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젖은 셔츠를 가볍게 털어 내고 있자 그게 거슬렸는지 이지선이 눈을 부라렸다.
“당장 나가라는 소리 안 들려?”
손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준영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의 앙상한 손목을 낚아챘다.
이지선에게는 애석한 일이었지만 준영은 제 따귀를 때리려는 사람을 많이 겪어 본 편이었다. 서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보상금을 지급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과실 비율이에요. 이 정도 확인도 안 하고 억대의 돈을 지불하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놔! 이거 안 놔?”
“회사는 안전 설비 부족에 대한 책임은 질 겁니다!”
윽박지르듯 강하게 튀어나온 준영의 말에 이지선이 움찔했다. 핏발 어린 눈에 고인 눈물을 보며 준영은 또렷하게 말을 뱉었다.
“하지만 추락 원인에 따라서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요. 사기죄로 고소라도 당하게 되면 그땐 보상금이 문제가 아니게 될 겁니다. 생계 걱정 같은 건 사치가 될 거라고요.”
이지선이 몸을 떨며 그녀를 바라본다. 그렁그렁한 눈에 절망이 고여 있었다. 준영은 목소리를 낮췄다.
“기업은 개인보다 덩치가 큰 만큼 힘이 셉니다. 그러니까 그런 기업을 이기려면 사실 관계가 완벽해야 해요. 조금이라도 빈틈이 있다면, 그 빈틈을 커다란 구멍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준영은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서서히 놓아주었다. 눈을 깜빡이며 이지선이 시선을 떨궜다. 한순간에 모든 생명력이 연기처럼 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추가로 하실 말씀이 생각나면 연락 주세요. 뭐든 좋으니까.”
작게 속삭인 뒤 준영은 몸을 돌렸다. 어느새 복도에는 사람들이 기웃거리며 서 있었다. 그 틈을 빠져나오며 준영은 가방에 넣어 둔 휴대폰을 확인했다. 녹음 상태에는 문제가 없었다.
중단 버튼을 누른 뒤 사무실로 전화를 걸며 그녀는 옷을 털었다. 이미 물이 스며들어 살에 달라붙은 셔츠를 떼어 내고 있는데 통화가 연결됐다.
“윤준영입니다. 박형준 대리와 통화 가능합니까?”
- 아, 윤 대리님. 박 대리는 지금 팀장님 모시고 미팅 들어가 있어요.
“혹시 부산 공장 안전사고 피해자 정만수 씨에 대해 재무 상태 확인한 기록이 있나요?”
- 음……, 따로 보이진 않네요. 그런 건 정보팀에 문의를 넣어 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럼 신용 상태 평가서 좀 요청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준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젖은 옷만큼이나 기분도 축축했다.
두려움에 떠는 정만수. 보상금에 집착하면서도 불안해하고 있는 이지선.
단순한 안전사고가 아니다. 그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스스로 뛰어내렸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을 굴리며 준영은 턱을 쓸었다. 그거야 채무 상태에 달려 있다. 얼마나 절실한지, 얼마나 압박당하고 있었는지에 따라 가능성은 달라질 것이다.
잘못되면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고, 장애가 남을 수도 있는데 몸이 재산인 사람이 그런 결정을 쉽게 내렸을 리 없으니까.
생각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준영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기분 같아서는 박형준의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어 대다 패대기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여기에 와서 아주 얻은 게 없는 건 아니지만.
답답하게 가라앉는 기분을 전환 시킬 게 필요하다. 준영은 젖어서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돌려 묶고는 가방을 고쳐 멨다.
또각또각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 그녀를 사람들이 흘끔거렸지만 준영은 꼿꼿하게 정면만 응시했다. 그래서 자판기 옆에 몸을 감추듯 서 있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다.
5
“아이고, 해 떨어질 때 되니까 이제 좀 살겠네. 작업 시간을 더 당기는 게 낫겠어. 나 물 좀 줘 봐.”
목에 건 수건이 땀에 흠뻑 젖은 인부 한 명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뚜껑 열린 생수병을 건네던 남자가 밖을 내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김 씨. 근데 정말 괜찮은 건가?”
“뭐가요?”
벽면에 쌓아 둔 시멘트 옆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범진의 대꾸에 남자가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저 덩치 말이야. 빚 받으러 온 놈 맞지? 저렇게 매일 지키고 있다가 일당 빼앗아 가는 거야? 그럼 김 씨는 어떻게 생활한대?”
범진은 눈을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삼두가 시커먼 차를 응달에 세워 둔 채 서 있었다.
안에 들어가 앉아 있으라니 형님이 서서 일을 하는데 제가 어떻게 편히 앉아 있겠냐며 굳이 차 밖에 나와 저렇게 서 있는 중이었다.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빚 받으러 온 사채업자쯤으로 소문이 나고 있었다.
“그렇게 악질은 아니에요.”
1분에 한 번씩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고 있는 삼두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며 범진이 혀를 찼다. 배관을 맡고 있는 인부가 그를 향해 슬쩍 말했다.
“곤란하면 말해. 일당에서 몇만 원이라도 우리가 빼돌려 줄라니까.”
“네.”
순순히 대꾸하자 주변을 둘러본 인부들이 잠시 멈춰 서 숨을 돌렸다. 슬슬 작업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영복이 형님이 안 보이네. 오늘 껍데기나 먹으러 가자고 할까 했더니.”
