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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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꾸는 꿈은 아니다. 깨어나 생각해 보면 그렇게 좋기만 한 시절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꿈속에서만큼은 더없이 찬란하고 따스하게 느껴지곤 했다.
나무 그늘에 앉아 발목에 쏟아지고 있는 햇살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면 범진이 앉아 있다. 아까부터 들고 있는 샌드위치는 좀처럼 줄지 않고 있었다.
헝클어진 까만 머리칼에 까만 티셔츠. 뒤로 비스듬히 반쯤 누워 있는 그는 사냥 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맹수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널따랗게 각진 어깨와 탄탄한 근육이 붙어 있는 팔은 늘 그렇듯 강인해 보였지만 준영은 그가 제게 충분한 응달을 양보하기 위해 완전한 햇살 아래 누워 있음을 알고 있었다.
뜨겁지도 않나. 가뜩이나 까만 옷이면서.
마지막 남은 샌드위치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준영은 피식 웃었다. 권범진은 이런 걸 절대 말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의 배려를 눈치채지 못하고 흘려 넘기기 쉬웠다.
그렇다고 생색도 내지 않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그녀는 그저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었다.
‘안 먹을 거면 나 줘.’
낮 시간에 바깥에서 집을 바라보는 것은 퍽 신선한 일이었다. 그게 마음에 드는 듯 감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도 없이 집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범진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눈이 부신지 미간을 좁힌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 배에 이게 다 들어가냐?’
‘나야 없어서 못 먹지.’
‘새로 만들어 먹어. 이건 먹던 거잖아.’
‘우리 그런 거 초월한 사이 아니야? 라면도 맨날 같이 먹는데, 뭐.’
태연하게 어깃장을 놓자 범진이 짧게 한숨을 내쉰다.
‘그건 덜어 먹잖아.’
‘그럼 한 입만 주든가.’
옆으로 엉덩이를 움직이자 햇살이 금세 그녀의 어깨를 데웠다. 준영은 입을 아, 벌렸다. 범진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한 행동이었고, 예상대로 경직된 얼굴을 한 범진은 순식간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으며 먹어 치웠다.
‘야! 단거 싫다며!’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웃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울리지 않게 범진은 종종 귀여울 때가 있었다. 특히 놀라거나 당황할 때 말이다.
매끈한 얼굴을 일그러뜨린 범진이 우유를 한입에 비우고는 일어선다. 준영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디 가?’
‘화장실.’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흘끗 돌아보며 범진이 묻는다.
‘하나 더 먹을 거야?’
‘응. 잼 많이. 햄도 많이. 치즈도.’
끝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주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범진이 집으로 들어간다. 그 뒷모습을 보며 킥킥대던 준영은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집이 있고, 권범진이 있다.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을 것만 같았다. 우울한 기분에 침잠되지 않고, 먼지 털듯 털어 내 버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들만 있다면 말이다.
오늘만 같아라.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진 않는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나쁜 일도 결국 이런 기분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오늘만 같았으면, 그렇게 빌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있었다.
준영은 짧게 숨을 들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그때와 같은 파란 하늘이 펼쳐질 거라 생각했지만 보이는 것은 삭막한 느낌이 드는 천장이었다. 어디선가 삑, 삑, 하는 규칙적인 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나른하다. 손목에 위화감이 느껴져 고개를 조금 숙이자 링거 줄이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병원이구나.
그 집이 아니었어.
뻑뻑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그녀는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모든 것이 달랐지만, 한 가지 같은 게 있었다. 검은 티셔츠의 권범진이 옆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들었는지 고개를 조금 아래로 떨군 채.
왜인지 웃음보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준영은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길게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 권범진을 마음 편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없다.
많이 변하지 않은 눈매, 기억보다 더 곧고 높아 보이는 콧날과 남성적인 느낌을 풍기는 날렵한 턱.
그러고 보니 오늘은 면도했네. 어제는 턱이 까칠하더니.
가끔 꿈을 꿨지만 시간이 갈수록 범진의 얼굴은 조금씩 흐릿해졌다. 제게 남겨진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것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이러다 우연히 마주치면 못 알아보고 지나갈 수도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곤 했었지만 아니었다. 제게는 그럴 수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사진. 이럴 때 사진이라도 남겨 두자.
내가 네 사진에 한이 맺혔으니까 협조 좀 해, 권범진.
힘겹게 침대를 팔꿈치로 짚으며 몸을 조금 일으킨 준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침대 옆에 놓인 서랍장 위에 가방이 있었다. 안을 뒤적여 휴대폰을 꺼낸 그녀가 카메라를 켰다.
그리고 몸을 돌리는 순간, 범진과 눈이 마주쳤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잠이 덜 깬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준영과 휴대폰을 번갈아 바라보다 물었다.
“뭐 해?”
지금이 아니면 어쨌든 기회는 없다. 잽싸게 촬영 버튼을 누르자 찰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준영은 미간을 좁히는 범진을 보며 얼른 휴대폰을 엉덩이 밑에 끼워 넣었다.
