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44화 (44/86)

<44화>

“그러니까 그건 진즉 처분했었어야지. 이 모양이 될 때까지 뭐 하고 있었던 거야? 한 팀장 뭐 하는 사람이지? 일을 왜 이런 식으로 해?”

미향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파일을 들고 곁에 서 있던 김 실장이 고개를 숙였다. 거실에 서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다음 주주총회까지 얼마 안 남았어. 그때까지 지분 늘려야 한다고 충고한 사람이 누구야? 이성철 이사 건강 상태 어떤데? ……이번에는 그렇다 쳐도 다음 총회 때 사임하게 만들어야 해. 그래야 승운이를 그 자리에 올리지.”

미간을 짚은 미향의 손짓을 본 김 실장이 얼른 부엌으로 걸어갔다. 진열장에서 폴란드산 보드카를 꺼낸 뒤 물과 물컵, 빈 통을 챙겨 돌아섰다. 미향은 골치 아플 땐 늘 이 보드카를 마시고 입을 헹구곤 했다.

“최대한 빨리 자금 문제 해결해요. 또 멍청하게 은행권에 쫓아가서 이리저리 정보나 흘리지 말고 은밀한 방법을 찾아보란 말이야. 한 팀장에게 월급 주는 이유 그거 하나니까.”

싸늘하게 말을 내뱉은 미향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김 실장이 말없이 보드카 잔을 내밀었다.

“하나같이 일들을 왜 이렇게 멍청하게 하는지 모르겠네. 빌딩 처분 건은 어떻게 됐어?”

“차명으로 매입했던 건이라 무리 없이 처리했습니다.”

“기다릴 거 없이 바로 주식 매수해.”

“네.”

미향은 보드카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독한 향을 깊이 들이마신 뒤 물로 입을 헹구고 나서야 그녀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여전히 그녀의 남편은 홍인섭 사장을 밀어내지 못했다. 게다가 작년에 책임지고 추진했던 프로젝트의 매출이 처참한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입지가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아마도 홍인섭은 이 기회에 아예 부사장을 제 사람으로 갈아치울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 공정거래법상의 사익 편취 규제 대상의 그물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총수 일가의 지분이 100프로인 계열사를 물적 분할 하겠다고 발표한 걸 보면.

미리 알았더라면 한발 빠르게 움직였을 수도 있지만 인섭이 직접 꾸린 팀 내에서만 진행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현식도 미향도 뒤늦게 알았다.

잘못하면 제가 가진 지분이 쪼개지다 못해 아무 영향력 없는 회사의 대주주로만 남게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경의 가장 중심이 되는 분야의 지분을 늘리는 중이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오빠인 홍인섭의 눈을 피해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시간이 걸리고 번거로웠다. 게다가 일을 맡기고 있는 한 팀장이 일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개를 내저으며 미향은 보드카를 한 잔 더 따랐다.

“명인일보 반응은 어때? 아직도 승운이 이사 자리에 오르는 걸 봐야 확답을 주겠다는 식인가?”

“네. 일단 당사자는 도련님이 마음에 든 것 같은데 장 사장님 의중은 그런 것 같습니다.”

“손해라고는 손톱만큼도 안 보려는 작자야. 이럴 때 과감하게 투자하는 배짱이 있어야지.”

쯧, 하고 혀를 차며 미향이 보드카를 들이켰다. 김 실장이 얼른 컵에 물을 채웠다. 길게 숨을 들이쉰 미향은 등받이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널찍한 거실에는 아늑한 조명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한 면을 가득 채운 통창 너머의 어둠을 응시하던 그녀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주차장으로 차가 한 대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 몇 시지?”

“12시 조금 넘었습니다.”

“승운이가 이제 들어오나 보네. 일이 많았나.”

가늘게 눈을 뜬 채 보드카 잔을 어루만지던 미향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세라를 좀 더 밀어붙여야겠어. 장 사장도 딸이 목을 매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다음 주 갤러리에서 진행되는 새 전시회 오픈 행사에 초대하는 게 어떨까요?”

“좋아.”

고개를 끄덕인 미향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뺨에 묻은 긴장을 털어 냈다. 아들과 대화하기에 적당한 표정을 만들어 내자마자 문이 열리고 승운이 안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평소 같지 않게 비틀대는 듯한 발소리에 김 실장과 시선을 교환한 미향이 몸을 일으켰다.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서며 넥타이를 잡아당기던 승운이 고개를 들었다.

“술 마셨니? 그렇게까지 마신 거 오랜만에 보는구나.”

승운은 늘 즐기는 수준에서 술을 마셨다.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억지로 누군가 술을 먹이는 경우도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몸을 똑바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는 것은 정말이지 드문 일이었다.

“안 주무셨어요?”

반쯤 뭉그러진 발음을 내뱉은 승운이 길게 숨을 몰아쉬고는 미향이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취한 상태에서도 엄마에게 다가오는 아들을 향해 미소 짓던 미향은 그의 손이 제 앞에 있는 보드카 병을 낚아채는 것을 보았다.

병을 들고 꿀꺽이며 술을 들이켜는 승운을 지켜보는 미향의 눈살이 점차 찌푸려졌다. 김 실장이 고개를 숙였다.

“꿀물 준비하겠습니다.”

