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미지근한 바람이 분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인 범진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낭패다, 라는 표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준영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비딱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너무 깍듯하게 모른 척해서 잊어버린 줄 알았지 뭐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잘 지냈어?”
순간 범진이 훌쩍 몸을 일으켰다. 치뜬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 있어. 반창고랑 약 좀 사 올게.”
기가 막혀 준영은 입을 딱 벌린 채 버럭 소리쳤다.
“야, 지금 이 상황에 그게 먼저야?”
“나는 그게 먼저야.”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린 범진이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 약국으로 달려갔다. 준영은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심장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비로소 권범진을 ‘만났다’는 실감이 났다. 그가 제 이름을 부르고, 제가 그의 이름을 불렀으니까.
범진이 특별한 이유는 잘 알고 있다.
그는 제 첫사랑이었다.
아마도 사귀기 시작했을 그날 그가 사라지지만 않았다면, 더 많은 것들을 함께 했을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모든 처음은 권범진과 함께였으니까.
그 후로 호감을 느낀 남자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관계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무관심을 지적했다. 자기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서.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타인에 대해 딱히 궁금한 게 없었다. 다른 사람과 깊게 연관되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격이 반영된 결과였다.
애초에 준영은 연애 같은 건 저와 어울리지 않는, 불필요한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강했다. 상대에게 잘 보일 생각도, 제 내면을 드러내 보일 생각도, 의지할 생각도 없는 그녀를 남자들은 견디지 못했다.
그렇지만 권범진은 다르다. 준영은 그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았다. 그리고 알아야만 오랫동안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풀릴 것 같았다.
“다리 들어 봐.”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들자 어느새 다시 돌아온 범진이 다리맡에 앉는 게 보였다. 엉거주춤 발을 까닥이자 대번에 발목을 잡은 범진이 제 무릎 위에 그녀의 다리를 올렸다. 바닥에 내려놓은 봉투에서 이것저것 꺼내는 그를 보며 준영이 중얼거렸다.
“너 그 머리 되게 안 어울려.”
허, 하고 실소를 흘린 범진이 바짓단을 당기며 말했다.
“찢는다.”
“뭘……, 으악!”
섬유가 우악스럽게 뜯어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구멍 난 부분에서부터 바지가 찢어졌다. 순식간에 무릎 위로 댕강 올라간 꽃무늬 바지를 쳐다보며 준영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범진이 아무렇지 않게 소독약을 뿌리는 통에 그녀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머리 스타일 지적이 그렇게 거슬렸어? 힘자랑 좋아하는 건 여전하네.”
불퉁거리는 그녀의 말에 범진이 피식 웃었다.
“흉터 안 남기려면 치료에 신경 써야지.”
“내 다리에 흉터 남을까 봐 걱정하는 거야? 네가?”
‘그런 식으로 사라져 놓고는?’이라는 말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지만 범진은 마치 들은 것처럼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널찍하게 자른 밴드를 빈틈없이 붙여 준 뒤에야 그는 준영의 다리를 내려 주고 일어섰다.
“살 거 다 샀으면 가자.”
“안 산 거 있어.”
“사다 줘?”
“속옷인데?”
멀뚱한 준영의 대꾸에 잠깐 경직되었던 범진이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손을 내밀었다. 새침한 표정으로 그의 팔에 의지하며 준영은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릴 때마다 어깨 근처에 닿을 듯 말 듯 범진의 손이 느껴진다. 괜히 목덜미가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
가까이 붙어서 있는 그의 체온을 가만히 느끼며 준영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녀에게 팔을 내주고 있던 범진이 흘끗 고개를 돌린다. 일순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뺨을 바라보며 준영이 눈을 깜빡였다.
“왜 김 씨야?”
날카로워져 있던 눈꼬리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는다. 범진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까.”
하. 순순히 설명을 안 해 주시겠다?
입술을 비죽이며 준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그럼 앞으로도 계속 김 씨야? 내가 뭐라고 불러야 돼?”
“부르지 마.”
걸음을 옮기던 준영이 그대로 멈춰 섰다. 범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귓가를 스쳤다.
“그럴 사이 아니잖아.”
누군가 어지간히 세게 뒤통수를 후려갈긴 느낌이었다. 얼굴에 화끈거리는 열기가 솟구친다.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자기 기분에 취해 철없이 날뛴 망나니라도 된 기분이었다.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준영을 마주한 채 범진이 조용히 물었다.
“언제 돌아가냐?”
준영의 입술이 비딱하게 벌어졌다. 범진은 모르겠지만 방금 그 말로 그는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으로 모자라 그녀 안에 숨겨진 버튼 하나를 누른 거나 마찬가지였다. 윤준영을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든, 오기와 집착의 버튼을.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당긴 그녀가 빙긋 웃었다. 갑자기 반전된 분위기에 멈칫하는 범진을 매섭게 노려보며 준영은 그의 팔을 꽉 움켜쥔 채 속삭였다.