“셀카 찍어.”
“뭘 찍어?”
“병원에 있다는 걸 못 믿는 사람이 있어서.”
되는대로 주워섬겼지만 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심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선뜻 휴대폰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는 범진이 의외였다.
설마 나승운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이럴 땐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게 최고다. 준영은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내가 여기 왜 있어?”
“감기. 과로. 수면 부족. 그리고 기절.”
덤덤하게 대꾸하던 범진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로 잠들었었는지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준영이 몸을 뒤척이며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왔는데?”
“차 타고.”
무성의한 대답에 그녀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 3층에서 쓰러졌잖아. 설마 그 계단을 업고 내려왔어?”
“던졌다.”
범진이 짧게 한숨을 내쉰다. 권범진다운 대답이다. 헛웃음을 흘리며 준영은 아예 베개를 베고 드러누웠다.
“그래도 한 층 내려와서 기절하길 잘했네. 4층보단 3층이 덜 힘들었을 거 아냐.”
“너…….”
짙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언성을 높이려던 범진이 잠시 이를 악물었다. 제법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통 직장인들은 기절해 가면서 일해?”
“응. 내 주변엔 꽤 있어.”
태연하게 긍정하자 범진이 하, 하고 고개를 돌린다. 팽팽하게 당겨진 뺨을 보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준영은 링거 줄이 매달린 손을 까닥였다.
“몇 시야? 이거 얼마나 더 맞아야 돼?”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범진이 불퉁하게 입을 열었다.
“열이 안 떨어져서 두 번째 거 맞는 거야. 1시 다 됐고, 한 시간쯤 더 맞아야 해.”
“먼저 가. 아침에 출근해야 하잖아.”
그녀의 말에 범진의 눈꼬리가 날카로워졌다.
“너는 지금 그게…….”
“안 갈 거 알아. 그냥 해 본 소리야.”
눈을 둥글게 뜬 채 씩 웃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범진이 피곤하다는 듯 얼굴을 짚는다. 긴 한숨 소리를 들으며 눈을 굴리던 준영이 그를 향해 아예 돌아누웠다.
“혹시.”
“입 다물고 차라리 자.”
“정만수 씨도 이 병원에 있어?”
준영은 제게로 향하는 범진의 눈을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말없이 그녀를 직시하던 범진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같은 곳에서 쓰러졌으니까, 같은 병원으로 오지 않았을까 해서.”
순식간에 범진의 눈매에 서늘한 의심이 스치는 것을 본 준영이 에이, 하고 손을 내저었다.
“당연히 일부러 거기서 쓰러진 건 아니고.”
“여기 아니야.”
짤막한 대답에 준영은 콧소리를 냈다.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불쑥 물었다.
“정만수 씨랑 친했어?”
“내가 온 건 그 사람 사고 후라.”
“못 보던 새 오지랖이 많이 늘었네?”
범진의 막힘없는 대꾸에 씩 웃으며 준영이 이어 말했다.
“안면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입원했는지도 다 알고.”
주변의 공기가 긴장감을 머금으며 서서히 조여든다. 이내 범진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안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으니까.”
쳇. 빈틈없는 남자가 됐네, 권범진.
입술을 비죽이며 준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됐어. 어차피 만나러 갈 거거든. 아, 혹시 김용재 주무관에 대해 아는 거 있으면 귀띔 좀 해 줘. 두 번 만날 일 없게 한 번에 끝내고 싶어서. 느낌이 별로야, 그 사람.”
대답이 없다. 준영은 팔짱을 낀 채 저를 멀뚱히 내려다보고 있는 범진을 향해 눈썹을 들썩였다.
“왜 그렇게 봐?”
“네 손에 지금 뭐가 달려 있는지 잊었냐.”
“뭐가 달려 있는데? 내 운명?”
“링거 줄.”
재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단박에 무시당한 준영이 불만스럽게 손목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을 따라 링거 줄이 이리저리 휘청인다. 범진이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일하면 무슨 보너스라도 받아?”
“응. 아주 두둑이.”
“그게 네 몸만큼 중요하고?”
“모르겠어, 그건.”
산만하게 움직이는 링거 줄을 찌푸린 눈으로 지켜보던 범진이 막 입을 열려는데 준영이 먼저 중얼거렸다.
“내 건강이 우선인지, 엄마 생명줄이 우선인지.”
말할 필요 없다. 쓸데없는 말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권범진이 경고한 ‘성가시게 구는 것’에 포함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기회를 얻은 입술은 멈추지 않았다.
“너라면 같이 웃을 수 있겠다. 내가 우리 엄마 호흡기 붙여 놓으려고 기절까지 하며 일하고 있는 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지. 넌 알잖아. 엄마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말이야.”
피식 웃음을 흘리며 준영은 범진을 마주 보았다. 놀랐는지 딱딱한 표정을 지은 그는 아쉽게도 웃어 주지 않았다. 괜히 어색해진 준영이 또다시 링거 줄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