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42화 (42/86)

<42화>

정만수 같은 케이스는 제반 사항을 봤을 때 1급 채무자에 속한다. 비록 담보로 잡을 부동산은 없지만 기공으로 일하면서 매달 꼬박꼬박 돈이 회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쪽 일은 이자 장사라 지나치게 빨리 갚는 채무자도 달갑지는 않지만 회사의 자금 융통을 생각해 봤을 때 1급 채무자와 3급 채무자의 비율을 조화롭게 유지할 필요성은 있었다.

그러던 정만수가 갑자기 사고를 당한 것이다.

몸으로 일하는 사람인데 몸을 쓸 수 없으니 변제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2년 안에 안정적으로 회수될 것이라 예상했던 돈이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어진 것이다.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안전사고였기 때문에 보상금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점이다. 금액은 빚을 다 갚고도 남을 정도였다.

물론 보상금은 안전장치 미비로 인한 사고였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지급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범진은 정만수가 의식을 찾았다는 소식에 병원에 갔다가 그가 아내에게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누가 밀었어, 나를. 분명히, 누, 누가…….’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착각이야. 방지망만 있었어도 당신 이렇게까지 안 다쳤어!’

당연한 일이다. 남편이 최소 몇 년쯤 제대로 된 일을 못 할지도 모르는 상황인 데다 빚까지 떠안고 있으니 그녀는 보상금이 절실하게 필요할 터였다. 누군가 남편을 죽이려 했든, 아니면 실수로 밀었든, 이것은 무조건 안전사고여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범진의 회사는 그렇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정만수를 민 거라면 당연히 보상금은 취소될 것이다. 그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를 알아봐야 했다.

그것이 범진이 이곳에 온 이유였다.

인부들 틈에 적당히 섞여 상황을 살피고, 그들 사이에 원한이나 이권 관련 문제가 없는지 조사하는 동시에 인부들의 신뢰를 얻고 그들을 선동하여 한경에 압박을 가하는 것.

……그런데 윤준영이 나타날 줄이야.

“김 씨.”

생각에 잠긴 채 사무실 지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범진이 고개를 돌렸다.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힌 영복이 얼굴을 찌푸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어제 전화 안 받데? 일찍 잤어?”

아.

범진이 입을 꾹 다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생각도 못 했다. 아마 길바닥에 떨어뜨렸을 것이다. 어제 통화를 하다가 횡단보도에 준영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마자 그대로 달려갔던 기억이 났다. 그 후로 휴대폰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윤준영을 만나자마자 기가 막히게 멍청이 병이 도졌군.

그는 쓴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잃어버렸나 봐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뭐. 소주나 한잔할까 하고.”

영복은 정만수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 중 하나였다. 잔뼈가 굵어 의외로 소장들과도 안면이 있는 편이라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성격이 강한 데다 목청이 크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옆에서 겪어 본 영복은 잔정이 많았다. 의외로 길을 가다 새끼 강아지만 봐도 발걸음이 느려지는 사람이었다.

‘애가 어릴 때 죽어서. 어린것들만 보면 마음에 걸리네.’

언젠가 그런 감상적인 부분으로 가볍게 놀리자 툭 돌아온 말이었다. 영복은 지금은 혼자 살고 있지만 그 역시 아내와 딸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정만수와 더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아니, 근데 어쩌다 휴대폰을 잃어버렸어? 뭐 썩 좋은 건 아닌 것 같더라만.”

“돈이 없으니까요. 찾아야 할 텐데.”

턱을 쓰다듬으며 범진은 짐짓 입을 쩍 벌리고는 하품을 했다. 영복이 천천히 다가와 난간을 쓸었다.

“아픈 여동생이 있다고 했던가?”

“네. 빚도 좀 있고요.”

신파 같지만 의심은 줄이고 동정은 얻을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설정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영복이 씩 웃으며 범진의 팔을 툭 쳤다.

“이쁜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래?”

“이쁜이가 누군데요?”

“모르는 척하기는. 새로 온 한경 스파이 말하는 거 아냐. 어디 탈렌트같이 생겨서는 말은 따박따박 잘도 하던.”

그때도 윤준영을 이쁜이라고 부르던 놈들이 있었는데.

고개를 내저으며 범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기억이 잘 안 나요.”

옆에 선 영복이 그를 흘끔거린다. 표정만으로는 진담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영복은 그의 등을 툭 쳤다.

“남자는 자신감이야. 꿀릴 거 없어. 미인은 용기 있는 자가 얻는다고 한 말이 괜한 말이 아니라니까. 우리 마누라도 얼마나 예뻤는데. 그 동네 농협에서 제일 예쁜 직원이라고 소문이 났었어.”

영복은 가끔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가족 얘기를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항상 웃는 듯 마는 듯 한 애매한 표정이 얼굴에 떠오르곤 했다. 범진이 짧게 숨을 들이쉬며 턱을 괴었다.

“그래서. 용기 있게 들이대셨어요?”

“첫눈에 반했으니 별수 있나. 꽃다발이고 뭐고 있는 돈 죄다 털어서 매일같이 찾아가니까 한 달쯤 됐을 땐가, 슬슬 웃어 주더라고.”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빨리 센 머리칼을 긁적이는 영복의 말에 범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저더러 그렇게 하라고요? 한경 사람들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 아니었나?”

“박형준이야 그랬지. 이쪽 사정에는 도통 관심 없는 게 한눈에 보이니까. 근데 새로 온 아가씨가 제대로 일 처리를 해서 결과적으로 우리 일에 도움이 되면야, 이쁜이라고 부를 만하지. 안 그래?”

