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48화 (48/86)

<48화>

공사 현장이 아닌 곳을 향해 있는 그녀의 카메라를 본 사무장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준영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자재 보관 상태를 좀 보느라. 김용재 주무관은요? 약속 잡았어요?”

“아, 그게 아직, 이번 주에는 좀 바쁘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저랑 한번 자리를 가졌으니까 너무 자주 만나는 건 사람들 눈치도 있고.”

“정만수 씨는요.”

범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준영은 비로소 카메라를 내린 뒤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그녀의 표정에 사무장이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주변 눈치를 살피고는 속삭였다.

“아직 불안정한 상태라 보호자가 면회는 안 되겠다고 했답니다. 보호자 신경이 보통 예민한 게 아닌 모양이에요. 감독 말을 들어 보니까 저기 동료들도 찾아갔다가 얼굴 못 보고 돌아오고 그랬다더라고요.”

“정만수 씨랑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누군데요?”

“뭐, 그래 봐야 일 끝나고 소주나 한잔하면서 어울리는 정도라 고만고만해요. 김 목수나 최 반장이랑 같이 퇴근하는 건 몇 번 봤습니다.”

“최 반장이라면, 최영복 씨요?”

사무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정만수야 사실 상황도 그렇고, 회사에서 보상금 문제 결론 난 다음에나 찾아가면 되겠죠.”

“보호자 전화번호 있어요?”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휴대폰을 꺼내며 묻자 사무장이 눈을 끔벅인다. 준영도 그를 따라 눈을 끔벅이는 시늉을 하자 겸연쩍은 표정을 지은 사무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전화해 봐야 안 좋은 소리만 듣고 못 만날 거라니까요.”

“만나면 내일 점심은 탕수육 사 주세요.”

손을 까닥이자 어이없다는 듯 픽 웃은 사무장이 번호를 부른다. 준영이 통화 버튼을 누르며 몸을 돌렸다. 덜 지어진 외벽 너머로 뜨뜻한 바람이 불어 들었다.

-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한경 리스크관리팀의 윤준영이라고 합니다. 새로 정만수 씨 보상금 문제를 담당하게 돼서 연락드렸어요.”

- 겨, 결정이 났나요?

지쳐 있는 것 같던 여자의 목소리에 일순 생기가 돌았다. 눈썹을 까닥인 준영이 주의 깊게 입을 열었다.

“아직입니다. 몇 가지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시가 내려와서요. 병원으로 찾아뵈어도 될까요?”

- 추가 조사가 뭐가 필요하죠? 우리 남편은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됐어요! 이게 다 당신들이 제대로 안전장치를 안 해 놓은 탓이잖아!

쩌렁쩌렁한 여자의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지만 준영의 표정은 담담했다.

“영구적인 장애는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물론 재활에는 큰돈이 들겠지만요.”

준영의 말에 사무장이 들으라는 듯 큰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부라리는 그를 멀뚱히 보고 있자 여자가 이를 갈며 외쳤다.

- 당신들은 아무렇지도 않지? 남들 다리가 부러지든 머리통이 깨지든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그저 돈 안 줄 생각만 하는 거잖아. 다시는 전화하지 말아요!

“제가 전화를 하지 않으면 돈 얘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지선 씨.”

확실히 여자는 과하게 예민한 상태처럼 느껴졌지만 자세한 것은 얼굴을 봐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칠게 숨을 들이쉰 여자가 침묵하는 틈을 타 준영이 천천히 말했다.

“사고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 보려는 것뿐입니다. 저는 보고서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적을 의무가 있거든요. 현 상황으로 봤을 때 제대로 된 안전장치가 되어 있었더라면 정만수 씨의 부상이 이렇게 크지 않았을 거라는 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에요.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유려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사무장이 눈을 둥그렇게 뜬다. 준영은 여자의 숨소리가 잦아드는 것을 들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곧이어 허락이 떨어졌다.

“그럼 한 시간 뒤에 찾아뵐게요. 몇 호실이죠?”

입 모양으로 탕수육, 을 만들어 보이자 사무장이 입을 딱 벌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준영은 소리 없이 숨을 길게 들이마시며 하늘을 보았다. 날이 더웠다.

* * *

병원 특유의 공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에어컨이 만들어 낸 서늘한 공기는 반가웠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준영은 이지선이 말해 준 병실에 들어섰다.

회사에서 비용을 대 주고 있는 1인실이었다. 수술 후 이동한 곳은 6인실이었지만 언론을 신경 쓴 회사가 병실을 옮겨 주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의 이지선은 초췌했다. 풍기는 분위기가 그랬다.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서도 왜인지 시선을 똑바로 마주쳐 오지는 않았다. 죄다 물어뜯어 반밖에 남지 않은 그녀의 엄지손톱에서 눈을 들며 준영이 말했다.

“보호자분이 계시면 세 시간, 안 계시면 30분이면 끝날 것 같은데 잠깐 산책이라도 다녀오시겠어요?”

“우리 양반한테 무, 무슨 말을 하려고…….”

“회사 기밀 사항을 몇 개 언급해야 하는데 원칙적으로는 외부인 유출 금지라서요. 그 언급을 피해 가면서 우회적으로 질문을 하려면 시간이 그만큼 걸릴 겁니다. 이참에 커피라도 한잔하고 오세요. 빨리 끝내겠습니다.”

