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36화 (36/86)

<36화>

좋든 싫든 회사에 소속감을 갖고 있는 회사원들과는 다르다. 공사 현장을 따라 떠돌아다니는 일꾼들은 개별적인 성향이 강했다. 매일 함께 흙을 나르고 밥을 먹고 술을 먹으니 끈끈해 보이지만 그 유대감은 일시적이고 단발적이기 마련이었다.

공사는 결국 끝나기 때문에.

그래서 얼핏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다고 해도 깨뜨리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그 유대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아저씨 이력부터 조사해야겠는데.

머릿속에 해야 할 일을 박아 넣던 준영에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뭐 아가씨가 무슨 힘이나 있나? 회사에 말하면 들어는 주냐고?”

“힘 있는 사람은 이런 곳에 안 와요.”

백발의 말에 무심하게 대꾸하자 금세 일그러진 열두 개의 눈이 그녀를 노려본다. 준영은 얼굴을 적시는 빗물을 훑어 내며 말했다.

“그분들은 사람이 아닌 보고서를 보거든요. 그 보고서를 작성하는 게 저고.”

적대적인 시선들이 순식간에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고집스레 못마땅한 얼굴을 고수하며 백발이 뒤를 흘끗 돌아보면서 물었다.

“김 씨는? 어디 있는데?”

“그 양반이야 뭐 서쪽 다락에서 잠이나 자고 있겠지.”

“맨날 그래 처자면서 또 자? 좀 불러와 봐라.”

가장 뒤쪽에 서 있던 인부가 구시렁거리며 걸어갔다.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준영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김 씨는 또 누군데 이 시점에 김 씨를 찾아. 백발이 리더인 줄 알았더니 제갈공명은 따로 있었어?

긴장을 풀기 위해 준영은 침착하게 말을 걸었다.

“사고 이후로 박 대리가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썼을 텐데요. 무슨 불편한 점이 있으셨던 거죠?”

“박 대리? 누구, 박형준이?”

코웃음을 치는 백발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스쳤다. 백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빗속을 울렸다.

“그놈이야 지 애인이랑 붙어먹으려고 여기 내려오는 거지, 어디 우리 일에 신경이나 쓰나? 차로 저기 입구까지만 와서 대충 휘이 둘러보고 허구한 날 술이나 처먹는 게. 사고당한 만수 놈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내가……!”

준영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원래 이쪽 일을 담당했던 박형준의 반질반질한 얼굴이 떠올랐다. 같은 팀이긴 했지만 그녀와는 그다지 교류가 없어 어떤 타입의 사람인지 알지는 못했다.

“사고 피해자분께 무슨 부적절한 행동을 했나요?”

“부적절이고 자시고 심기 거슬리게 건방을 떨어 대니까 하는 소리지.”

“보상금 얘기 하러 오면서 유세는 또 얼마나 떨었수.”

“지가 내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야. 다음부터는 발밑 좀 잘 보고 다니라는 말에 내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려다 말았다고.”

피해자 얘기가 나오자 뒤에서 수군대고 있던 인부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보탠다. 제법 인심이 있는 동료였던 모양이다.

분명히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린데 시선은 자기들끼리만 교환하고 있는 인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준영은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둘을 발견했다.

한 명은 아까 김 씨를 부르러 간 사람이니 다른 한 명이 김 씨일 것이다. 준영은 빗물을 손으로 닦아 내며 미간을 좁혔다.

덥수룩한 머리가 이마를 가리고 있는 남자는 키와 덩치가 컸다. 이곳에는 몸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어지간히 다부진 몸은 눈에 띄지도 않는데, 그는 골격 자체가 컸다.

게다가 다른 아저씨들보다 머리 하나가 솟아 있는 데다 흙먼지가 묻어 부예진 검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어 어쩐지 젊은 느낌이 풍겼다.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

저렇게 입은 젊은 남자만 보면 눈을 떼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지.

준영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한동안 모른 척하고 살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사실 저런 체형에 저런 옷을 입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해 보는 것은 몸에 밴 습관에 가까웠다.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따라 같은 일을 반복해 겪으면서 그녀는 기대하지 않는 법을 학습했으니까.

까칠하게 수염이 난 턱을 긁적이며 남자가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손질하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해 놓은 수풀 같은 헤어스타일 때문에 이목구비는 잘 보이지 않았다.

“뭔데 사람을 오라 가라 해요. 라면 끓이라고?”

걸걸한 목소리는 확실히 아직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왜일까.

빗속에서 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던 준영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것은 무언가에 대한 본능적인 감지에 가까웠다.

남자의 말에 인부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김 씨 라면이 맛있긴 하지.”

“참 희한하단 말이야. 뭐 하나 특별한 게 안 들어가도 맛있어. 젊은 양반이 얼마나 라면을 끓여 봤으면 그래?”

“귀찮아서 핑계 대는 거 다 압니다.”

땀을 식히려는 듯 티셔츠를 펄럭여 대는 그의 하품 섞인 대꾸에 백발이 언성을 높였다.

“맨날 처자는 거 거둬 주고 일 가르쳐 주는데 그거 하나 못 시키나?”

“그래서 전세금 반환 때문에 낑낑대는 거 해결해 줬잖아요.”

거리낄 게 없다는 태도에 백발이 오만상을 구기며 손짓했다.

“아, 회사에서 사람 나왔으니까 대충 얘기하고 보내. 아가씨가 따발총처럼 말을 해 대니 젊은이가 상대해야겠어.”

