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39화 (39/86)

<39화>

“아, 이건 사정이 있어서 빌려 입었…….”

그러고 보니 씻고 나서 갈아입을 옷이 딱히 없다. 이렇게 젖을 것도 예상 못 했지만, 며칠 내내 묵는 게 아니라 서울을 오갈 생각이었기에 필요한 서류만 달랑 챙겨 온 참이었다.

번화가까지 가깝다고 했었지.

“이 방이 그나마 저쪽 방보다는 깨끗한데.”

자신 없는 목소리를 내며 할머니가 손을 뻗어 문고리를 당겼다. 벽 쪽에 붙은 버튼을 누르자 불이 들어왔다. 누런 벽지에 퀴퀴한 냄새가 풍겨 저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 묵을게요. 근데 아까 말씀하신 번화가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하죠? 옷을 좀 사야 할 것 같아서요.”

회의에 참석할 일도 없으니 깔끔한 셔츠에 슬랙스 정도면 충분하다. 속옷도 한 세트 정도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할머니가 손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저쪽 길로 나가서 좀 내려가면 되는데 길이 어두워서……. 일단 밥부터 먹고 김 씨한테 태워다 달라고 해요.”

“아뇨. 그런 부탁 할 사이가 아니라서요.”

잘라 말하자 할머니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뭘, 집까지 따라와 놓고는. 손부터 씻고 와요. 편한 바지라도 하나 내줄까?”

무슨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입을 벙긋거리는 사이 방에 들어갔다 나온 할머니가 화려한 꽃무늬 바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깨끗하게 빨아 놓은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잘 때도 입을 거면 이런 게 편해요.”

“아니, 저는…….”

준영은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날아오는 호의에 익숙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녀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잰걸음으로 부엌에 들어갔다.

마당에 꽃무늬 바지를 든 채 덩그러니 남은 준영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범진이 고개를 짧게 내젓고는 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 방향을 흘겨본 뒤 준영은 제 방으로 들어섰다.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바닥이 습하고 끈적하다. 푹 자면서 피로를 풀기에는 역부족일 게 뻔했다. 욕조는커녕 씻을 때 온수나 나올지 의심스러운 환경이니 말이다.

아직도 완전히 마르지 않아 살에 달라붙어 있는 치마를 벗으며 준영은 이를 갈았다.

두고 봐, 권범진.

네가 잊고 있던 기억까지 탈탈 털어 줄 테니까.

* * *

옷을 갈아입고 얌전히 방에 앉아 있다가 할머니의 부름에 밖에 나간 그녀는 막 목에 수건을 걸고 욕실에서 나오는 범진과 마주쳤다. 젖은 머리를 위로 쓸어 넘긴 탓에 준영은 처음으로 그의 완전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변하지 않았다. 조금 더 선이 강해진 느낌은 있었지만 틀림없는 권범진이었다.

진하게 뻗은 눈썹과 날카롭지만 시원한 분위기를 풍기는 눈매, 고집 있게 뻗은 콧날과 까맣고 강렬한 눈빛까지.

기분이 이상하다. 순식간에 그 시절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기도, 그곳에 살던 제가 지금으로 날아온 것 같기도 했다.

……저놈의 검은 티셔츠는 대체 몇 벌이 있는 것일까.

안에 입고 있던 옷을 벗고 그가 준 티셔츠만 입고 나온 준영은 괜히 어색한 마음에 눈을 굴리며 헛기침을 했다.

“온수는 잘 나와요?”

“안 나옵니다.”

짤막하게 대꾸한 범진이 스쳐 지나갔다. 저게, 하고 그를 흘끗 돌아보고는 준영은 욕실로 들어갔다. 다행히 수도에서는 미지근한 물이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의 연이은 부름에 샤워는 다음으로 미루고 손만 씻고 서둘러 나와야 했다.

고기찜에 가까운 김치찌개는 맛있었다. 반찬은 바닥이 탄 계란찜과 상추쌈뿐이었지만 갓 지어 낸 밥과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꽃무늬 바지를 입고 자리에 앉은 그녀는 당당하게 밥을 먹었다. 범진의 시선은 한 번도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녀에 대해, 정확히는 범진과의 관계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았지만 꼬치꼬치 묻지는 않았다. 대신 번화가에 태워다 주라는 말을 일부러 꺼내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쪽을 택했다.

“아무래도 아가씨니까 필요한 게 많을 거야. 저녁 먹고 얼른 다녀오라구.”

“어차피 내일 호텔 가게 되면 거기서 구하면 돼요. 뭘 굳이.”

“내가 내일 호텔 간다고 누가 그래요?”

눈을 치뜨자 범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편해할 게 뻔하니까 하는 소립니다.”

“말했잖아요. 이런 환경 익숙하다고.”

“그렇다고 굳이 여기 있을 필요 뭐 있어요?”

“당신이 있으니까.”

짤막하게 대답하자 비로소 범진의 눈길이 날아왔다. 놀랐는지 날렵한 눈매가 조금 부풀어 있다. 깨끗하게 드러난 잘생긴 이마를 바라보며 준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현장 갈 때도 같이 나가면 편할 거고.”

하, 하고 한숨을 내뱉은 범진이 목덜미를 주무른다. 할머니가 은근히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등을 찰싹 내리쳤다.

“아가씨가 시원시원하구만. 다 먹었으면 얼른 다녀와.”

“저건 시원시원한 게 아니라…….”

무어라 입을 열던 범진이 짧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냥 고집부리는 거예요.”

“통성명도 안 한 상대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꼬집듯 말하며 준영은 몸을 일으켰다. 바지에 그려진 꽃무늬가 팔랑거린다.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범진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비딱하게 웃어 보였다.

