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저, 혀, 형님.
“이 지역 언론사 몇 개 추려서 제보 좀 해라. 큰 회사 말고 인터넷 뉴스 주로 작성하는 쪽으로. 최근 이쪽 공사 현장에서 연달아 일어나고 있는 추락 사고에 대해서 말이야. 성가셔하면 돈 적당히 먹여서라도 기사 쓰게 해. 한경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고, 명예 훼손 문제가 있으니까. 전반적인 뉘앙스는 안전 설비 미비 가능성에 대한 보도 형식이면 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한경에는 압박이 될 거다. 박삼두. 듣고 있냐?”
- 드,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님, 지금…….
“그리고 그쪽에서 인근 추락 사고 자료 조사 끝내면 리스트 받아 와. 거기 피해자들 이름 우리 회사 채무자 명단에 있는지 교차 확인하고, 없으면 채권자가 누군지 알아보……, 됐다. 나 지금 내려간다.”
삼두에게 너무 많은 것을 시켰다는 생각에 범진이 말을 끊었다. 하지만 이것은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불법을 지양하고 있었다. 본질은 사채업이지만 규모를 키우면서 다양한 형태의 비즈니스를 하게 됐고, 예전처럼 빚을 갚지 못하는 자의 집에 가서 장기 매매를 운운하며 협박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가능성 있는 중소기업들을 상대로 투자의 탈을 쓴 대출을 해 주면서 회사는 이미 단순한 사채업을 탈피했다. 개인에게 돈을 빌려줄 때도 다른 곳보다 회수 가능성을 엄격하게 따지는 편이었다. 개인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IT 회사를 설립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밑바닥에서는 여전히 실적 압박이 있을 것이다. 모두가 회사의 규칙을 따른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빠른 회수를 위해 위험한 방법을 생각해 낸 직원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범진은 짧게 혀를 찼다. 정만수의 반응으로 봤을 때 상대와 절대 합의가 된 사고는 아니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밀려 떨어진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가 느끼는 두려움은 진짜였다.
우리 회사가 아니라면 다행인데.
만약의 경우를 상정하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간 범진은 삼두가 차를 세워 둔 곳으로 향하다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이상하게 경직된 얼굴로 간절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삼두의 곁에, 준영이 비딱하게 서 있었다.
“퇴근하시나, 김 씨?”
……쟤는 또 왜.
태연하게 손을 까닥이는 그녀를 훑어보며 범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를 대강 하나로 묶고 있는 준영의 어깨에 삼두의 재킷이 걸쳐져 있었다.
입술을 끌어 올린 채 웃고 있지만 뾰족한 눈가가 어둡다. 가까이 가고 나서야 범진은 그녀의 머리가 조금 젖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다소 난폭한 기운을 풍기며 삼두의 재킷을 바닥에 내동댕이칠 준비를 하고 있던 주먹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어디서 비라도 맞았어?”
건조하게 말을 내뱉자 기다렸다는 듯이 준영이 눈을 부라리며 발을 굴렀다.
“그런 거나 다름없지. 나한테 물을 끼얹지 뭐야.”
“그러니까 말을 할 땐 생각을 좀 하고 해.”
또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한 걸까. 응급실에 실려 가서 링거 맞은 지 얼마나 됐다고.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말하자 준영의 입술이 슬쩍 기울어지는 게 보였다.
“몰랐나 본데 나만큼 충분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도 없거든요, 김 씨.”
“그 충분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결과가 사람들 보는 앞에서 날 기다리는 겁니까, 한경 리스크관리팀 윤준영 씨.”
선을 긋는 듯한 말에 준영의 눈이 호전적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팔짱을 끼자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재킷이 벌어진다. 역시. 셔츠까지 젖어 있었다.
“내가 왜 기다리고 있는지 말 좀 해 줄래요, 박삼아닙니다 씨?”
이상한 호칭에 삼두가 움찔했다. 꼬리가 축 처진 그의 눈매만 봐도 준영에게 얼마나 시달렸을지가 상상이 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으, 응급실에 데려다준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그건 됐다고 했잖습니까.”
“미안해요, 내가 빚지는 걸 싫어해서.”
빚이라는 말에 범진의 눈썹이 까닥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나한테 빚진 거 없어요.”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뭐라고 했죠, 박삼아닙니다 씨?”
왜 자꾸 저런 이름으로 삼두를 부르는지 모를 일이다. 범진은 준영의 친근한 웃음이 닿고 있는 삼두를 응시했다. 그대로 얼어붙은 것 같은 얼굴로 삼두가 뻣뻣하게 대답했다.
“처…….”
“처?”
“첫사랑이랑 닮아서입니다.”
힘겹게 토해 내듯 말을 뱉어 내고는 삼두가 시선을 떨궜다. 귀가 벌게져 있었다. 기가 막혀 헛숨을 내쉰 범진이 준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말간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포기를 잘 모르는 편이라. 빚 갚을 때까지 귀찮게 구는 게 싫으면 어울려 주지 그래요? 안 그러면 한밤중에 방으로 쳐들어갈지도 모르는데.”
“너 그 말 좀…….”
폭탄처럼 떨어진 말에 눈을 치뜨는 범진을 가로막듯 준영이 빠르게 말했다.
“난 지금 같이 술 마실 사람이 필요해요.”