“웬 아가씨? 박형준은 어디 가고.”

코웃음을 친 남자가 고개를 돌려 정확히 준영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의 두 눈은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알 수 있었다.

비가 멈춘 것도 아닌데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시간이 기묘하게 느려지는 것 같았다.

준영은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10년 넘게 입 밖에 내 본 적 없는 이름이 단박에 그녀의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왜.

……왜 김 씨지?

어이없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녀는 범진을 바라보았다. 범진의 표정에는 별다른 기색이 떠올라 있지 않았지만, 그 역시 미동 없이 그녀를 보고 서 있었다.

한순간 주변이 진공 상태에 빠진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걸 깨뜨린 것은 백발이었다.

“뭘 멀뚱히 보고 서 있어? 예뻐서 첫눈에 홀딱 반했냐?”

그에게 등짝을 얻어맞은 범진이 꿈에서 깨어나듯 짧게 숨을 토해 냈다. 아무 말 없이 잠시 시선을 떨구고 있던 범진이 갑자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저, 저, 뭐 하는…….”

준영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으며 제게 다가오는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권범진은 상대를 향해 걸어오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위축시킬 수 있었다. 익숙해진 다음에야 아무렇지 않았지만 저도 처음에는 속으로 무척이나 긴장했던 게 생각났다.

권범진이 맞다.

그때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게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완전한 성인이 된 권범진이 눈앞에 있었다.

믿기 힘들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이 티셔츠가 스스럼없이 머리에 씌워졌다. 비를 맞아 피어오르는 먼지 냄새 속에 섞여 있는 희미한 나무 향을 맡자 돌처럼 굳어 있던 가슴 한구석에 균열이 가는 것 같았다.

티셔츠에 남아 있는 온기가 몸을 감싸고 나서야 준영은 제 체온이 꽤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석상처럼 우뚝 서 있는 그녀의 등을 범진이 가볍게 떠밀자 인부들 몇몇이 휘파람을 불어 댄다. 범진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사람이 비를 맞고 있으면 우산이라도 좀 씌워 주든가. 하여튼 노인네들 눈치하고는.”

그의 비난에 백발이 코웃음을 쳤다.

“그냥 안으로 들이면 그만이지, 뭘 옷까지 훌렁 벗어 줘? 근육 자랑해서 꼬셔 볼라고?”

“옷이 다 젖은 걸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아서요.”

금세 비 묻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앞서 걸어가는 범진의 등을 따라가던 준영의 눈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됐다. 여전히 까무잡잡한 등에서 옆구리 쪽으로 기다란 흉터가 나 있었다.

본의 아니게 그의 벗은 몸을 여러 번 본 적 있지만 저런 흉터는 없었다. 오래전 기억이긴 하나 확신할 수 있었다.

권범진과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뚜렷하게 기억나는 시기를 꼽으라면 바로 그때였으니까.

“그래서, 박형준 대리로 한경에서 오셨다?”

지붕 아래로 들어온 후에도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범진을 눈으로 좇던 준영은 저에게 날아온 질문에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구석에 있는 바구니에서 수건 하나를 들고 온 범진이 킁킁, 냄새를 맡고는 그녀에게 던져 주었다.

얼결에 수건을 받은 준영은 그걸로 선뜻 몸을 닦을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들고만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수건을 보며 범진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자세한 얘기는 그치한테 듣는 게 빠를 텐데요.”

다행히 범진의 사무적인 말투가 그녀의 이성을 끌어냈다. 준영은 서둘러 표정을 가다듬으며 수건을 움켜쥐었다.

“한쪽 말만 들을 순 없으니까요. 사실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제 일입니다.”

“거기까지가 당신 일이라면 우리한테는 별로 쓸모가 없는데.”

군더더기 없는 말에 준영의 젖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범진이 비딱하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으며 말했다.

“뭐, 흔한 일이죠. 인력 사무소 경쟁 붙여서 싼값에 공사 시작하고, 일정 가지고 사람들 몰아붙이면 사무소에서는 그거 맞추려고 허덕이느라 안전 설비에 하자 생기고, 과로는 말할 것도 없고. 결국 사고로 사람 하나 불구되고 나니까 신경 쓰는 척, 그나마도 경찰이 조사 나오는 거 인맥으로 유야무야시켜서 현장은 달라지는 거 하나 없게 됐죠.”

여러 의미에서 놀랐다. 준영은 저렇게나 길게 말을 하는 그를 본 적이 없었다. 더 놀란 것은 책이라도 보고 있는 듯 막힘없이 유려하게 흘러나오는 말이었다. 범진의 낮은 목소리가 덤덤하게 끝을 맺었다.

“이게 사실 관계입니다. 박형준한테 몇 번이나 얘기했던.”

……박형준, 이 개자식. 상황을 정리하고 있기는 개뿔!

물론 이런 현장은 많다. 하지만 대부분 인부들은 뭘 해야 할지 모르거나 나서서 찍히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불편하거나 힘들어도 눈앞의 임금을 바라보며 참고 견딘다. 그런 경우에는 경찰이나 행정 관청에만 손을 쓰는 걸로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긴 아니다. 잠잠해지는 것 같다가 다시 건축과에서 사람이 나온 걸 보면 인부들 쪽에서 신고를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일을 키우려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만한 사람은 아마도.

“실례지만 지금 말하는 분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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