“태워다 준다면 거절은 안 할게요. 잘 먹었습니다.”

할머니의 호기심 어린 시선 속에 그녀는 마당으로 내려왔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끈끈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지만 준영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는 좀처럼 사라질 줄 몰랐다.

* * *

차로 그녀를 태워다 주는 동안 범진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준영도 괜히 입을 열지는 않았다. 기어코 저 입에서 먼저 저를 알은척하는 말을 들어야겠다는 오기가 생긴 탓이었다.

“여기면 되겠네요.”

널찍한 길 좌우로 상가들이 보여 준영이 입을 열었다. 집이 있는 골목과는 다른 세상처럼 밝았다. 준영은 저를 따라 내리는 범진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쇼핑 같이 하려고요?”

“건너편 약국에 있을 테니 끝나면 그쪽으로 와요.”

“여자랑 쇼핑 안 해 봤어요? 그렇게 금방 안 끝날 텐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하자 범진이 낮게 탄식하듯 숨을 뱉었다.

“뭘 얼마나 사려고……. 내가 끝내고 그쪽으로 가죠.”

씩 웃은 준영은 눈에 보이는 스파 브랜드 매장으로 들어갔다. 사실 그녀는 물건을 오래 고르는 편이 아니었다. 회사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무얼 사든 가장 싼 걸 사서 썼다. 재단의 지원이 있기야 했지만 생활비까지 전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이전의 생활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지만 말이다.

그녀가 가진 것 중 가장 비싼 것들은 모두 승운이 선물로 떠안긴 것들이었다. 입학이라서, 졸업이라서, 생일이라서, 회사에 합격해서, 자기가 기분이 좋아서. 이유는 끊임없이 있었다.

하지만 개중에 준영이 즐겨 쓰는 것은 서류 가방 하나밖에 없었다. 술에 취하면 승운이 항상 트집 잡는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맨정신일 때는 한 번도 그런 얘길 꺼내지 않았기에 준영은 늘 못 들은 척하곤 했다.

가격을 확인하며 네이비색의 슬랙스와 하얀 블라우스를 꺼내려던 준영이 잠시 멈칫했다. 옆에 만 원 비싼 블라우스가 있었는데 부드러운 핑크색에 목선이 시원하게 파여 있었다.

어느 게 더 예쁘냐고 묻는다면 이쪽이다. 잠시 망설이던 사이 손이 저절로 핑크를 집어 들었다.

“5만 9천8백 원입니다.”

내 손으로 이런 블라우스를 사다니. 그것도 지금처럼 효율성을 따져야 할 시점에서.

아니, 이유 따지지 말자. 괜히 머리만 아프니까.

제 행동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준영은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을 마친 쇼핑백을 들고 밖으로 나와 두리번거리던 준영의 눈에 범진이 들어왔다. 비닐 봉투를 손목에 건 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제법 웃기까지 한다.

……설마 애인은 아니겠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가 지나치게 길다. 뚫어져라 빨간불을 노려보다가 그게 파란색으로 바뀌자마자 준영은 재빨리 달려 나갔다.

순간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옆에서 무언가 달려들었다. 놀란 준영은 옆으로 피하려다 발이 꼬여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다행히 코앞에서 급정거한 오토바이 주인이 헬멧 창을 젖히며 버럭 소리쳤다.

“아니, 갑자기 튀어나오면 어떡해요!”

파란불이었단 말이다, 이 미친 자식아.

버럭 외치며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심장이 쿵쿵대며 뛰고 있는 탓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오토바이 주인이 길을 건너다 말고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안 부딪쳤어요. 그냥 넘어진 겁니다.”

“윤준영!”

그때 정확히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준영이 고개를 들었다. 길 건너에서 그녀를 발견한 범진이 무섭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오토바이는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충분히 그럴 만큼 위협적이긴 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준영은 순식간에 다가와 곁에 앉는 범진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다쳤어? 치인 거야? 저 뺑소니 새끼가……!”

“안 부딪쳤어. 그냥, 놀라서 넘어진 거야.”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쇼핑백을 향해 손을 뻗자 먼저 그것을 낚아챈 범진이 그녀를 부축했다. 천천히 일어서 봤지만 다리는 멀쩡했다. 무릎이 따가워 고개를 숙이자 찢어진 바지 사이로 피가 맺힌 게 보였다.

“일단 건너자. 걸을 수 있겠어?”

“응.”

가까운 길 쪽으로 나온 준영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심장이 쿵쿵대며 뛰고 있었지만 아까와 같은 이유로 그러는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범진은 그녀의 등과 어깨를 감싼 채 거의 끌고 가다시피 벤치 쪽으로 걸어갔다.

“앉아 봐. 발목 돌려 보고. 통증 느껴지는 데 없어? 여기 다리 올려 봐.”

준영은 저를 벤치에 앉혀 놓고는 발밑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질문 세례를 퍼붓는 그를 바라보았다.

눈으로 사람 잡겠네. 따지자면 나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데 왜 나를 이렇게 잡아먹을 듯이 보는 거야.

뼈를 가볍게 눌러 보면서 제 눈치를 살피는 범진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바지 찢어져서 어떡하지? 할머니가 아끼시는 걸까?”

“넌 지금 그게 걱정이냐? 일단 병원부터 가. 지금 괜찮은 것 같아도 괜찮은 거 아닐 수 있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반론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엄격했다. 오토바이가 달려간 방향을 다시 한번 바라보는 범진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준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그냥 놀라서 주저앉은 것뿐이야. 닿지도 않았어. 그런데.”

길게 숨을 들이쉬자 범진의 눈길이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준영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나 기억 못 하는 거 아니었네, 권범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