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46화 (46/86)

<46화>

“기억나? 우리 엄마 모텔에서 일했던 거. 쓰러졌을 때 통장에 있던 돈이 190만 원이더라. 언제 만든 건지 내 명의로 된 통장이었어. 가끔 생각해. 그거에 발목 잡혀서 그 몇십 배를 갚고 있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에 대해서.”

“……윤준영.”

“알아. 이건 내 두려움의 대가라는 거. 그런 엄마라도, 사라져 버리면 너무 무서울 것 같았거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아는 사람이 세상에 한 명도 없게 된다는 것은 마치 늪처럼 느껴졌다. 나 역시 사라져 버려도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세상에 대한 허무함.

엄마가 살아서 숨을 쉬게 만드는 것은 곧 제 생에 대한 의지나 마찬가지였다. 준영에게는 그랬다.

나 참, 사람이 아파서 누워 있으니까 별소리를 다 하게 되네. 이러다 잘못하면 울기까지 하겠어. 엄마 얘기 할 사람 만나서 아주 신났지, 윤준영.

스스로를 향해 냉소를 흘리며 연신 링거 줄을 흔들던 준영은 문득 범진이 일어서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위에서 덮듯이 몸을 낮춘 범진이 퍼덕이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이불 속으로 넣어 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이 아닌 얼굴에 훅 끼치는 것 같아 준영은 눈을 깜빡였다. 듣기 좋은 범진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귀를 울렸다.

“좀 자라.”

“어디 가는데?”

“어디 안 가.”

이불을 그녀의 턱 끝까지 당겨 준 범진이 다시 의자에 앉는다. 그를 계속 쳐다보고 있자 팔짱을 낀 범진이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뱉었다.

“눈 감아. 네가 자야 나도 자니까.”

이건 완전히 권범진으로서 하는 말이다. 지금의 권범진도, 김 씨도 아닌 제가 알던 권범진이 하는 말.

가슴 한구석이 괜히 덜컹거리는 것 같아 준영은 얌전히 눈을 감았다. 착각일까. 뺨과 눈언저리에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듯한 시선이.

꼭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철없는 말을 해도 당연히 받아 주는 보호자가 옆에 있는 어린아이. 그 든든함을 당연하게 등에 업고 있는 어린아이.

권범진.

나 밀어내지 마.

이렇게 만났는데 너 놓치면, 정말 많이 후회할 것 같거든.

“그래서 김용재 주무관은 어떤…….”

“자라고 했다.”

입술을 달싹이자 범진이 대번에 으르렁거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 느껴진다. 준영은 킥킥대며 꼭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 홀가분하면서도 떨리고, 어딘지 애틋한 감정 속에서 그녀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 * *

규칙적인 숨소리마저 잦아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범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준영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안색이 아직도 좋진 않았다. 돌이켜 보면 예전에도 윤준영은 한계까지 버텨 내는 미련한 구석이 있었다. 중간에 쉬거나 주저앉았다가 다음 기회를 노리느니 지금 심장이 터지더라도 달리는 타입이었다.

제 몸 상하는 것도 모르고.

색이 바래 하얗게 갈라진 입술을 바라보던 범진이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 침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준영이 뒤척인 탓에 엉덩이 아래 감춰 두었던 휴대폰이 비죽 나와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그녀를 집에 데려다 놓고 제 휴대폰을 찾으러 가 볼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그는 매끄러운 손놀림으로 준영의 휴대폰을 꺼냈다.

다행히 생체 인식이다. 준영의 엄지를 화면에 꾹 누르자 잠금이 풀렸다. 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을 확인해 본 범진의 잇새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가 거기 있었다.

거짓말이 늘었네, 윤준영.

사진을 지운 그는 외우고 있는 번호 하나를 누르며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새벽 특유의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오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누구야?

“나다.”

- 나가 누군데 이런 시간에 전화질을 하고 지랄…….

“후회할 말 거기까지만 해라.”

무심하게 내뱉자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이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혀, 형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되신 거예요?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지금 어디신데요?

“내 휴대폰 위치 추적 좀 해 봐. 길에 흘렸다.”

자판기 앞에 걸음을 멈추었을 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 형님 휴대폰 제가 찾았습니다. 전화해 보니 경찰이 받더라고요. 이런 일로 경찰서 가 본 건 또 처음…….

그의 말에 범진이 미간을 좁혔다.

“너 여기 내려왔냐?”

- 예. 세 시간 됐습니다. 아침에 바로 와 보려고 했는데 회장님이 상봉빌딩 좀 다녀오라고 하셔서 늦었습니다.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범진은 자판기를 톡 튕겼다. 삼두는 그에 대한 충성심이 좀 지나친 구석이 있었다.

“지금 어딘데.”

- 형님 머무시는 집 근처에 차 대고 있습니다. 앞에 형님 차가 없어서 아침 되면 현장에 가서 물어볼까 하고…….

“가서 권범진 아는 사람 있냐고 물어보려고?”

떠보듯 말꼬리를 올리자 억울하다는 듯 삼두가 씩씩거렸다.

- 아, 형님, 제가 그렇게까지 빡대가리는 아니죠. 당연히 김 씨 아냐고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왜 찾냐고 물어보면.”

- 그 양반이 나한테 갚을 게 좀 있어서 일 잘하고 있는지 보려고 왔다. 형님이 알려 주셨잖습니까. 저 토씨 하나 안 빼먹고 다 외우고 있다고요.

