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35화 (35/86)

<35화>

보통 이럴 때 경찰은 안전 수칙 준수 여부를 확인하고 작업자와 회사 관계자에 대한 업무상 과실 여부를 수사한다. 당연히 이 모든 일은 회사 측에 리스크로 보고되었다.

담당자들이 경찰 조사를 받는 것도 그렇고, 쓸데없는 타이틀로 기사가 나가 회사 이미지를 깎아 먹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공사가 늦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부지를 구해 새로 짓지 않고 가동이 중단된 폐공장을 인수한 것은 그만큼 사정이 급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공장의 준공 일정은 무척 빡빡하게 잡혀 있었고, 준공을 시작으로 줄줄이 생산 일정이 정해져 있었다.

공사가 지연된다는 것은 그렇게 정해 둔 올 한 해의 공장 가동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경찰과 시 행정부서에 이럭저럭 연이 있어 어렵지 않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던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이다. 준영은 해외 리스크 업무를 주로 맡고 있었지만 팀 내의 모든 일은 공유하는 게 원칙이었기 때문에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왜 내가. 이쪽 사람들과는 일면식도 없는데.

물론 제반 사항을 봤을 때 이런 식의 불합리한 일 배정이야 놀랍지도 않지만 말이다.

현장 담당자 역시 그녀를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준영이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을 보여 주자 아, 하고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청서 나온 주무관은 사고 있었던 현장을 다시 한번 보겠다고 그쪽으로 가 있습니다.”

“갑자기 왜 나온 거래요?”

걸음을 옮기며 묻자 남자가 마뜩잖은 얼굴로 대꾸했다.

“뭐 여기뿐만이 아니라 최근에 이 지역 공사 현장에서만 안전사고가 세 건 연달아 일어나서 시에서 신경을 좀 쓰는 모양이에요. 하필 지난달 행안부에서 안전 관리 실태 감찰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고.”

“우리 쪽 소스는요?”

“원래 도심재생과 팀장으로 있던 임하선이가 우리 쪽 인맥인데 요즘 그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나 봐요. 건축과 주무관이랑 같이 해 먹은 게 많아서 몸을 사리는지 통화가 잘 안 되더라고.”

빗방울이 조금씩 머리를 두드리는 게 느껴진다. 우산은 생각도 못 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준영은 가방을 고쳐 메며 물었다.

“지난주까지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 무리 없이 진행이야 됐지. 공사 올라간 거 보면 몰라요? 시에서 나온 애들이야 주머니에 돈 떨어지면 이쑤시개나 후비면서 한 번씩 이런 데 둘러보고 가는 게 산책 코스야. 저녁에 좋은 데 데려가서 밥이나 한 끼 먹이면 금방 해결된다고.”

남자의 말이 점점 짧아진다. 준영은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아까보다 굵어진 빗방울에 미간을 찌푸린 채 머리 위를 손으로 막고 있던 남자가 덩달아 멈춰 섰다. 준영이 그를 비스듬히 돌아보았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요?”

“뭘 책임을 져?”

“산책 나온 거니까 밥이나 한 끼 먹이면 해결된다는 말.”

무표정한 얼굴로 지그시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서 뭘 느꼈는지 남자가 눈을 굴린다. 준영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공사 진행에 12억. 사고 수습에 3억. 일정대로 준공이 되지 않을 시 예상되는 피해액이 남은 하반기만 대략 170억인데.”

남자의 실 같은 눈이 점차 휘둥그레 커진다. 망연히 벌어지는 그 입을 바라보며 준영이 냉담하게 덧붙였다.

“총 185억, 책임질 수 있냐고요.”

숨도 내쉬지 못한 남자가 입술만 달싹이며 어떻게든 시선을 피하려 허둥댄다. 빗줄기가 눈썹을 톡 치고 떨어진다. 준영은 조용히 쐐기를 박았다.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만큼 확실한 거 아니면 말 삼가세요.”

가뜩이나 안면도 없는 현장에서 이런 담당자에게 휘둘렸다가는 일은커녕 입씨름만 하느라 시간 낭비할 가능성이 크다. 애석하게도 어딜 가나 젊은 여자 한 명은 얕잡아 보이기가 쉬웠다.

낯선 현장을 장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상대에 따라 유연하게 다양한 수를 쓸 줄 아는 것이 리스크관리팀이 요구하는 능력 중 하나였다.

남자는 그 후로 목덜미를 크게 한번 물린 개처럼 얌전히 그녀를 안내했다.

빗소리가 제법 요란하게 난다. 몸이 젖고 있었다.

이런 날 이런 곳으로 저를 보낸 성 팀장의 따귀를 시원하게 후려치는 상상을 하며 걸어가던 준영은 공사 중인 건물 옆문 쪽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한눈에 봐도 공무원인 남자와 일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준영은 보폭을 넓혔다. 빠르게 걸어간 그녀가 사이를 가로막자 담배를 물고 있던 공무원이 눈썹을 까닥였다. 살집이 두툼한 40대 정도의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한경에서 나왔습니다. 무슨 용건이시죠?”

