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37화 (37/86)

<37화>

준영은 똑바로 범진을 마주 보았다. 젊은이 핑계를 대긴 했지만 백발이 범진을 앞에 내세운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궁금했다.

그런 식으로 사라졌다가 이런 식으로 나타나기까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부딪쳐 오는 그녀의 시선을 가만히 받고 있던 범진의 입술이 잠시 달싹였지만 그는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일꾼 중 하납니다. 보시다시피.”

“라면 잘 끓이는 김 씨지, 뭐.”

“아가씨도 관심이 있나 본데.”

“김 씨가 몸이 좋긴 좋아.”

어느새 주변을 둘러싼 채 둘의 말씨름을 관전하고 있던 인부들이 한마디씩 말을 보탠다. 미간을 치켜세운 준영이 쏘아보자 그들은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범진이 손을 내저으며 사람들을 물렸다.

“이제 일들 하러 가시죠. 빗물 고이기 전에 곰빵(현장에 반입된 자재를 필요한 위치에 소량씩 옮겨 두는 것)은 끝내야죠.”

“참 나. 현장 밥 얼마나 먹었다고 아는 척은. 맨날 밤낮으로 처자는 주제에.”

“자꾸 그러면 또 가서 처잡니다. 나 없이 하다가는 이 중 절반은 도가니 나갈걸요.”

틀린 말은 아닌지 백발이 입 안으로만 웅얼거린다. 준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려는 범진을 보고는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저기요!”

“어이구, 아가씨가 붙잡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누군가 킬킬댄다. 준영이 그를 노려보기도 전에 범진이 경고하듯 빠르게 말을 뱉었다.

“나가요, 그만. 여긴 사람 추락할 만큼 위험한 곳이니까.”

설마 나를 못 알아봤나?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깔끔하게 돌아설 수가 있다고?

기가 막히다. 언제 어디선가 그와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수십, 수백 번은 해 봤지만 권범진이 저를 못 알아볼 거라는 가정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그렇게까지 변했나?

아니면, 혹시 기억을 잃고 이름까지 바뀌었다든가.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상상을 하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준영은 이를 악물었다. 이름을 부르면서 알은척을 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좋은 자리도 상황도 아니었다.

저 답답한 앞머리 좀 치워 버렸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이를 악물고 있던 준영은 주먹을 말아 쥐고는 턱을 쳐들며 말했다.

“괜찮은 숙소 하나 소개해 줘요. 며칠 있으면서 내 눈으로 천천히 확인해 볼 생각이거든요. 기왕이면.”

짧게 숨을 들이쉰 그녀가 또렷하게 덧붙였다.

“당신이 묵는 곳 근처로.”

범진의 입술이 조금 벌어짐과 동시에 인부들 몇이 놀리는 듯한 환호성을 내질렀다. 백발마저 웃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범진이 한숨을 내쉰다. 그가 눈가를 비비며 비딱하게 웃었다.

“내가 묵는 곳은 당신 같은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닌데.”

“그거야 가 보면 알겠죠.”

“끝나려면 여섯 시간 이상 걸릴 겁니다.”

“기다릴게요. 사무실에서.”

권범진.

나는 너한테 할 말이 너무 많아. 묻고 싶은 건 더 많고.

절대로 빠져나가게 두지 않겠다는 듯한 그녀의 눈빛을 알아챘는지 범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돌아섰다.

“마음대로 하시든지요.”

“자자, 몸 충분히 풀고 시작합시다. 오늘은 근육통의 날이니까.”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던 인부들을 다독이며 백발이 현장 안으로 들어갔다. 수군거리면서 멀어지는 그들을 경계하듯 끝까지 쳐다보던 준영의 잇새로 탄식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움켜쥐고 있던 수건을 원래 있던 바구니에 냅다 던져 넣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권범진이, 나타났다. 내 눈앞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가 거품 꺼지듯 아래로 내려앉는다. 준영은 예전처럼 거의 긴 팔이 되어 제 팔을 덮고 있는 검은 티셔츠 소매를 바라보았다. 긴장이 풀리자 왜인지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2

그날 얼마나 기다렸더라.

맹세코 살면서 그날만큼 들떴던 적이 없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팝콘처럼 부풀어 터질 것만 같아서 가만히 있기 힘들 지경이었다. 먼저 집에 도착한 준영은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내내 주변을 서성였다.

그녀는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이 정도로 쏟아부은 자기를 이길 것 같았으면 임현태는 지금까지 한 번도 1등을 해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물론 확실히 성적이 나온 다음에 범진에게 대답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준영은 이런 심장 상태로 그때까지 버틸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부풀어 터질 거라면 지금 터뜨리는 게 나을 것이었다.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앞으로 우리는 뭐가 달라질까?

