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 ……회사 전화로 안 걸면 사적인 용건이라는 거 알면서.
“네. 그렇지만 지금은 근무 중이라서요.”
딱 떨어지는 그녀의 말투에 승운이 침묵했다. 준영은 그가 깊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를 들으며 박형준이 이전에 제출했던 보고서를 펼쳤다. 두 줄도 채 읽기 전에 승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 지방에 갔다면서? 언제 돌아와?
“며칠 걸릴 것 같습니다. 확인해 볼 것들이 좀 많네요.”
- 며칠이나? 어디 호텔에 묵는데?
준영의 눈썹이 비딱하게 치켜 올라갔다. 손에 들린 볼펜으로 보고서를 톡톡 치며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 제발 그 존대 좀 그만해. 공식적인 퇴근 시간은 지났잖아.
공식적인 퇴근 시간 운운하는 경영기획팀 팀장이라니. 탄력 근무제를 시행하는 요즘 분위기 속에서도 차마 그러지 못하는 부서가 바로 경영기획팀과 리스크관리팀이다. 그녀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숙소는 아직 안 정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출장이어서.”
- 그럼 H 호텔로 일주일 정도 예약해 둘게. 잠이라도 편하게 자. 해외 출장도 다녀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지방이라니, 성 팀장도 정말 너무하네.
과연 이 출장에 나승운이 완전히 무관하겠냐마는 무지한 자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준영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출장에 과분한 숙소네요. 숙소는 출장비에 맞게 제가 알아서 정하겠습니다. 달리 하실 말은요?”
- 준영아. 나는…….
순간 벌컥, 거칠게 열리는 문소리에 한숨과 함께 귓가에 울리던 승운의 목소리가 단박에 묻혔다. 고개를 돌린 준영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어디서 났는지 원래의 색보다 두 톤은 바랜 듯한 검은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범진이 사무실 안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직원이 은근한 호기심을 내비치며 다가간다. 제 옷이 아닌지 범진이 입은 티셔츠는 그의 몸에 지나치게 달라붙어 탄탄하게 갈라진 근육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정말 같이 갈 겁니까?”
안쪽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한 범진이 직원의 접근을 무시한 채 불쑥 묻는다. 준영이 눈꼬리를 치뜨며 벌떡 일어났다.
“당연하죠.”
“나와요, 그럼.”
범진이 다시 문을 닫고 사라졌다. 준영은 테이블에 펼쳐 놨던 서류를 빠르게 정리해 가방에 밀어 넣었다.
- 준영아?
“급하게 가 봐야 돼. 얘기는 나중에 해.”
전화를 끊은 준영은 얼른 가방을 어깨에 멨다. 가벼운 흥분감에 팔에 소름이 돋은 것 같았다.
침착하고 싶지만 사실은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된 범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일에 무심하리만치 담담해서 사람들은 그녀가 매우 냉담한 성격이라고 말하곤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권범진이 예외일 뿐.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녀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심장이 걸음걸음마다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 * *
밖으로 나가자 그녀의 눈앞에는 조수석 문이 열린 차가 세워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제법 구형인 승용차는 여기저기 찌그러져 있었다. 굴러는 갈까, 생각하며 준영은 서둘러 조수석에 올라탔다.
문을 닫자 눅눅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문득 비에 흠뻑 젖은 뒤 씻지도 못했다는 것이 떠올라 준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냄새라도 나면 어떡하지.
“벨트 매요.”
나직한 목소리에 준영은 기계적으로 벨트를 당기며 옆에 앉은 범진을 슬쩍 바라보았다. 정면을 주시하고 있던 범진이 핸들을 돌렸다. 의외로 차는 매끄럽게 움직였다.
권범진을 만난 것으로 모자라 그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있다니. 아직도 그녀의 머릿속의 권범진은 고등학생인데 말이다.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가 않아 준영은 헛웃음을 흘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묘하게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 머리로 앞이 보이긴 해요?”
비딱한 말투로 묻자 범진이 건조하게 대꾸했다.
“눈 감고도 갈 거리라서.”
“여기서는 언제부터 일했어요?”
“한 달 좀 넘은 것 같군요.”
“사무소 소개로 들어온 건가요?”
“그런 셈이죠.”
“그럼 그 전에는요?”
와이퍼를 작동시키던 범진이 그녀를 곁눈질했다. 준영은 눈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덥수룩한 앞머리에 눈이 반쯤 가려 있어 가까이에서 보고 있는데도 표정을 알아챌 수가 없었다. 준영이 재차 물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데요?”
짧게 숨을 내뱉은 범진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건 회사 일과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요.”
“있을 수 있죠. 내가 사무실에서 찾아본 이력서에 당신 서류는 없었고, 최영복 씨가 날 괜히 당신에게 토스한 것 같진 않으니까.”
준영이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인부들의 명단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간단하게나마 권범진의 인생 역정이 나와 있을 서류 말이다. 그러나 몇백 장에 달하는 서류들을 눈이 빠져라 뒤적였는데도 범진의 이름이나 사진이 붙어 있는 서류는 없었다.
대신 찾아낸 것은 백발의 서류였다. 최영복. 나이 47세. 현장에서 뼈가 굵은 인부.
“반장.”