차분하게 말하자 이지선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을 흘끔거리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저렇게 불안해하니 멀리 가진 않을 것이다.

준영은 침대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부인에게 말을 들었는지 정만수가 고개를 돌렸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완고한 얼굴이 퉁퉁 부어 있다. 깡마른 몸과는 퍽이나 대비되는 모습이다. 준영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명함을 내밀었다.

“한경에서 온 윤준영입니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피곤하니 안부 인사 같은 건 집어치워요.”

걸걸한 목소리에 준영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바였다. 그녀는 충분히 목소리를 낮춘 채 조용히 말했다.

“짐작하고 계실지 모르지만 행정 처분은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회사에서는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어요.”

“뭐, 뭐라고요?”

시큰둥하던 정만수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준영은 그의 표정을 똑바로 마주하며 덧붙였다.

“보상금이 아닌 단순한 위로금이 될 경우 금액은 아주 적어집니다. 10분의 1도 안 되겠죠. 차후 재활에 들어가는 비용과 생활 지원금도 물론 지급되지 않을 것이고요.”

“당신 그게 무슨 소리……!”

“빚이 얼마나 있으세요?”

준영은 정만수가 그대로 정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숨도 내쉬지 못하는 그의 부은 얼굴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준영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동료분들 면회는 왜 거절하세요? 다들 정만수 씨 걱정을 많이 하고 있던데. 부인분도 지치신 거 같은데 이럴 때 신세도 좀 지고 하시면 좋잖아요. 그게 사람 사는 거고. 간호사 말로는 따님은 처음 수술할 때 말고는 얼굴도 안 비추고, 부인분은 밤낮으로 병실을 지키고 있다고 하던데요.”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는 링거 줄이 흔들린다. 정만수의 손이 떨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준영은 몸을 조금 더 낮춘 채 나직하게 말했다.

“보상금을 못 받게 될 미래도 대비하셔야죠. 이지선 씨까지 하던 일을 그만두면,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시려고요.”

“당신 뭐 하러 온 사람이야?”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진 정만수가 버럭 소리쳤다. 눈이 커다랗게 벌어져 있었다.

“우리 딸은 피아노 대회를 앞두고 있어서 안 오는 거고, 우리 집 생계야 당신이 걱정할 일 아니고! 안전망만 있었어도 내가 몇 년을 놀게 될 일 같은 건 없었어. 그건 사실이잖아! 무슨 쥐새끼라도 되는 것처럼 남의 집 빚이 어쩌고를 왜 따지…….”

“물론 그렇죠. 하지만 저는 정만수 씨가 추락한 이후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서요.”

“뭐, 뭐가 어째?”

당황한 정만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준영이 말했다.

“그건 명백해서 더 따질 것이 없으니까요. 제가 알고 싶은 건 정만수 씨가 어쩌다 추락했는지, 입니다.”

흥분한 사람의 표정을 읽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쉽다. 이미 평정이 깨져서 솟구치는 감정을 좀처럼 감추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벽을 꽁꽁 닫아걸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사람을 사흘 밤낮 붙잡는 것보다 망치로 냅다 내려치는 편이 알아낼 수 있는 게 훨씬 많았다.

산만하게 만들고, 정신없이 뒤흔들어야 한다.

특히나 이렇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정만수의 울대가 크게 꿀렁인다. 거칠게 숨을 내뱉는 탓에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준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아무래도 다들 살기가 힘들다 보니 보상금을 노리고 안전사고를 위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요.”

눈을 홉뜬 정만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가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였다.

“내, 내가 내 발로 뛰어내렸다고?”

“아니라는 증거가 있을까요?”

준영은 말을 잇지 못하는 정만수를 가만히 응시했다. 상대를 화나게 하거나 자극하는 것은 본성에서 비롯된 그녀의 주특기다. 하지만 정만수에게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를 향한 화나 억울함보다 앞선 것. 그것은 마치 공포심처럼 보였다.

뭘 두려워하는 거지? 생계에 대한 걱정?

……그걸 걱정하는 사람이 부인이 일을 포기하고 자기 옆에 24시간 버티고 있는 것을 용인했다고? 회사에서 제안한 간병인도 거부하고?

그리고 정말로 본인 실수가 없다면, 이 모든 것이 회사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만수도 이지선도 제 앞에서 당당해야 했다.

회사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한다고 생각해서 짜증이나 화를 낼 수는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떳떳하게 따지며 저를 물어뜯을 듯이 달려드는 게 당연한 그림이다. 그런데.

생각을 굴리던 준영은 갑자기 확 끼얹어지는 물에 놀라 하마터면 의자에서 넘어질 뻔했다. 휘청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고 얼굴을 쓸어내리며 겨우 눈을 뜨자 씩씩대고 있는 이지선이 보인다. 그녀의 손에는 빈 세숫대야가 들려 있었다.

“나가, 이 미친년아. 당장 나가라고! 돈에 눈이 먼 악마들. 사지 온전치 못한 사람 앞에서 뭐가 어째? 사람으로서 할 말, 안 할 말이라는 게 있는 거야!”

준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자마자 비에 젖더니 또 물이네. 이번 출장은 아무래도 물과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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