매력적인 눈매가 부드럽게 기울어진다. 그때와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눈동자. 준영은 이곳에 오직 그만이 있는 것처럼 보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그게 당신이면 좋겠어. 김 씨.”
범진은 묵묵히 그녀를 응시했다. 돌처럼 단단하고 강해 보이지만 동시에 툭 건드리면 무너질 것처럼 연약해 보이는 눈동자였다.
아름답지만 어딘지 비어 있는 듯한 저 눈을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범진은 제가 그럴 수 없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무거운 한숨 끝에 그의 입이 벌어졌다.
“좀 씻고.”
“거봐, 내 말이 맞았죠? 같이 가 줄 거라고 했잖아.”
묵직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영이 씩 웃으며 삼두를 돌아보았다. 날아오는 범진의 시선에 사색이 된 삼두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아니, 형님, 저는…….”
“그래서. 이름이 뭐예요?”
준영의 질문에 범진의 미간에 주름이 하나 더 잡혔다. 얼어붙은 삼두 대신 준영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네가 같이 갈 리가 없다고 하잖아. 그래서 만약 같이 가 주면 이름 알려 달라고 했거든. 나한테 이름을 말을 안 해 주더라고, 네 사촌 동생이.”
애초에 몸을 쓰는 게 주특기인 삼두가 준영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범진은 저를 간절히 보고 있는 삼두를 향해 혀를 차며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제야 삼두가 더듬더듬 말했다.
“박, 삼두입니다.”
“반가워요, 박삼두 씨.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범진은 눈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하는 준영과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삼두에게서 눈을 돌리며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세월의 힘을 업은 윤준영은 더욱 막강해졌다.
제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그는 도무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 * *
“여기 소주 두 병요. 닭발하고 우동도요. 닭발은 아주아주 맵게 해 주세요. 제가 오늘 스트레스를 좀 받아서.”
포장마차를 보자마자 천막을 걷으며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준영이 속사포처럼 말했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의자에 앉으려던 범진은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를 향해 준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너 먹을 것도 시켜. 오늘은 내가 사는 자리니까.”
“……혼자 먹을 거라고? 소주 두 병을?”
“응. 나 두 병이 치사량이야. 딱 그만큼 먹고 죽으려고.”
“밥 종류 있으면 아무거나 두 개 주세요.”
범진은 소주와 잔을 들고 온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소주병을 들어 능숙하게 뚜껑을 돌리며 준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밥만 먹겠다고? 맨정신으로 나 상대하기 쉽지 않을 텐데.”
“취한다고 쉽겠냐.”
덤덤하게 대꾸하며 범진은 준영의 손에서 소주병을 가볍게 빼앗았다. 두 잔을 채우는 그의 손을 본 준영이 피식 웃었다.
“우리의 재회를 위하여. 비록 이름도 제대로 못 부르는 홍길동 신세지만.”
범진이 든 잔에 제 잔을 부딪치고는 준영은 한입에 소주를 털어 넣었다. 크, 하고 눈을 찡긋거린 그녀의 손이 또다시 소주병에 가는 것을 본 범진이 먼저 병을 잡았다. 준영이 눈꼬리를 올렸다.
“왜?”
“빈속이잖아.”
“그래서?”
“응급실 다녀온 거 잊었어?”
“그런데?”
범진은 그녀의 시선의 방향을 눈치채고는 새 소주병의 주둥이도 움켜쥐었다. 그와 침묵의 눈싸움을 벌이던 준영이 우동을 들고 오는 아주머니를 보자마자 잽싸게 손을 들었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
“무슨 일이야.”
범진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그녀의 목소리를 덮는다. 준영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우동이 테이블에 놓였다.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금세 주변에 퍼져 나갔다.
마지못한 얼굴로 젓가락을 든 준영은 우동을 몇 번 휘젓다가 툭 말을 뱉었다.
“정만수 씨 만나고 왔어.”
범진은 후루룩, 우동 면발을 삼키는 준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는 성질은 정말로 그대로인 모양이다. 짧게 고개를 내저은 그가 입을 열었다.
“면회 거절이라고 들었는데.”
“그 정도도 못 뚫으면 윤준영이 아니지.”
입맛에 맞는지 입술을 할짝인 준영이 또 한 번 우동을 크게 집어 먹었다. 그녀의 볼이 둥글게 부풀어 오른 것을 보고 입술을 실룩인 범진이 잔을 만지작거렸다.
“물세례 받은 보람은 있었고?”
“네가 뭘 바라고 여기 있는 건지 모르지만, 보상금 받을 가능성은 크지 않겠어.”
불분명한 발음으로 중얼거리며 준영이 빈 잔을 들이밀었다. 범진의 묵묵한 시선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우동 먹었잖아.”
“좀 더 먹어.”
“아빠야, 뭐야. 나 아빠 없는 거 알지? 아빠인 척 안 통한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준영을 지켜보는 범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준영은 그가 농담을 받아 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잘 알았다. 그녀는 입술을 비죽이며 젓가락으로 면발을 한가득 집었다.
“나는 네가 날 걱정하는 척할 때마다 이게 뭐 하자는 건가 싶어. 그럴 사이 아니니까 이름도 부르지 말래 놓고, 오토바이에 치일 뻔하니까 사색이 돼서 달려오고. 노선 좀 똑바로 정하는 게 어때, 권범진?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