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인부들이 빠져나간 현장은 적막했다.
사고 현장은 서쪽 출구와 가까운 4층 계단참이었다. 아직 벽이 세워지지 않아 난간으로 형태만 잡아 놓은 곳. 설계도로 위치를 확인해 둔 곳을 떠올리며 준영은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정만수가 추락한 시간은 밤 8시 50분경. 자재가 들어오는 일정이 꼬여 야간작업조가 구성된 날이었다. 지금은 겨우 8시를 넘긴 시간이었지만 최대한 추락 당시와 비슷한 풍경을 보고 싶었다.
생각보다 무릎이 따끔하네.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준영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4층이면 제법 높다. 중간중간 달려 있는 안전등은 발치를 보기에 충분했지만 추락한 날 오전에는 보슬비가 내려 발판이 젖어 있는 상태였으니 무거운 걸 지고 내려가다가 충분히 미끄러졌을 수 있다.
죽지 않은 게 일단은 다행이긴 한데.
눈을 가늘게 뜬 준영은 4층까지 오른 뒤 숨을 골랐다. 사방이 뚫려 있으니 4층인데도 꽤 공포심이 든다. 난간을 붙잡자 바람이 불어와 목덜미에 맺힌 땀을 조금이나마 식혀 주었다. 아래에 제가 있던 사무실 지붕이 보였다.
일단 괜한 관심을 보이는 주무관부터 해결하고, 정만수를 만나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주말에는 조금 쉬어도 될까.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으니 정만수는 월요일에 찾아가도 괜찮을 것 같…….
순간 무언가 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린 준영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시커먼 그림자가 제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녀가 소리를 지르기 전 상대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야! 놀랐잖아!”
가슴을 쓸어내리며 준영이 난간을 붙잡았다. 심장이 쿵쾅대며 뛰고 있었다. 시커먼 티셔츠를 입어 가뜩이나 범진은 눈에 띄지 않았다. 저놈의 티셔츠를 죄다 찢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기척을 안 내? 어디서 온 건데?”
“뭐 하고 있냐고 물었는데.”
미간을 좁힌 범진이 엄한 목소리로 묻는다. 준영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현장 답사 겸 너 기다렸지.”
“날?”
“출근도 같이 했으니까 퇴근도 같이 하겠지 싶어서.”
기가 차다는 듯 범진이 짧게 한숨을 내쉰다.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준영이 무릎을 가리켰다.
“다리도 다쳤잖아. 게다가 택시를 타도 난 말할 주소를 모른다고.”
“4층까지 혼자 올라올 정도면 집까지 충분히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넌 여기 왜 왔는데?”
범진의 말을 자르며 준영이 팔짱을 꼈다. 대답이 늦는 틈을 타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찾아온 거 아니야?”
“……어떻게 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범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느릿하게 되물었다. 길게 숨을 들이마신 준영이 눈을 굴렸다.
“날 그냥 버리고 갈 것 같지는 않아서. 그리고.”
무심해지는 범진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준영은 빠르게 덧붙였다.
“계단 오르내리는 소리가 안 들렸어. 너 여기서 자주 잔다며. 나도 기다릴 겸 난간에서 사무실 쪽 보다가 내가 여기로 오는 거 본 거 아냐?”
막 갖다 붙인 말이긴 했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런 말일수록 당당하게 해야 덜 민망하다.
웃지도 않고 그저 고요하게 그녀를 바라보다 짧게 혀를 찬 범진이 뒤로 물러섰다.
“꿈은 자면서 꿔라. 내려와.”
“최영복 반장이랑 친해? 거둬 주고 일 가르쳐 줬다고 했던 것 같은데.”
계단으로 걸어가던 범진이 서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눈이다. 준영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뱉었다.
“정만수 씨랑도, 만나 본 적 있어?”
느낌이지만 범진의 눈빛이 달라진 것 같았다. 다시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린 범진의 낮은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안전사고가 아닌 쪽으로 몰고 싶은 거야?”