“나 잊어버린 거 맞네. 궁금한 걸 못 참아서 모텔 골목이며 경찰서까지 쫓아다니던 성격이었는데.”
같은 일을 떠올렸는지 범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간을 좁힌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윤준…….”
“너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어. 자퇴 소식 듣고 또 경찰서까지 찾아갔지. 집에 가 봤더니 난리도 아니라 평범한 이유로 떠난 게 아닌 것 같았거든. 하지만 동네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만 경찰 아저씨 붙잡고 매일같이 늘어지고, 너 때문에 내가 경찰서 드나든 것만 몇 번인지 알아?”
범진의 일그러진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조용히 응시한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준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범진의 팔을 쥔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언제 돌아가냐고 물었어? 미안한데 안 정해졌어. 내 일은 일정대로 공사가 끝날 때까지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게 만드는 거거든. 호텔도 물론 안 갈 거야. 나는 권범진이 왜 김 씨가 됐는지, 그때 왜 그런 식으로 사라져 버렸는지 알아야겠으니까.”
범진은 침묵하고 있었지만 눈만은 피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있었다. 준영은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그럴싸한 사연이라도 하나 준비해 놔. 아, 그리고 그 얘기 해 주기 전에 혹시라도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그땐 정말로 용서 안 할 거야. 평생.”
천천히 팔을 놓아준 준영이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석상처럼 우뚝 서 있는 범진을 보며 마지막으로 내뱉었다.
“이 말이 너한테 아무 의미도 없다면, 사라지든가.”
그럼 나도 어떤 의미에서는 홀가분해질 테니까.
절뚝이는 걸음이 불안정했지만 그래도 준영은 혼자서 걸음을 옮겼다. 요동치는 것은 제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는 이 감정들로 충분했다.
3
과했다.
아니,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었다.
준영은 뻑뻑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 혀를 찼다. 잠깐 잠들었던 것 같기도, 내내 깨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중요한 건 이미 동이 텄다는 사실이었다. 어슴푸레한 빛이 들어오던 문밖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겨우 몸을 씻은 뒤 쓰러지듯 방에 누웠지만 신경이 곤두서서 좀처럼 잘 수가 없었다. 이불에서 나는 눅눅한 냄새도 무시할 수는 없었으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머릿속을 점령한 채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권범진의 얼굴이었다.
제가 죄를 지은 것도, 범진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니 그가 눈앞에서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쩐지 자고 나면 범진이 사라져 있을 것만 같아서 편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몸이 이 지경인가.
준영은 몸살이라도 올 것처럼 쑤시는 삭신을 끌고 일어나 앉았다. 피로가 몸 곳곳에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어깨를 주무르며 그녀는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는 좀 더 평범하게 인사를 할 수도 있었다. 그 옛날 분명히 먼저 고백한 것은 범진이었고,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봤을 때 보나 마나 내가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무슨 이유였든 갑작스레 헤어졌던 첫사랑을 우연히 다시 만난 셈이니 좀 더 밝고 애틋한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다.
그러지 못한 것은 분명 권범진 때문이다. 먼저 모른 척하며 선을 그은 것도, 눈앞에서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도 다 그였으니까.
그리고 아마 거기에는 이유가 있겠지.
그게 곧 권범진이 아닌 다른 이름을 쓰고 있는 이유일 수도 있고.
“입양됐나?”
……그 나이에?
“쫓기고 있어서 개명을 했다거나.”
이건 그나마 현실성이 있군.
긍정 회로를 돌려 보자면, 그렇기 때문에 제게 이름도 부르지 말라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가 사라졌을 때의 정황을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로 심상치 않았으니까.
난 일의 결과를 낙관하는 타입이 아닌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준영이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무릎이 뻐근하고 목덜미가 으슬으슬했지만 일단은 씻고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제 상태가 어떻든 아침은 시작되는 법이니까.
“아니, 벌써 일어났나? 이제 겨우 6시 좀 넘었는데.”
빗자루를 들고 나오던 할머니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준영은 그녀의 시선이 짝짝이 바지에 닿는 것을 느끼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어제 사고가 있어서. 똑같은 걸로 사다 드릴게요. 어디서 사면 될까요?”
“사고? 하이고, 어쩌다 무릎이 그렇게 긁혔대? 옷은 됐어요. 그거랑 똑같은 것만 서너 벌 있으니까.”
“그래도 괜찮은 거 하나 구해 드릴게요.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요.”
“됐어. 예전에 시장에서 산 거고 다 낡아 빠진 건데 무얼. 우리는 아침에 누룽지 끓여 먹는데 10분쯤 걸려요. 아가씨도 그런 것 먹나?”
“없어서 못 먹죠. 금방 씻고 나올게요.”
독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저절로 제 말투도 순순해진다. 준영의 살가운 말에 할머니가 손사래를 쳤다.
“지금은 물이 차가울 건데. 밥 먹고 해요. 우리 집이 온수 나오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 물을 한참 틀어 놔야 돼.”
“어제는 바로 나오던…….”
대답하던 준영은 방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깨에 수건을 걸친 범진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