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51화 (51/86)

<51화>

준영의 입으로 면발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고개를 든 그녀가 입을 우물거리며 범진을 빤히 응시하자 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헷갈릴 거 없어.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놀랐을 테니까.”

“아하. 내가 아니라도 그렇게 혼비백산해서 달려왔을 거고?”

말문이 막히게 하는 재주도 여전했다. 범진이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우동을 삼킨 준영이 다시 잔을 내밀었다. 그녀는 씩 웃으며 음산하게 속삭였다.

“이번엔 주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냉장고로 직접 가서 병나발 불 거니까.”

헛웃음을 흘린 범진이 그녀의 잔을 반쯤 채웠다. 준영이 기다렸다는 듯 그 잔을 비우자마자 매콤한 닭발과 김치볶음밥, 제육덮밥이 눈앞에 놓였다. 상이 온통 불그스레했다.

“안전사고가 아니라는 확증이라도 잡았어?”

범진은 잔을 흔드는 준영에게 밥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는 눈을 뾰족하게 뜨면서도 순순히 덮밥에 숟가락을 꽂았다. 매콤한 냄새가 워낙에 맛있게 나서 그녀로서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황이라고 해 두지. 혹시 인부들 사이에 도는 말 같은 거 없어?”

순간 범진의 입술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날 스파이로 쓰시겠다?”

“그래도 고작 한 달 남짓 같이 일한 사람들보다는 내 편을 들어 주지 않을까 해서. 네가…….”

당당하게 말을 하며 준영이 씩 웃었다.

“다른 목적이 없다면.”

두 사람의 시선이 조용히 부딪쳤다. 준영은 김치볶음밥 위에 놓인 달걀 프라이를 반으로 가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경우에 다른 목적이라고 하면, 이 사고를 안전사고로 만들려는 거겠지. 그게 날 내쫓으려는 이유겠고.”

준영이 볶음밥을 한 술 뜨는 동안 범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자그마한 머리통에서 흘러나오는 생각들에 감탄사가 나올 지경이었다.

“김용재 주무관 쪽에 안전 설비 관련해서 신고한 것도 너야?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이 사고가 안전사고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해지는데. 뭐, 답이야 정해져 있지만.”

눈썹을 까닥인 준영이 다시 빈 잔을 내밀었다. 잔을 채워 주며 범진이 물었다.

“그 정해진 답이 뭔데.”

“돈? 언제나 돈이지.”

술을 나눠 마시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는 사람처럼 또 단번에 잔을 비워 낸 준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범진은 우동 국물을 마시는 그녀를 가만히 주시했다.

윤준영이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정만수가 떨어진 게 누군가에게 떠밀렸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다. 그렇다면 사건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이었다.

안전사고로 보상금을 받아 낼 수 없다면 실수였든 고의였든 정만수를 민 가해자를 알아내는 게 순서다. 그에게 지울 수 있는 책임은 지워야 하니까.

이건 실수가 아닌 고의일 가능성이 크다. 실수였다면 사람이니만큼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죄책감에 밤잠을 설쳤겠지.

하지만 인부들 중 겉으로 보기에 평소와 달라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계획하에 저지른 일이라고 보는 게 타당했다.

물론 윤준영의 입을 막아 보상금을 받아 내는 방법도 있다. 이럴 땐 매수나 폭력, 두 가지 방법이 흔히 쓰인다. 정만수의 빚과 보상금, 준영의 성정을 고려해 봤을 때 매수는 수지 타산이 안 맞는다.

그렇다면.

“뭘 그렇게 봐?”

입에 물고 있던 우동 면발을 호록, 빨아들인 준영이 미간을 찌푸린다. 생각의 늪에서 고개를 든 범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명이 아닌 건 알아?”

“뭐가?”

“이 근처 사고 현장에서 추락 사고로 떨어진 인부들.”

“몇 명이나 되는데?”

“두 달 동안 네 명.”

“그게 얼마나 많은 수치인지…….”

“지난 2년간은 한 명도 없었어.”

제육덮밥을 막 떠 올리던 준영의 숟가락에서 고기가 툭 떨어졌다. 범진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그녀의 숟가락에 다시 고기를 올려 주었다.

보상금을 포기하면 정만수가 진 빚을 회수하는 기간은 열 배 이상 늘어날 것이다.

그래도 저녁에는 퇴근해서 딸의 저녁밥을 챙겨 줄 수 있었던 그의 부인은 밤낮없이 파마 약에 손을 담가야 할 것이고, 대회에 나갈 정도로 피아노를 잘 치던 그의 딸은 아르바이트가 아니라면 피아노를 칠 기회조차 없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 너무 지독하게 몰아붙이진 않는다. 모든 걸 포기하고 죽어 버리면 오히려 이쪽이 손해니까.

대신 그들의 인생은 적어도 10년 이상 회사에 저당 잡히게 될 것이다. 숨 쉬는 것조차 그들의 의지대로 할 수 없다. 돈을 갚기 위한 노예로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남의 돈을 빌리는 것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지만, 원래 빚이란 그런 것이었다.