“무슨 속상한 일이라도 있었어? 회사 일이 잘 안 풀리니?”

입술을 타고 흘러내린 보드카를 손등으로 대강 닦아 낸 승운이 바닥 언저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취해서 내뱉는 숨이 불규칙하고 빨랐다. 아들의 낯선 옆모습을 살펴보던 미향이 물컵을 내밀며 말했다.

“세라는 네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더라. 주말에 바람도 쐴 겸 바다 구경이나 한번 시켜 주는 게 어때?”

승운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앉은 미향이 늘어진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승운아, 현실적으로 생각해. 너는 한경 사람이야. 그 혜택을 보는 일이 있는 만큼, 지켜야 하는 의무도 있는 거란다. 엄마가 아무나 골랐겠니? 쓸 만한 집안 애들 한 꺼풀 벗겨 보면 가관도 아니야.”

“…….”

“세라 눈독 들이는 사람들 많아. 애가 성격이 좀 가볍긴 하지만 그만큼 순수하고 때가 덜 탔어. 외모 준수하고 적당히 멍청하고, 정 붙이고 친구처럼 살기에 그만한 애 없다. 어차피 네 결혼은 정해진 일이니 괜히 시간 끌 것 없이…….”

순간 세차게 휘두르는 손길에 미향의 눈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허공으로 날아간 보드카 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열장에 부딪혀 깨져 버렸다.

벌떡 일어선 승운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물을 끓이면서 컵에 꿀을 옮겨 담고 있던 김 실장마저 딱딱하게 굳었다.

“집을.”

불온한 공기를 깨뜨린 것은 승운의 목소리였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병 조각을 응시하며 느릿하게 말했다.

“나가서 살까 해요.”

아연한 표정으로 아들을 보며 입술을 벙긋거리던 미향이 김 실장을 향해 눈짓했다. 정신을 수습한 김 실장이 나섰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내가 해.”

미간을 치켜세운 승운이 그녀를 돌아본다. 날카롭게 힘이 들어간 눈매가 전에 없이 살벌하게 느껴져 김 실장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그녀를 노려보며 짓씹듯 말을 뱉었다.

“내가 한다고.”

승운이 그대로 자기 방을 찾아 휘청이며 걸어가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김 실장은 겨우 눈을 굴려 미향을 바라볼 수 있었다. 미향이 뻣뻣한 입술을 움직였다.

“그 애 어디 있지?”

“윤준영 대리 말씀이십니까?”

“알아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때아닌 사춘기처럼 구는 거 다른 이유 아닐 거야. 그리고 집은 승운이가 구하게 해. 대신 승운이가 찾아간 중개사한테 우리가 관리할 수 있는 집 몇 개 쥐여 줘서 그중에 고르게 하고.”

“알겠습니다.”

휴대폰을 챙긴 김 실장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주변이 다시 고요해지고 나서야 미향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쿵쾅대며 뛰고 있었다.

승운은 정말이지 착한 아들이었다. 고집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무엇이 이득인지를 이성적으로 따질 줄 아는 아이였다.

그를 지금 이 자리에 세워 놓기까지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승운은 결국 엄마의 말을 납득하고 지금까지 그 말에 따라왔다.

그리고 이제 그들 사이에 확실하게 합의되지 않은 문제는 단 하나였다.

윤준영.

미향이 윤준영을 승운의 곁에 둔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준영은 영악했고, 제 아들은 그 애에게 빠져 있었다. 금방 사그라들겠지 싶었던 승운의 관심은 아주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불씨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준영은 만약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무슨 일이든 꾸밀 수 있는 아이였다. 가장 골치 아픈 것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몇 년 만에 다 큰 아이 하나를 안고 나타나는 것이다. 윤준영 정도면 제게 가장 압박이 될 수 있는 순간을 고르고도 남았을 테고.

승운이 자식으로 인정해 달라고 나오면 오빠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스캔들을 이용해 그룹에서 저와 나현식, 그리고 승운을 완전히 잘라 낼 기회를.

결국 승운은 그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저 그런 회사원으로 끝나 버릴 수도 있다. 미향은 그 꼴을 볼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한경은 제 할아버지가 일궈 낸 회사였다. 원래대로라면 오빠와 똑같이 나눠 가져야 할 재산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준영을 보이는 곳에 두고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그편이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윤준영은 제 주제를 제법 잘 알았다. 진창을 뒹굴며 불확실한 먼 미래에 베팅하기보다 안정적이고 확실한 눈앞의 미래를 선택했다. 게다가 일 머리도 나쁘지 않아 꽤 쓸 만했다.

미향은 지금 이 상황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승운이 결국 궤도를 이탈하려는 모양이었다. 무엇이든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친구라는 방패로 잘 버티고 있는 윤준영이 흔들리지 않는 한 아들도 별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끝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승운이 끝까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뒷방에라도 들어앉혀 놔야 하나.”

그러기엔 애가 너무 영악하다. 가장 불안한 것은 제 일에 어떤 변수가 될지 예상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완전한 아군이라면 몰라도, 미향은 준영을 믿을 수가 없었다.

“쓸데없이 똑똑해서는.”

쯧, 하고 혀를 차며 그녀는 물을 들이켰다. 복잡한 생각으로 가슴속이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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