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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여명일 뿐-41화 (41/86)

<41화>

새벽에 깜빡 잠든 사이 사라졌을까 봐 은근히 걱정했는데 저 태연한 작태를 보니 또 마음이 삐딱해진다. 뾰족한 눈으로 범진을 쏘아보고 있자 늘어지게 하품을 한 그가 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스쳐 지나간다. 욕실로 향하는 그를 본 준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기요, 김 씨. 내가 먼저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5분이면 됩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범진은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기가 막혀 눈을 부라리는 그녀에게 할머니가 등을 토닥였다.

“그래요. 아가씨는 밥 먹고 해. 김 씨가 먼저 씻어야 따뜻한 물도 바로 나오고 좋지.”

“할머니.”

부엌으로 가려는 할머니를 부르며 준영이 몸을 낮췄다.

“저 사람 어떤 사람이에요?”

“그걸 나한테 왜 물어. 아는 사이 아니었는가?”

“모르는 사이예요. 적어도 지금은.”

새침한 표정을 짓는 준영의 기색에 할머니가 빙그레 웃었다.

“싸웠구만, 둘이.”

“싸울 만큼 친하지도 않거든요. 어떤 사람이에요?”

준영의 말에 흐음, 하고 고개를 주억인 할머니가 욕실을 바라보았다.

“동네 사람은 아니고, 온 지 한 달 좀 넘었나. 저쪽 공사 현장에서 일할 건데 값싼 방을 하나 찾는다고 왔더라고. 군말 없이 아침 되면 일하러 가고, 때 되면 와서 밥 먹고. 말수가 많지는 않지만 성실해요. 만나는 아가씨는 없는 것 같고.”

웃음기 어린 입술로 할머니가 덧붙이는 말에 준영은 어색한 눈웃음으로 답했다. 그녀는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같이 일하는 인부 아저씨들이랑 자주 만나고 그래요?”

“밖에서야 어떻든 집에 같이 오고 그러지는 않던데……. 다들 뜨내기고 현장 다니는 동안 시내 쪽에 머물면서 한 차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거든. 김 씨는 나중에 합류한 사람이라 따로 집을 찾게 됐나 봐.”

따로 합류하셨다?

눈썹을 까닥이며 준영은 문이 꼭 닫힌 욕실을 바라보았다.

“혹시 저 사람 이름이 뭐예요?”

“이름?”

“다들 김 씨라고 부르는데 이름을 안 알려 줘서요.”

“가만있자……, 뭐였더라? 흔한 이름이었는데. 나도 처음에는 총각이라고 부르다가 이제는 김 씨가 입에 붙어서. 아니, 이름도 모른단 말이여?”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요.”

조용히 가라앉는 그녀의 목소리에 할머니가 주름진 눈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고개를 주억이던 할머니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누룽지 끓어 넘치겠네. 상만 펴면 되니까 마루에 앉아 있어요.”

“상은 제가 펼게요.”

고소한 냄새가 마당에 퍼지고 있었다. 절뚝이며 걸어간 준영은 마루에 앉았다. 낑낑대며 다리를 굽혀 보니 어제 밴드를 붙여 놓은 무릎 주위에 시퍼런 멍이 퍼져 있었다.

그냥 가볍게 넘어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지간히 놀랐었나 보네.

오토바이 주인 붙잡아서 밴드값이라도 뜯어낼 걸 그랬나.

문득 제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던 범진이 떠올랐다. 아마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저를 모른 척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놀라서 달려온 주제에.

준영은 그 순간 범진이 보여 준 표정을 믿었다. 표정을 꾸밀 이유도, 여유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앉은 채 엉덩이만 들썩이며 벽에 세워진 상을 끌어당기려던 그녀는 허공에서 상을 훌쩍 낚아채 가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왔는지 젖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긴 범진이 상다리를 펴고는 마루에 내려놓았다.

비누 냄새가 냉기와 함께 훅 끼친다. 무릎에 두어 방울 떨어진 물이 제법 차갑다. 그를 뚫어져라 지켜보던 준영이 입을 열었다.

“이봐요, 김 씨.”

한마디 할 것 같은 눈으로 범진이 그녀를 돌아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깨를 으쓱인 준영이 빠르게 말을 뱉었다.

“당신 혹시 여기에 무슨 위험한 일 하러 왔어?”

성가신 표정을 짓고 있던 그의 날 선 눈매가 꿈틀거렸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분명 그랬다. 미간을 바싹 좁힌 범진이 혀를 찼다.

“사람 죽는 현장이니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군요.”

“죽진 않았잖아요.”

덤덤한 그녀의 대꾸에 짧게 한숨을 내쉰 범진이 몸을 바로 세웠다.

“원래 담당자는 언제 돌아옵니까?”

“내가 무능력하다는 게 증명되면 오겠죠.”

“그러니까.”

차분한 범진의 눈이 저를 훑어보는 듯한 느낌에 준영은 당당하게 턱을 쳐들었다. 선이 또렷한 그의 입술이 서서히 기울었다.

“사고가 한 번 더 생긴다든가?”

순간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던 준영의 눈이 움찔거렸다. 막을 틈도 없이 말이 튀어 나갔다.

“권범진, 너 대체……!”

“뜨거우니까 조심해요.”