“오늘 오후에는 안 나왔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보더라고.”
“만수 일이 빨리 해결이 돼야 할 텐데. 에휴, 불쌍한 놈.”
“그래도 그 새로 온 아가씨가 전에 왔던 놈보다는 똑 부러진 것 같기는 하던데.”
시멘트 포대 수량을 세고 있던 범진의 눈이 자연스레 인부들에게 향했다. 그들은 물을 나눠 마시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똑 부러진 게 더 나쁘지. 그래 봐야 회사 사람이잖아. 보상금 안 줄 핑계 찾으러 다니는 거 아니냐고.”
“그래도 안전망이며 발판이며 좀 까는 시늉은 하더만.”
몇은 코웃음을 쳤고 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하게 경사를 그리고 있던 범진의 눈썹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았다.
“그때 구청에 민원 넣은 거는 그걸로 끝인가? 더는 와서 들여다보지 않는 거야?”
“갸들이 뭘 해 주길 바라고 그랬나. 그래도 공무원이 나와서 돌아다니면 회사가 쫄려서 보상금 지급이 빨라지지 않을까 싶어서 한 거지. 김 씨가 그렇게 말했었잖여.”
“김 씨가 젊어서 그런가 아는 게 참 많아. 그때 최 씨 전셋집 일도 해결해 주고.”
“거기서 그 집주인 깡패놈들이랑 시비 붙어서 한바탕했다며? 영복이 형님이 아주 보통 주먹질이 아니더라고 얼마나 감탄을 하던지. 무슨 운동이라도 했나?”
인부들의 시선이 제게 향했지만 범진은 가볍게 웃을 뿐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입고 있는 민소매에서 쉰내를 풀풀 풍기며 인부 하나가 농담처럼 말했다.
“저 덩치랑도 붙으면 이길 수 있는 거 아냐? 너무 고약스럽게 굴면 때려 눕혀 버려.”
“에이, 무슨 해코지를 할 줄 알고. 여동생이 있다잖아.”
말을 많이 안 하다 보면 대신해서 대답해 주는 사람들이 생긴다. 이럴 때는 그저 느릿하게 시선을 떨구는 척만 하면 된다.
다만 저를 두고 이런 말이 오간다는 걸 들으면 삼두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상상이 돼서 하마터면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아, 그 얘기 들었수? 저쪽 삼진건설에서 올리고 있는 아파트 현장 있잖아. 거기서도 한 명이 떨어졌었대.”
순간 인부들 사이에 긴장감이 돌았다.
“얼마나 다쳤대? 혹시…….”
“죽진 않았는데 어깨며 다리가 심하게 부러진 모양이야. 딸 하나 있는 것이 학교만 끝나면 그렇게 아버지 병실에 와서 울어 댄다는데 짠해서, 원.”
“그쪽은 어떻게 처리되려나? 보상금은 받게 되나?”
“삼진은 작년에도 건설 현장에서 화재 사고가 있었잖아. 그래서 그런지 보상금 문제가 빨리 처리된 모양이야. 잘됐지, 뭐. 애 엄마가 몇 년 전에 병을 크게 앓았었는데 그것 때문에 끌어다 쓴 빚만 억대였나 봐. 딸내미한테는 빚 안 물려주려고 아주 죽도록 일했나 보더라고.”
“혹시나 죽고 나면 보상금 액수가 더 커지니까 미리 합의한 걸 수도 있지.”
누군가 힘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인부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부분 사정이 비슷했다. 착실한 기공들이야 잘만 모으면 남부럽지 않게 산다고도 했지만 잡부들의 경우는 달랐다. 매일 먹고사는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근데 요즘 왜 이렇게 사고가 많대. 나 알던 놈도 지지난달에 현장에서 자재 나르다가 미끄러졌거든. 그 왜, 천안에서 같이 일했다던, 고량주를 앉은 자리에서 세 병 마신다던 놈 말이야.”
“아니, 그분은 또 어쩌다 그러셨대.”
“왜 꼭 이런 사고는 사정이 딱한 놈들한테만 일어나는지. 그놈도 진짜 어지간히 안되게 살던 놈이었거든. 고향 친구 놈 보증 섰다가 빚만 옴팡 뒤집어쓰고, 마누라랑 자식새끼 어떻게든 먹여 살리겠다고……, 쯧쯧.”
한 발짝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범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만수는 누군가 자신을 밀었다고 했다. 의식은 찾았고 수술 경과도 양호해서 큰 문제가 없는데도 동료들의 문병을 거절하는 걸 보면, 자기를 민 사람이 그들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부들 사이에 섞여 지내며 관찰해 본 결과 딱히 정만수에게 원한이 있거나, 돈 문제가 엮인 사람은 없어 보였다.
최근에 그와 다퉜다는 사람도 없다. 도박판의 아수라장을 겪어서 그런지 정만수는 일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을 두려 하지 않았다. 성격이 무던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그를 나쁘게 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왜 밀었을까.
내내 그런 생각만 하고 있던 범진의 귀에 자꾸만 ‘빚’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비슷한 시기에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현장에서 사고가 연이어 일어난 것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가 하필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우연일 가능성보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대강 땀에 젖은 머리를 털어 낸 범진이 계단 쪽으로 향하자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김 씨, 가게?”
“퇴근해야죠. 내일 뵙겠습니다.”
“저 깡패는 어떡하려고…….”
누군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범진은 개의치 않고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