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47화 (47/86)

<47화>

삼두는 동네 후미진 골목에 있는 손바닥만 한 사채업 사무소에서 문지기 역할을 하다 중복 채무자에 대한 이권 다툼으로 찾아온 범진을 처음 만났다.

그들 사이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그러나 삼두는 의자와 재떨이가 날아다니는 난리통 속에서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여 저희 쪽 우두머리의 목을 움켜쥔 범진에게 매료되었다.

비록 그날은 그에게 얻어터져 바닥을 뒹굴었지만 말이다.

사실 회사에서 몸을 쓰는 일을 맡은 팀은 따로 있어서 범진이 직접 나서는 것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런데 귀찮은 걸 싫어하는 그는 혈혈단신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졸졸 쫓아다니다 보면 얻어걸릴 때가 있곤 했다.

“이제 됐으니까 가라. 회장님 내려오려고 하면 네가 막아.”

범진이 손을 휘휘 내젓자 삼두가 눈을 부릅떴다.

“아니, 형님. 저는 못 가죠. 이제 내려왔는데 제가 어딜 갑니까. 회장님도 여기 있으라고 하셨고요.”

“네가 언제부터 회장님 말을 그렇게 잘 들었어? 회장님이고 나라님이고 내 말이 우선이라더니.”

비딱하게 트집을 잡자 입술을 달싹이던 삼두가 의외로 굽히지 않고 대꾸했다.

“맞습니다. 형님 말이 최우선입니다. 하지만 형님 안전 문제에 있어서는 저는 무조건 회장님 편입니다.”

기가 막혀 범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위험할 일이 없어.”

“압니다. 저는 그냥 휴가 받아서 여기 왔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휴가를 왜 내 옆에서…….”

한 대 얻어맞더라도 비킬 수 없다는 듯 비장하기까지 한 삼두의 얼굴에 범진은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우직한 삼두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서울에 별일이 생기지 않는 한 삼두는 못 박힌 장승처럼 여기 있을 것이었다.

삼두의 하찮은 연기력으로 미루어 봤을 때 어떻게 속이든 눈치가 비상한 윤준영은 그들의 관계를 알아채고도 남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즉,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결국은 알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일까.

범진은 어둠 속을 바라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발긋하게 열이 오른 얼굴로 제게 다가오며 중얼거리던 준영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돌았다.

‘필요하다면, 내 남자 해 줄 거야?’

……이제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못하겠지.

뻣뻣하게 쥔 주먹을 내려다보던 범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집에 가 있어. 할머니가 물어보면 사촌 동생이라고 둘러대고.”

“사, 사촌 동생요? 형님은 지금 안 가십니까?”

별것도 아닌 단어에 들뜬 표정을 지으며 삼두가 묻는다. 범진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난 아침에나 들어갈 거다.”

“예. 그런데 응급실에는 누가 있는 겁니까?”

“윤준영이라는 여자. 같은 집에 산다.”

그가 덤덤하게 내뱉은 말을 이해하려는 듯 눈을 끔벅이던 삼두의 입이 순간 딱 벌어졌다.

“혀, 혀, 형님. 여자요? 형님 여자요?”

“한경에서 나온 박형준 후임.”

망상의 싹을 자르듯 다소 냉랭하게 흘러나온 범진의 목소리에 아, 하고 삼두가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범진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하나 알아 둬야 할 게 있어.”

“뭐든 말씀하십시오.”

“그 여자가 뭘 묻든 상대하지 마. 안 보이는 사람처럼 무시해. 차라리 말을 못 하는 척을 하든가.”

어차피 오래 못 가겠지만.

뒷말은 하지 않았다. 시작부터 의욕을 꺾을 필요는 없으니까.

삼두는 그를 향해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형님 일에 절대 방해되지 않겠습니다.”

“방해되는 순간 서울행이다.”

“예.”

손짓을 하자 이번에는 순순히 돌아섰다. 차로 서둘러 달려가는 삼두의 뒷모습에서 눈을 뗀 범진은 고개를 젖혀 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한창 밝은 시간이었다.

* * *

준영은 눈을 반짝 떴다. 조금 피로감이 남아 있었지만 기분만은 묘하게 상쾌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인 뒤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누런 벽지가 그녀를 반겼다. 날이 밝은 모양이었다.

재밌네. 눈을 뜰 때마다 장소가 다르다니.

헛웃음을 흘리며 준영은 퉁퉁 부은 듯한 눈을 꾹꾹 눌렀다. 머릿속에 조각난 기억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마지막 기억은 허공에 붕 뜨는 듯한 느낌과 함께 아래로 축 늘어지던 제 팔의 감각이었다.

“……업은 게 아니라 안고 온 거였어?”

괜스레 실소가 입가를 맴돈다. 응급실에서 범진과 나눴던 모든 대화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누구에게도 해 본 적도, 해 볼 생각도 안 했던 이야기가 고작 다시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권범진 앞에서는 그렇게나 술술 나오다니.

목덜미가 간지러운 듯한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떤 준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구석에 얌전히 놓인 가방을 포착한 그녀가 재빨리 그 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보통 이럴 때는 간밤에 왔을 업무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일 때가 많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꺼지기 직전까지 간 휴대폰에 충전 케이블을 꽂으며 사진을 확인하던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왜 없지? 분명히 찍었는데?”