“회사는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야 돈이 덜 드니까. 하지만 시끄러워지는 걸 바라지도 않을 거야. 수습이 어려운 돈도 아니고. 그런데, 사고인지 아닌지가 너한테 중요해? 그때 말하는 거 보니까 안전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생명이 달려 있으니까. 내일은 떨어지는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지.”
“언제부터 건설 현장에서 일했어?”
고요하게 그녀를 응시하던 범진의 눈이 가늘어진다. 준영의 입술은 쉬지 않았다.
“일을 가르쳐 줬다고 하는 걸 보니까 이 바닥 초짜인 것 같고. 그동안은 뭐 하면서 살았는데? 왜 하필 이 지역에서 안 하던 일을 시작하게 된 거냐고.”
“윤준영.”
그녀가 질문을 멈출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범진이 건조하게 그녀를 불렀다. 준영은 제게 한 발 다가서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남자 필요하냐?”
“……뭐?”
준영은 멍하니 반문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범진이 천천히 두 팔을 뻗어 난간을 잡았다. 뜨거운 열기가 훅 끼치는 것 같아 심장이 바짝 조여든다. 팔 사이에 갇힌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자 범진이 툭 내뱉었다.
“관심이 지나쳐. 우연한 만남이 신기한 건 알겠는데 성가시게는 굴지 마라.”
하, 하고 준영이 일그러진 웃음을 흘렸다.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일별한 범진이 몸을 뒤로 물렸다.
짜증이 치솟는다. 누군가 가슴팍에 얼음물을 확 끼얹은 것 같았다. 이를 악문 준영이 범진의 팔을 낚아챘다.
“그렇게 내가 빨리 떨어져 나가길 바라면 설명을 해. 왜 그렇게 사라졌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알아야 직성이 풀리겠…….”
그때 갑자기 머리가 핑 돌고 다리에 힘이 풀려 준영이 크게 휘청거렸다. 순식간에 뻗어 나온 팔이 그녀를 단단히 붙들었다.
눈을 감은 채 준영은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피가 단번에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아찔하다. 범진의 목소리가 다그치듯 머리 위에서 날아왔다.
“너 열 있어? 몸이 왜 이렇게 뜨거워?”
“비는 맞았지, 오토바이에 치일 뻔했지, 밤새 잠도 제대로 못 잤지. 내 몸이 그럼 성하겠니?”
현기증을 잠재우려 범진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준영이 퉁명스레 웅얼거렸다. 한숨을 내쉬는 그의 가슴이 크게 내려앉았다.
눈을 떴지만 시야가 온통 새카맣다. 준영은 범진의 손이 제 팔을 얼마나 세게 쥐고 있는지를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얘는 도대체가 말과 행동이 맞아떨어지질 않는다. 말을 믿어야 할지 행동을 믿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음이 차분해지기를 기다리며 범진의 호흡을 따라 천천히 숨을 내쉬다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뿐이야. 너 귀찮게 할 생각 없어. 살면서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알고 싶었던 일이 없었거든. 그렇게까지 답답했던 적도, 그렇게까지 내가 무력하게 느껴졌던 적도 없었어. 왜 사라졌을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는.”
감았던 눈을 뜨며 준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범진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때 너를 좋아했으니까.”
제대로 돌려주지 못했던 고백에 새카만 눈동자가 잔물결이 일듯 흔들린다. 손목을 비틀자 흠칫 놀란 범진이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언젠가처럼 멀어지려는 그 손가락을 재빨리 움켜쥔 준영이 속삭였다.
“그러니까 그게 뭐든 말해. 내가 그 시절의 너를 놓아주길 바란다면.”
시선이 오래도록 부딪친다. 범진은 붙잡힌 손을 빼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시간이 흐르는 것 같기도, 멈춰 버린 것 같기도 했다. 굳게 다물린 범진의 입술이 꿈틀거린 것과 준영의 가방 안에서 휴대폰이 울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아슬아슬하게 쌓아 가던 모래 탑이 단번에 무너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미 분위기는 깨졌다. 금세 다시 표정을 가다듬은 범진이 덤덤하게 뒤로 물러섰다.