“그렇게.”

범진은 천천히 몸을 돌려 영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길고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그의 눈매는 특별히 뭘 어쩌지 않아도 사람을 조용히 위압하는 힘이 있었다. 실제로 범진이 사람 둘을 때려눕히는 광경을 봤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범진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부르지 마세요.”

건조한 목소리에 발이 붙들린 것처럼 영복은 움직이지 못했다. 희미하게 눈매를 누그러뜨리고 웃어 보인 범진이 길게 기지개를 켜며 계단을 내려갔다.

“……지만 부르겠다는 거여, 뭐여. 나 참.”

군더더기 없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영복이 불만 어린 한숨을 토해 냈다. 입맛을 다시던 그의 손이 다시 한번 난간을 천천히 쓸었다. 주름진 눈이 씁쓸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 * *

“전반적인 시스템은 알겠어요. 그러니까 여기 적힌 하자 보수 관련 사항들은 이미 다 접수가 됐다는 말이죠? 하지만 아직 실제로 개선이 되지는 않았고요.”

점심도 도시락으로 대충 때우며 일곱 시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회의가 드디어 끝날 기미가 보이자 영혼을 반쯤 내놓고 있는 것 같던 민숙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출근했을 때만 해도 남아 있는 술기운에 얼굴이 불그죽죽하던 사무장의 안색은 지금은 거의 흙색에 가까웠다.

“법적으로는 이제 크게 걸릴 문제가 없어요. 사실 공사도 급한 상황이라 같이 해내기가 쉽지 않고.”

“어제 접대받은 사람이 확답이라도 주던가요?”

“그거야…….”

큰소리를 치려다 억억, 거리며 위협하던 준영이 떠올랐는지 사무장이 말끝을 흐렸다. 준영은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사항을 체크하며 물었다.

“이름이 뭐죠, 그 사람?”

“건축1과 김용재 주무관입니다.”

“저도 한번 만나 볼게요. 자리 주선해 주세요.”

“네? 아니, 내가 기껏 어제 만나서 기분 좋게 헤어졌는데 뭘 또.”

“그래서 확답은 들으셨고요?”

천천히 눈을 들며 묻자 사무장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그의 숨에는 알코올기가 남아 있었다. 준영은 지금 정신이 혼미한 게 목덜미에 오르는 열 때문인지, 그가 뿜어내는 술기운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두워지고 있으니까 현장 시찰은 내일로 미루죠.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기분 탓인지 ‘오늘은’ 부분에서 민숙과 사무장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는 것 같다. 못 본 척 서류를 덮으며 일어서던 준영은 문득 현기증을 느끼고 잠시 소파를 짚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자료를 챙기느라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준영이 고개를 돌렸다.

“아, 민숙 씨.”

“네.”

“이력서가 없는 사람이 있던데요. 인력 사무소에서 다 넘어온 게 아닌가요? 아니면 따로 보관하는 다른 파일이 있다든가.”

“네? 그런 건 없는데요. 서류는 다 받았고요.”

민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무장이 돌아서며 꿍얼거렸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만 기백 명은 족히 되는데 이력서 없는 사람은 또 어떻게 찾았대?”

준영의 시선이 날아오자 사무장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혼잣말입니다, 혼잣말.”

“혹시 어떤 분인지…….”

“아니에요. 제가 좀 더 알아볼게요.”

민숙에게 손을 저어 보이며 준영은 가방을 챙겼다. 사무소 소개로 들어왔다고 했는데 이력서가 없는 걸 보면 역시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남들은 모르지만 준영은 범진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었다.

‘맨날 그래 처자면서 또 자? 좀 불러와 봐라.’

백발이 그렇게 말했었다. 도대체 어느 일꾼이 현장에서 처잘 수 있단 말인가? 그랬다가는 잘리기도 쉽지만, 그 전에 동료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범진이 그러고 있다는 것은 동료들이 봐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즉 그들에게 그만큼의 신뢰를 얻었거나, 아니면.

건드리지 못할 무언가를 보여 줬다고 생각할 수밖에.

게다가 권범진이 누구던가. 준영은 그가 자기 입으로 성가셔서 자는 척했다고 말했던 걸 똑똑히 기억했다. 하지만 일을 하기 싫어서 자는 척을 하는 거라면 굳이 이런 곳에서 일자리를 구한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역시 이곳에 숨어 있는 걸까. 무언가로부터. 예를 들면.

경찰이라든가.

가뜩이나 열이 올라 어지러운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준영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범진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몰랐다면 이런 생각을 하진 않았을 테지. 아는 게 오히려 독이었다.

“다리 불편한 것 같던데, 태워다 드려요? 어디서 묵으시죠?”

민숙이 보낸 무언의 사인을 받은 사무장이 지친 듯한 얼굴로 물었다. 준영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전 현장 좀 보고 갈게요.”

“아니, 현장 시찰은 내일 하자고 안 했어요?”

“시찰까진 아니고요. 그냥 둘러보고 싶어서요.”

“위험한 데 들어가고 그러면 안 됩니다. 안전등이야 군데군데 켜져 있겠지만 그래도 어두워요. 그냥 내일 보면 되지, 왜 굳이…….”

“먼저 가 보겠습니다.”

사무장의 투덜거리는 말을 적당히 자르며 준영은 사무실을 나왔다. 완전히 컴컴해지지는 않았지만 아마 금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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