문에 느슨하게 한쪽 팔꿈치를 걸치며 범진이 내뱉는 말에 준영은 미간을 바짝 좁혔다.
“뭐라고요?”
“최영복 반장이라고 불러요. 혹시라도 면전에 대고 씨라고 불렀다가는 다시는 현장에 발도 못 붙이게 될 테니까.”
“그 사람이 내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어요.”
뾰족하게 대꾸하자 범진이 순간 피식 웃었다.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를 보니 가슴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때의 기분 그대로의 윤준영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준영은 이를 악물었다.
“뭐가 웃겨요?”
“현장이 꽤 시끄러워지겠구나 싶어서요.”
고개를 조금 앞으로 내민 범진이 길을 살피며 핸들을 틀었다. 차가 어느새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창밖을 둘러보는 준영의 귓가에 범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리 말하는데, 다른 곳 알아보는 게 좋을 겁니다. 택시 잡기는 번거롭겠지만 10분만 나가도 꽤 괜찮은 호텔들 있어요.”
확실히 그렇다. 가로등이 없는 데다 좌우에 있는 낡은 집들 중 불이 켜져 있는 곳이 많지 않아 골목 자체가 어두웠다.
꼭, 엄마와 함께 살던 그 골목처럼.
“더럽거나 좁은 게 문제라면 상관없어요. 그런 집에서 살아 본 적 있으니까.”
낮게 중얼거리자 범진이 저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차는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가다 멈췄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준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문을 열고 내렸다.
“여기예요?”
담벼락이 낮은 집은 마당이 꽤 컸다. 사람이 살고는 있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허름했으나 그래도 방이 몇 개는 있어 보이는 제법 평수가 넓은 집이었다.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낮보다는 빗발이 약해져 있었다. 준영은 우산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범진의 뒤를 쫓았다.
수도 근처에 서 있던 할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매콤한 김치찌개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김 씨 왔나?”
“네.”
허리가 굽은 할머니의 눈이 준영에게 머물렀다. 안쪽 방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비친 주름진 눈이 휘둥그레 떠져 있었다.
“아니, 어디서 웬 아가씨를 데려왔어? 이게 무슨 일이래?”
“금방 갈 거예요.”
처마 밑에 선 범진이 팔짱을 낀 채 준영을 돌아보았다. 적당히 포기하고 가라는 듯한 그 심드렁한 태도가 사람을 자극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코웃음을 친 준영이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며칠 묵을 숙소를 찾고 있는데요. 여기 혹시 방 있나요?”
“숙소? 하이고, 여기는 젊은 아가씨가 묵을 만한 곳이 못 돼. 저 길로 쪼금만 내려가면 번화가라 깨끗하고 좋은 곳이 많아요. 우리 집이 원래 예전에야 민박도 하고 그랬지만 지금은 집이 워낙 낡아서. 김 씨가 장난을 쳤는가 보네.”
할머니가 웃으며 대번에 손사래를 친다. 준영도 덩달아 빙긋 웃었다.
“저는 괜찮아요. 아무 데서나 잘 자거든요. 제가 여기 있는 김 씨랑 출근하는 곳이 같아서요. 차도 없어서 가까운 곳이 좋을 것 같은데, 방이 없나요?”
“아니, 방이야 있지만…… 아무래도 낡아서. 화장실이랑 씻는 곳도 여기는 하나뿐인데. 아가씨는 손님으로 받은 지도 오래됐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할머니가 범진의 눈치를 살폈다. 범진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고집 피우지 말고 가요. 회사에서 비용을 안 대 주는 것도 아닐 거고. 바래다줄 테니까.”
“왜요? 난 마음에 드는데.”
사실 마음에 안 든다. 연이은 출장과 과로로 삭신이 쑤시는 건 둘째 치더라도, 그녀는 이미 편하고 깨끗한 공간에 익숙해져 있었다. 굳이 옛날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런 곳에 머물 필요는 없었다. 출장비는 넉넉했으니까.
하지만.
준영은 성가시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범진을 쏘아보았다.
기가 막힌 우연으로 권범진을 다시 만났는데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냐마는, 그는 내일 당장이라도 사라져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우연이 두 번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사라진다고 해도 제 궁금증은 모조리 풀어 주고 가야 했다. 그러지 못하고 놓쳐 버린다면 평생 이 순간을 기억하며 후회할 게 뻔했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
“부탁드릴게요, 어르신.”
준영은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정중한 그녀의 태도에 할머니는 어쩔 줄을 모르며 범진을 바라보았다. 길게 한숨을 내뱉은 그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하루 묵어 보면 바로 나갈 거예요. 밥이나 먹죠. 김치찌개예요?”
“돼지고기 넣고 푹 끓여 놨는데 밥이 아직 안 됐어. 씻고 조금만 쉬다가 와. 그럼 아가씨는 방이나 한번 봐요. 이쪽으로.”
준영은 할머니를 따라 왼쪽으로 향했다.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범진의 시선이 느껴져 그녀는 입술을 비죽였다. 할머니가 그녀의 기색을 살피다 넌지시 물었다.
“근데 김 씨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래?”
“모르는 사이예요.”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할머니가 의아하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지금 입고 있는 거 김 씨 옷 아닌가? 아침에 입고 나간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