“받아 봐.”
“얘기부터 해.”
“됐으니까 받아.”
누군지 몰라도 머릿속으로 정강이를 삼세번은 걷어차며 휴대폰을 꺼낸 준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언뜻 스치는 생각에 고개를 들자 범진의 얼굴에 남아 있던 온기가 한순간에 사라져 있었다. 휴대폰에 뜬 이름을 확인한 뒤였다.
……닫혔다. 완전히. 겨우 열리려던 문이었는데.
나승운, 이 망할 자식!
“같은 회사에 있어. 나승운 어머니가 운영하는 재단 도움으로 학교를 졸업했거든. 그때 너 사라진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설명할 필요 없어. 관심 없으니까.”
범진의 말투는 오히려 아까보다 더 부드러웠다. 길게 뻗은 눈매가 희미하게 웃는 것 같기까지 했다.
“전화받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집에는 바래다줄게.”
붙잡을 틈을 주지 않고 범진은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지나치게 빠른 걸음을 보니 그가 어둠 속에서도 앞을 잘 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준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할 줄 아는 욕이 많지는 않았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원망스레 계속 울리는 휴대폰을 쏘아보던 그녀가 거칠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 준영아? 일 끝났어?
“응.”
- 정식 출장 신청했다는 얘기 들었어. 원래 담당자도 따로 있는 일이라며. 성 팀장이 네가 맡고 있던 TANDOZ 건을 혼자 마무리 지으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데, 내가 좀 나서 볼까?
“나 통화 오래 못 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말하자 의아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 일 끝났다고 하지 않았어?
“데이트 중이거든.”
휴대폰이 먹통이 된 것처럼 조용해졌다. 준영은 현기증이 다시 일지 않도록 아주 느리게 일어섰다. 무릎은 아프고 두통은 심해지고 있다. 짜증이 그녀의 인내심을 잡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네 팀원이 아니잖아. 다른 팀의 일에 나서는 건 월권행위야. 괜한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고. 지금 같은 때에 네 일에 방해될 순 없지. 그럼 내가 이사님을 무슨 낯으로 보겠어?”
- 내…… 일이라니?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것을 끌어낸 듯한 목소리였다. 준영은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명인일보와의 혼사 말이야.”
안다. 이것은 승운의 머리를 망치로 가격하는 수준의 말일 것임을.
이런 이야기는 미향과 했지, 승운에게 직접적으로 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결국은 하게 될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그러니까 내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혼자서 잘할 수 있으니까. 끊을게.”
대답을 듣지 않고 통화를 마친 준영은 어둠에 잠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 이런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승운이 납득할 만큼의 남자를 옆에 데려와 시간을 투자하느니 차라리 그의 어리광을 적당히 받아 주는 편이 효율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조차 꺼내지 않았던 권범진의 이름을, 승운은 가끔 한 번씩 입 밖에 내곤 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다니 참 희한한 일이었는데 어떻게 지낼까, 하면서.
순수한 호기심과 걱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저를 떠보는 것임을 준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범진에게 열등감 같은 걸 품고 있었다.
그 시절 범진의 행방을 찾으려 미친 듯이 경찰서를 드나들던 그녀를 봤었으니까.
난간을 잡은 채 느릿느릿 내려가자 안쪽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기다란 인형이 보인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준영은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입을 열었다. 열 기운이 가득 찬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왔다.
“남자 필요하냐고 물었어?”
“……뭐?”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범진의 얼굴이 흐릿해 보인다. 준영은 비틀대며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필요하다면, 내 남자 해 줄 거야?”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아무거나 붙잡자 범진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그럼 일단 집까지 좀 데려다 줘.”
나 기절할 것 같아, 라는 말을 끝까지 했는지는 모르겠다. 준영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