쥔 손등 위에 핏줄이 불뚝 돋아 있었다.
“오래된 사인데 그냥 만난 걸로 오해를 할 정도라면.”
그의 떨리는 주먹에서 시선을 떼어 내며 범진은 피식 웃었다.
“어지간히 신뢰를 잃은 모양이네.”
“이제 와서 우리 사이에 끼어들 생각 하지 마.”
범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유가 한 꺼풀 벗겨진 불안한 목소리를 듣자 하얗게 튀어나온 승운의 생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 안 해.”
답지 않게 성실하게 대답해 주며 범진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승운은 어설프기 그지없다. 남을 속이고 싶다면 적어도 동요를 드러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여전히 안이한 세계에서 살고 있구나, 왕자님. 철저할 필요가 없는.
“누가 ‘우리’인지 모르겠어서 말이야.”
희미하게 안심하는 듯한 승운의 가슴에 무심하게 칼을 박아 넣으며 범진은 돌아섰다. 재활용 수거함 뒤에 비죽 튀어나와 있는 어깨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등이 따가웠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 * *
알고 있었다. 예감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기어코 오고야 말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권범진은 진드기다. 진드기보다도 독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이미 10년도 넘었지만 한순간도 뇌리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다. 마치 아무리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그는 늘 어딘가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래. 어쩌면 제 지나친 열등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작 준영의 입에서 먼저 그의 이름이 나오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녀는 모든 것을 깡그리 잊어버린 것처럼 태연했다. 어머니 때문인지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 역시 아무 때나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술기운이 제 모든 감각을 느슨하게 만들어 준 뒤에야 겨우, 권범진의 이름을 꺼내 보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깨달을 수 있었다. 권범진은 준영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라는 것을. 결코 빠질 일이 없는 가시 같은 것임을.
준영은 항상 그 이름 앞에서 아무렇지 않았다. 잘 살고 있을까, 물어보면 그렇겠지, 대답했고 뭐 하고 있을까, 하면 잘 살고 있겠지, 대답했다. 그래서 권범진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서 한 발자국도 나아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준영이 그럴수록 그 얼룩이 자신을 좀먹어 가는 것 같았다.
태연할 수가 없다.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그때 그렇게 사라져 버린 권범진을 찾지 못해 윤준영이 어디까지 무너졌던가. 그녀의 어머니가 마침 그런 식으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방황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도 준영은 제 앞에서 한 번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늘 무덤덤했다. 그것이 얼마나 견고한 벽인지를 10년 넘게 겪어야 했다.
단 한 순간도 준영은 권범진을 들여놓았던 곳에 저를 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것을 확신했지만 이 평행선 같은 관계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그곳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준영도 남자를 몇 번 만나긴 했지만 그 관계는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대체로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밀려났다.
윤준영과 가장 가까운 남자는 나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 간격을 좁힐 수 없다고 해도 그것만은 달라지지 않는다. 준영은 늘 제 곁에 있을 것이고, 그녀의 곁에 다른 남자는 서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언젠가는.
그런 악몽 같은 꿈에 젖어 살면서도 항상 불안했다. 혹시 권범진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아니면 그가 만약 준영을 찾아온다면!
상상만 해도 숨이 막혔다. 누군가 서서히 젖은 끈으로 목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준영은 그에게만은 문을 활짝 열어 줄 것이다. 있어야 할 곳에 돌아온 이를 맞이하듯, 그 자리를 그로 가득 채우고 말 것이다. 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를 보여 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날이.
기어코 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