흠, 하고 범진은 고개를 주억였다. 삼두는 머리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충분히 성실했다.

“휴대폰 들고 지금 혜명병원 응급실로 와.”

- 형님 설마 어디 다치셨습니까?

대번에 높아지는 음성에 휴대폰을 잠시 귀에서 뗀 범진이 짧게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아는 사람 따라온 거야.”

- 예. 당장 가겠습니다. 이 번호로 전화드리면 됩니까? 이 번호는 누구 번혼데요?

“잠깐 빌렸어. 끊는다.”

종료 버튼을 누른 범진은 통화 목록에 있는 내역을 삭제했다. 휴대폰을 다시 모로 누운 준영의 등 뒤에 놔두고 밖으로 나오자 몇 분 지나지 않아 총알처럼 차 한 대가 병원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어지간히 밟은 모양이었다.

“형님!”

흡사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던 가족을 어렵게 만난 사람 같은 외침에 막 응급실에서 나오던 사람 하나가 이쪽을 흘끔거린다. 그나마 새벽 시간이라 오가는 사람이 적은 걸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마치 무언가를 예견한 것처럼 부모님이 지어 주신 본명이 삼두인 그는 키는 범진보다 작았지만 온몸이 근육 덩어리였다. 회사의 규칙에 따라 늘 깔끔한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고 다녔으나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달려오는 움직임은 조금도 둔하지 않다. 빠르게 저를 위아래로 확인하는 삼두를 보며 범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동네에 건달 하나 나타났다고 신고 들어가겠다.”

그의 지적에 아, 하고 목덜미를 긁적인 삼두가 더듬더듬 말했다.

“서, 선배님.”

“휴대폰.”

범진의 사지가 멀쩡한 것을 확인한 삼두가 휴대폰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밀린 메시지와 이메일을 확인하며 범진이 입을 열었다.

“하루 연락 안 된다고 뭘 여기까지 내려와.”

“형님이 어디, 아니, 선배님이 어디 그러신 적이 있어야 말이죠. 거기다 통화 중에 갑자기 끊겼는데 제가 어디 제정신이었겠습니까? 거기다 휴대폰은 주인 없이 경찰서에 들어가 있고. 그래도 우리나라 아직 살 만하네요. 길거리에 떨어뜨린 휴대폰을 고이 경찰서에 가져다주고 말입니다.”

“상봉빌딩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대로 경매에 넘기는 게 나을지, 세입자 끌어안고 계속 가는 게 나을지 회장님도 결정을 아직 못 내리신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형, 아니, 선배님 보러 한번 내려와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서울 안 오신 지 꽤 되셨으니까요.”

“다들 내가 여기 놀러 온 줄 아나? 구경 오는 거야, 뭐야.”

낮게 신음하며 범진이 혀를 찼다. 삼두가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지난번에 그런 일도 있고 했으니 회장님도 걱정이 되시는 거겠죠. 급한 일 없으면 저더러 선배님, 아니, 형님, 아아니, 선배님 옆에 가 있으라고 하시던데요.”

이쯤 되면 차라리 그냥 멋대로 부르라고 하는 게 나을 판이다. 가늘게 뜬 눈으로 삼두를 쳐다보자 그는 덩치에 안 어울리는 주눅 든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넣으며 범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돈은 웃으며 빌려도 웃으며 갚는 사람은 없다. 돈 나올 구멍이 없는 케이스야 각오하고 시작하는 편이지만, 더 성가신 것은 있는데 감추는 놈들이다. 영악하고, 교묘하게.

재작년에 회사는 어느 중소기업 사장과 대부 계약을 체결했다. 1년에 이자만 수천만 원 정도에 최소 5년은 유지가 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짭짤한 계약이었다. 일반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거부당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돈세탁을 위한 계약이었기 때문에 위험 부담은 적어 보였다.

1년은 괜찮았다. 하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과 신제품의 개발 실패로 사업은 한순간에 기울었다.

늘 그렇지만 이런 일은 항상 돈을 받아 내려는 자와 그것을 회피하려는 자의 싸움으로 귀결된다. 해외 도피를 준비하던 사장을 끈질기게 추적한 것은 범진이었다.

결국 배를 타기 전 빚을 갚겠다는 연락이 왔고, 범진은 효율성과 스스로에 대한 과신으로 혼자 그곳에 찾아갔다. 설마하니 흉기를 소지한 열댓 명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물론 가는 길에 통화를 한 삼두가 지극한 충성심으로 득달같이 쫓아오지 않았더라도 그의 사지는 비교적 멀쩡했을 것이다. 칼과 각목을 어떤 식으로 휘둘러야 가장 치명적인지를 알지 못하고 힘으로 허우적대는 자들은 애초에 범진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을 상대하는 사이 사장은 놓쳤을 수도 있었다. 사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삼두가 시간을 벌어 준 덕이었다.

범진에게 목덜미를 잡혀 배 밖으로 질질 끌려 나온 사장은 피칠갑을 한 범진을 앞에 두고 머리를 조아렸다. 돈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전액 회수되었다.

현장을 직접 본 삼두는 아직도 술자리에서 가끔 그때 얘기를 하며 눈을 빛내곤 했다. 원래가 범진에게 반해 회사에 들어오게 됐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에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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