“정만수 씨도, 그 부인도 반응이 평범하진 않더라니. 그럼 자기 발로 뛰어내렸거나 남이 밀었거나 둘 중 하나란 얘긴데……. 추락한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먼저 모아 봐야겠네. 다들 보상금이 절실한 상황인지. 그럴 가능성이 더 크겠지? 그 사람들 전부가 등을 떠밀릴 만큼 원한을 산 게 아니라면.”

혼자 생각을 정리하듯 중얼거리던 준영이 순간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는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범진을 응시했다.

“근데 갑자기 이런 얘길 나한테 왜 해 주는 건데?”

“어차피 알게 될 거, 시간 낭비 하지 말라고.”

빈 잔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쓸던 범진은 천천히 그것을 뒤집어 놓으며 준영을 바라보았다.

“정만수가 빚을 지고 있는 회사가 내가 있는 곳이거든. JBK 파이낸셜.”

시원스레 뻗은 준영의 눈매가 커다랗게 뜨인다. 범진은 김치볶음밥 접시를 들어 숟가락으로 입에 훌훌 밀어 넣었다.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질 때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 * *

공사판까지도 따라와 지켜보던 삼두였지만 준영에게는 겁이라도 먹었는지 따라오지 않았다. 까지도 않은 소주 한 병을 고이 품에 안은 채 집까지 차로 이동하는 동안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범진은 묵묵히 핸들을 틀었다.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준영이 허물없는 표정으로 예전처럼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놔둘 수도 없었다.

그의 눈에는 불 보듯 훤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때도 속절없이 준영에게 빠져들었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그녀만 생각하고 있었다. 뭐든 다 해 주고 싶었고, 뭐든 다 막아 주고 싶었다.

저를 보며 웃어 주는 윤준영만 있으면,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준영은 늘 그와 함께였다.

삼촌과 지방을 떠돌며 숨어 다닐 때도, 그들을 쫓던 아버지 조직의 배신자가 어이없이 뺑소니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도, 삼촌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다른 계좌에 숨겨 두었던 조직과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을 때도, 삼촌과 아버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던 조직의 고문 변호사의 말에 따라 그 돈을 투자해 회사를 설립했을 때도.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를 노린 배신자의 잔당들과의 싸움에서 칼을 맞아 사흘 밤낮을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도.

준영은 마치 아득한 꿈처럼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그녀가 상징하는 모든 것은 제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천진하던 시절의 순수한 순간들. 아름답고 선명하고 평온한 하루. 가슴 벅찬 행복 같은 것들.

윤준영은 여전히 깨끗하고 빛난다. 그때 예상했던 대로 당당하게 스스로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 그녀와 제 삶이 굳이 교차할 필요는 없다. 그녀는 그녀대로, 저는 저대로 살아가면 그뿐이었다.

뻐근할 정도로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풀며 범진은 차를 세웠다. 골목이 어둑했다. 여전히 침묵 속에서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한 준영을 곁눈질한 그가 입을 열었다.

“정만수는 자기 발로 떨어진 게 아니야.”

잠에서 깨어나듯 준영이 부스스 고개를 돌렸다. 범진은 정면을 향한 채 덤덤하게 덧붙였다.

“누군가에게 떠밀렸다고 하더군. 누가 밀었는지를 모르니까 동료들의 면회도 거절했던 거고. 그 사람은 성실하게 빚을 갚고 있었어. 이대로라면 몇 년 되지 않아 변제가 끝났을 거야. 그런 상황에서 굳이 죽을지도 모르는 선택을 했을 리 없지.”

“…….”

“자료가 좀 모이면 경찰에 의뢰해. 그게 나을 거다. 형사 사건이니까.”

내리라는 듯 문을 턱짓하자 반사적으로 더듬더듬 손잡이를 잡던 준영이 멈칫했다.

“너.”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고개를 휙 돌렸다.

“혹시 이대로 가 버리려는 거야?”

주변이 어두웠지만 준영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것쯤은 충분히 보였다. 그는 제 밝은 눈에 감사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장은 아니야.”

“그럼 언제…….”

“윤준영.”

조용히 부르자 소주병을 쥔 준영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그 손가락 하나하나를 눈으로 그려보다 범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 네가 있어서, 좋았어.”

아무것도 할 게 없던 시절. 절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무료함을 잊게 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와 보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상당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다시 만나 반가웠다.”

범진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이것만은 반의반도 전하지 못한 진심이었다.

가까이 있지 않아도, 준영은 앞으로도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 만나기 전보다는 더 나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어디에서 일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입술을 꽉 다문 준영이 벨트를 풀고는 문을 열었다. 불이 켜지자 준영의 얼굴이 더욱 환하게 보였다. 고운 눈썹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준영은 내리지 않고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다시 세게 문을 닫았다. 그녀를 지켜보던 범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내 코웃음을 친 준영의 또렷한 목소리가 다시 찾아온 어둠 속을 울렸다.

“나 생각보다 너에 대해 잘 알아, 범진아.”

낯선 호칭과 함께 저를 똑바로 보는 그녀의 시선에 왜인지 심장이 바짝 조여든다. 준영의 눈이 웃고 있었다.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이런 식으로 아주 끊어 낼 생각인가 본데, 오산이라는 거 알려 줄게.”

“뭐…….”

순식간에 훅 가까이 다가온 준영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짓눌렀다. 따뜻한 온기가 말캉한 입술을 타고 흘러들어 온다. 범진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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