이 바보 같은 휴대폰은 사진을 찍은 뒤 약간의 시간을 주지 않으면 제대로 저장이 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어제 혹시나 범진이 휴대폰을 달라고 할까 봐 찍자마자 냅다 창을 끈 뒤 깔아뭉갰던 게 기억났다.

아오, 하고 발을 구르던 준영은 은은한 통증이 느껴지는 무릎을 감싸 안았다. 무고한 벽지만 노려보다가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두고 봐. 기어코 남기고 말 테니까.”

핑계라면 얼마든지 있다. 실제로 보고서에 첨부하려면 현장 사진을 찍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 보면 인부 몇 명쯤은 당연히 카메라에 찍히기 마련 아니겠는가.

허공을 향해 비딱하게 웃어 보인 준영은 문득 문밖에서 들리는 남자 목소리에 얼른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지런히 빗어 넘겼다.

일어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열어젖힌 그녀는 순간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멈춰 섰다. 하얀 셔츠 소매를 걷어 입은 남자의 덩치는 실로 우람했다. 그가 낑낑대며 푸근함의 상징인 장독을 옮기고 있지 않았다면 상당히 긴장했을 만한 외모였다.

기분 탓일까. 얼떨떨한 표정의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곧장 고개를 돌렸다. 준영은 부엌 쪽에서 물컵을 들고 나오는 할머니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하이고, 고맙네, 고마워요. 간장 퍼 오기가 훨씬 편해지겠어.”

할머니의 함박웃음에도 남자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물을 들이켤 뿐이었다. 준영을 발견한 할머니가 손을 흔들었다.

“아가씨도 일어났네. 누룽지 금방 돼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머니를 향해 인사를 하면서도 준영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가느다란 눈매 안의 눈동자가 그녀의 눈길을 피해 이리저리 굴러간다. 준영은 빙긋 웃으며 마루에 앉아 신발을 신었다.

“김 씨 일행인가 봐요?”

단박에 나온 말에 남자가 움찔한다. 할머니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사촌 동생이라네. 근처에 볼일이 있어 들렀는데 며칠 형이랑 좀 머물겠다고 해서 내가 그러라고 했어요. 어차피 방도 남고.”

“사촌 동생요?”

살갑게 입꼬리를 한껏 올린 준영은 남자의 앞으로 절뚝이며 다가갔다. 저를 피하려는 것처럼 몸을 비트는 그를 향해 준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김 씨랑 동갑이니까 나한테도 동생이겠네. 근데 어느 쪽 사촌이에요? 외가? 친가? 얼굴이 김 씨랑 많이 닮았네.”

어쩐지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묵직한 헛기침을 한 남자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코앞까지 다가간 준영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자 눈동자의 동요가 심해진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은 채 작게 속삭였다.

“내가 권범진이랑 어떤 사인지는 아나?”

“어떻게 우리 형님을……!”

눈을 홉뜬 채 중얼거리던 남자가 뒤늦게 입을 앙다물었다. 힘을 쓰느라 불그스름해져 있던 뺨을 타고 땀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름이 어떻게 돼요?”

“박삼…… 아닙니다.”

“이름이 특이하네. 박삼아닙니다?”

조곤조곤 되물으며 준영이 웃자 남자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팔짱을 낀 그녀는 먼발치에 있는 할머니를 곁눈질하며 나직하게 물었다.

“왜요. 권범진이 나한테 이름도 말하지 말래요?”

그 속내를 알아보려면 적어도 서너 단계는 거쳐야 하는 사람들 틈에서 살다 보니 이런 반응이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눈만 부릅뜬 남자는 땅을 파 버릴 것처럼 쏘아보고 있었다. 억지로 꽉 다물고 있는 입술이 파들거리고 있었다.

뭐부터 건드려 볼까, 생각하던 준영은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아쉽게 고개를 돌렸다. 구세주라도 발견한 것처럼 남자가 안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본다.

목에 수건을 걸고 나온 범진이 그들을 보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준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김 씨. 사촌 동생분이랑 인사는 먼저 했어요.”

범진의 무감한 눈길이 스치자 남자가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웃음을 참으며 준영은 손을 까닥였다.

“그리고 어제 진 신세는 조만간 갚을게요. 시간만 내준다면.”

“됐습니다.”

무뚝뚝한 대꾸와 함께 방으로 사라지는 범진을 남자가 종종걸음으로 쫓는다. 저 반응으로 봐서 자세한 얘기는 해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디서 튀어나온 사촌 동생인지는 모르지만 권범진보다는 상대하기 쉬울 것 같으니 잘됐네.

어깨를 으쓱인 준영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구름 하나 없는 하늘을 보아하니 오늘도 더울 것 같았다.

* * *

“지적받은 곳은 지금 보시는 서류에 있는 바와 같이…….”

안전모를 쓴 사무장이 설계도를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준영은 이미 대강 파악하고 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적은 내부 분위기를 파악하고 사진을 찍는 것이었으니까.

영복은 사무장과 계단을 올라가는 그녀를 굳이 막지 않았다. 인부들은 내부를 돌아다니는 그녀를 의식했는지 딱히 일에 관련된 것 말고는 사담도 나누지 않았다.

카메라로 적당히 현장 사진을 담던 그녀의 눈에 1층에 있는 범진이 포착되었다. 줌을 한껏 당기자 잠시 안전모를 벗고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 내는 그가 보인다. 마음껏 셔터를 누르는 준영의 입가가 꿈틀거리며 올라갔다.

“이상이 지금 우선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됩……, 윤 대리님? 어딜 그렇게 찍고 계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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