뒤에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준영은 입을 다물었다. 누룽지가 끓고 있는 냄비와 김치, 빈 그릇이 상에 놓였다.

“잘 식혀서 먹어요. 우리 집 김치가 맛있어서 김 씨가 참 좋아해.”

네, 하고 할머니가 건네는 숟가락을 받으며 준영은 날카롭게 범진을 쏘아보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누룽지를 휘휘 저을 뿐이었다. 부옇게 피어오른 김이 그의 얼굴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 * *

민숙은 입술을 비죽이며 걸음을 빨리했다. 새벽 댓바람부터 사무실 입구 비밀번호를 묻는 문자에 강제로 일찍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출근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타입이었는데 지금 무려 30분이나 앞당겨 출근하고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환하게 불이 켜진 곳에서 준영이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숨을 삼키며 민숙이 기척을 냈다.

“일찍 나오셨…….”

“안전 관리 조직표 어디 있어요? 못 찾겠던데.”

이미 소파 쪽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서류철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민숙은 제 자리로 걸어가 캐비닛을 열었다. 건네주는 서류를 받으며 준영이 숨 쉴 틈도 없이 물었다.

“사무장님은 왜 안 나오시죠?”

“아, 어제 아마 접대하시느라 댁에 늦게 들어가셨을 거예요.”

그런 날 오전에는 거의 사무실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해서 오전 내로 저랑 미팅 시간 좀 잡아 주세요. 감리 보는 단장님은 상주하시는 건가요? 같이 참석하면 좋겠는데.”

총알처럼 날아오는 말에 민숙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손에 든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고 있던 준영이 대답이 없는 것을 의식한 듯 고개를 들었다.

“급한 일이니까 부탁 좀 할게요.”

“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민숙은 수화기를 들었다. 노트북에 무언가를 입력하며 준영이 휴대폰을 꺼냈다.

“윤준영입니다. 정식 출장 신청할게요. 일단은 다음 주까지요. 아, 그리고 공유 폴더에 액세스 안 되는 게 몇 개 있던데 오픈 좀 해 주시겠어요? 접속 코드 불러 드릴게요.”

비딱하게 이마를 짚은 채 쉴 새 없이 말을 하는 준영을 경이롭다는 듯이 보며 민숙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은 모르지만 지금 눈앞의 여자가 이전의 담당자인 박형준과 아주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인데. 가뜩이나 한 성깔 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현장에 부싯돌이 굴러들어 온 거 아닌가 몰라.

“아, 네, 사무장님. 일어나셨어요? 저기, 다른 게 아니라…….”

수화기 너머에서 잔뜩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사무장을 다독이며 민숙은 어깨를 으쓱였다. 진한 커피 생각이 절로 나는 아침이었다.

* * *

범진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비가 그렇게 왔었냐는 듯이 청명하다. 더불어 쨍쨍 내리쬐는 햇살이 따가웠다. 위태롭게 난간에 기대어 고개를 젖히고 있던 그는 눈을 감았다.

딱 이런 계절이었다. 준영과 함께했었던 계절은.

그래서인지 윤준영을 떠올리면 늘 밝고 깨끗한 기분이 들었다. 햇살 속에서 샌드위치를 들고 웃고 있던 모습이든, 조용히 집중해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뒷모습이든, 어느 걸 떠올려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기가 막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물론 준영은 서울에 살 거라고 예상했었고, 그 역시 주로 머무는 곳은 서울이었다. 그래서 어디선가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생각이었는지 소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정작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낮게 한숨을 흘리며 그는 실눈을 떴다. 비에 쫄딱 젖었으면서도 꼿꼿하게 서서 이쪽을 바라보던 준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얀 블라우스가 흠뻑 젖어 속옷 라인을 다 드러내고 있는데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한결 날카로워진 인상, 세련된 옷과 여성스러운 굴곡이 드러나는 몸매가 세월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었지만 윤준영은 윤준영이다. 겁 없고 당당한 건 정말이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제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모른다는 것도.

그리고 나 역시 변하지 않았지. 가까워져 봐야 그녀에게 득이 될 게 없다는 점에서.

쓴웃음을 지으며 범진은 몸을 돌렸다. 사무실 건물이 내려다보인다. 준영은 아마 저기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딱 이 자리에서 추락한 정만수는 그의 채무자였다. 정확히는, 회사의 채무자.

정만수가 갚아야 할 빚은 현재 이자까지 7천백만 원. 담보는 없고 아내와 딸 하나가 있다. 월세 30만 원과 생활비는 아내가 미용실에서 일하며 벌어 온 돈으로 충당하고, 정만수가 용역 일로 번 돈은 전부 회사로 들어오고 있었다.

일반 잡부가 아니라 상하수도를 매설하는 기공(기술자)이라 벌이가 나쁘지는 않다. 아내와 성실하게 일했다면 그들의 딸은 아무 걱정 없이 대학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정만수가 도박에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그는 정신을 빨리 차린 편이다. 한번 도박에 빠지면 정신을 차리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지만, 정만수는 가족을 아끼는 마음이 강했다.

그는 아내가 과로 때문인지 갑자기 길바닥에 쓰러져 사흘 동안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딸의 전화를 받고는 가까스로 늪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끌어다 쓴 돈이 1억을 막 넘어섰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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