한 공간에 있는 게 너무 숨이 막힐 것 같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그 숨 막힘이 너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권범진은 앞으로 라면에 넣는 달걀을 터뜨리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앞으로 집에 갈 때 막대기가 아닌 서로의 손을 잡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아.

눈을 어떻게 마주치지.

하늘은 꼭 그들이 처음 피크닉을 했던 날처럼 맑았다. 시험을 보는 동안 겨우 미뤄 뒀던 생각들이 둑이 터진 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을 이리저리 따져 보며 실실 웃어 대던 준영이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이 흐른 뒤였다.

왜 이렇게 안 오지?

설마 물건 사다가 정말로 달걀이라도 맞았나?

시간이 갈수록 불안감이 커졌지만 준영은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그럴 리가 없다. 장담하지만 이 지역에 정말로 그렇게까지 간이 큰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퍽치기 범인이 잡혔다는 소문은 이미 퍼졌다. 굳이 범진에게 해코지를 할 것 같지 않았다.

……딸기잼을 못 구했나?

그러고 보니 전에 샀을 때 하나 남은 딸기잼을 가져왔던 기억이 났다. 포도잼은 여러 개 있었으니까 적당히 가져와도 되는데.

하필 내가 딸기잼을 강조해서.

마지막으로 제가 했던 말을 후회하며 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에 홀로 있으니 시간이 갈수록 피곤이 몰려왔다. 시험 기간에 거의 잠을 자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언젠가는 오겠지. 늦더라도 올 테니까 조금만 누워 있자. 그러고 나서 나를 깨우면 왜 이렇게 늦었냐고 구박을 좀 하다가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어야지. 딸기잼을 듬뿍 발라서.

그런 생각으로 2층에 올라간 준영이 깨어난 것은 한밤중이었다.

권범진은 오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준영은 영문도 모른 채 며칠을 참았다.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등교하지 않는 그를 두고 아이들은 또다시 각종 소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담임을 찾아가 이유를 물었다. 범진과의 관계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권범진이 사라져 버린 것보다 두렵지는 않았다.

담임은 보호자에게 범진이 아프니 며칠 집에서 쉬게 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정말로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당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섣불리 집에 찾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주가 지난 다음에도 범진은 등교하지 않았다.

준영이 변함없는 성적표를 받아 든 날, 담임은 그가 자퇴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때부턴 소문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았다. 범진에게 빌려준 물건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핑계로 얻어 낸 주소로 찾아갔을 때, 그녀는 텅 빈 집과 마주했다. 집 안은 급하게 짐을 챙겨 떠난 것처럼 어지러웠다. 낡은 놋쇠 대야와 슬리퍼가 마당에 뒹굴고 있었다.

준영은 곧장 경찰서를 찾았다. 제가 울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다행히 그녀를 알아보고 달려온 기룡을 붙잡고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는 말만 쉼 없이 내뱉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얘기지만, 기룡은 그때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는 의문의 세단 두 대를 조사하던 중이었다. 한눈에 봐도 평범한 사람이 아닌 덩치들이 마을을 기웃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와중에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급하게 트럭을 몰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봤다는 마을 주민을 찾아낸 것이다. 범진이 그 안에 타고 있었는지까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덩치들과의 연관성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 덩치 중 하나가 수도권에서 주로 활동하는 모 폭력배 조직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들은 마을에서 사라졌다. 범진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아본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그는 준영에게 범진이 아마도 어떤 상황으로부터 몸을 피한 것 같다고 말했다. 범진의 무사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로서는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금방이라도 거품처럼 꺼져 버릴 것 같은 준영에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는 준영에게 퍽 잔인한 시기였다.

그리고 그녀가 범진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채 결정하지 못했을 때, 또 하나의 불행이 그녀를 덮쳤다.

엄마가 원인 불명의 발작으로 쓰러진 것은 무덥고 지겨운 여름이 끝나 갈 때쯤의 일이었다.

“……리님. 윤 대리님.”

서류를 앞에 둔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준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공사 현장을 감독하는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직원이 겸연쩍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휴대폰이 계속 울리고 있는데요.”

“아, 네.”

어색하게 인사를 한 준영의 눈이 아직도 창문을 적시고 있는 빗줄기로 향했다. 해가 지고 있는지 이미 사위가 어둑해져 있었다.

한숨을 짧게 내쉬며 부르르, 몸을 떨고 있는 휴대폰을 흘낏 본 준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손에 들고 있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똑바로 적힌 나승운, 이라는 세 글자. 다섯 번째 부재중 통화였다.

급한 일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사실 팀이 다른 승운이 제게 급한 업무로 연락할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잠시 눈을 굴리고 있자 또다시 휴대폰이 울린다. 준영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윤준영입니다.”

- 어디야? 왜 이제 전화를 받아?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지만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드러났다. 준영은 서류를 천천히 뒤적이며 대답했다.

“진동으로 해 놔서 놓쳤습니다. 저한테 무슨 급한 지시 사항이라도 있으신가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