틈이 없이 매끄러운 목소리에 남자가 입술을 비딱하게 올리며 준영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가 낡은 가방 안에 있는 파일을 꺼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 다른 건 아니고 일전에 사고도 있었고 해서 안전 수칙 잘 지키고 있는지 현장 검증 나왔어요. 추락 사고도 있었고 하니까. 지하에서 용접할 때 원래 화재 감시자 배치해야 하는 거 알죠? 낙하 방지망 같은 것도 저기 서쪽 건물에는 찢어져 있던데. 그런 거 다 주의하셔야 됩니다.”

물론 첫인상이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말투나 태도로 봐서 그다지 성실한 공무원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낸 남자가 고개를 내밀어 그녀의 가슴 언저리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름이 잘 안 보이네. 윤, 준영? 아주 꽃 같은 아가씨가 오셨네.”

“검증 끝난 게 아니라면 제가 동행하고 싶은데요. 권고 사항이 있을 때 빠르게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아니아니, 뭐 오늘은 상황이나 좀 보려고 온 거니까. 근데 안전에는 좀 더 신경을 쓰셔야겠어. 저기 인부분들 걱정이 아주 많으신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준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옷을 입은 인부들이 하나같이 불퉁한 얼굴을 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후좌우에 적이니 살 수가 있나. 준영이 빠르게 눈짓을 하자 담당자가 얼른 남자의 곁에 들러붙었다.

“날짜를 잡고 오셨으면 맑은 날에 모셨을 텐데요. 아이고, 이걸 어쩌나. 어깨가 다 젖으셨네. 우리 사무실로 가서 따뜻한 차라도 한잔하세요. 여름에도 방심하면 감기 걸립니다.”

“날도 더운데 차는 무슨. 됐어요.”

“아니, 그러지 마시고.”

눈웃음을 치며 담당자가 거의 팔짱을 끼다시피 하며 남자를 끌고 갔다. 손을 내저으면서도 저를 흘끔 돌아본 남자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준영은 빗물을 머금고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기며 몸을 돌렸다. 딱딱한 말투가 흘러 나갔다.

“현장 감독 동행 없이는 쓸데없는 말 하지 마세요. 안전에 관련된 얘기라면 감독과 먼저 상의하는 게 순서 아닙니까?”

누군가 코웃음을 친다. 몰려 있는 대여섯 명의 인부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똑같았다.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그들을 보고 애써 한숨을 삼킨 준영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얘기하세요. 검토 후 개선하겠습니다.”

“웃기고 있네. 헛소리하지 말고 방해되니까 가쇼. 웬 계집애가 부정 타게 현장에 들어와.”

흰머리가 성성한 인부 하나가 퉤, 하고 침을 뱉는다. 준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놈의 계집애 소리, 회사 들어오고는 졸업했나 했더니.

그녀는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비딱하게 웃었다.

“부정 타면 현장이 어떻게 되는데요? 사람이 추락하나요?”

“거 말조심해요!”

험악한 삿대질이 사람 하나 죽일 기세로 날아온다. 돌아서려던 인부들이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준영은 무덤덤한 얼굴로 서서 입을 열었다.

“사람이 추락하는 건 여러 이유가 있겠죠. 본인의 부주의 때문일 수도 있고, 안전장치가 부족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계집애가 현장에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믿는다면 절 목숨 걸고 막으셔야죠. 왜 보고만 계시는 거예요?”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여기저기서 상소리가 튀어나온다. 멀뚱히 있다가는 벽돌이라도 맞을 것 같은 분위기다.

여기서 벽돌에 얻어맞으면 산재로 처리되려나, 하는 생각을 하며 준영이 말을 이었다.

“본인의 부주의라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안전장치에 관한 일이라면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어요. 공무원은 행정 조치를 내리는 사람이지, 여러분에게 필요한 걸 제공해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유사시에 여러분이 믿고 의지할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한 발만 더 들어가면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다. 시야가 흐려지는 걸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계속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제 말에 조금은 귀를 기울이는 듯한 분위기를 기민하게 눈치챈 준영이 슬쩍 발을 뗐다. 그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들어 처먹지도 않는 것들이 말만 번지르르. 믿고 의지할 상대? 적어도 그게 한경은 아니지.”

또다시 나선 것은 백발성성 아저씨였다. 주변 인부들이 웅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대꾸를 한다는 건 대화를 계속할 의지가 있다는 뜻이다. 준영은 그들 사이의 분위기를 기민하게 살피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회사에 제대로 된 요청은 하셨나요? 필요한 것들이 뭐가 있는지, 공사에 어떤 점이 방해가 되는지. 의견 단합이 잘되는 것 같은데 한목소리로 요구했다면 회사에서도 무시하진 못했을 텐데요. 지금 상황에 공무원이나 경찰이 끼어들면 아무도 원하는 걸 얻지 못해요. 시간과 비용만 들 뿐이죠. 문제가 있다면 결국 일을 해결해야 하는 당사자는 여러분과 회사니까요.”

백발은 팔짱을 끼고 코웃음만 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뒤에 선 인부들의 시선은 모두 그에게 꽂혀 있었다. 준영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흥미롭다. 이런 현장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자연스레 대변한다는 것이.

그 말은 즉, 그게 무엇이든 지금 인부들이 갖고 있는 불만이 공통된 것이며, 그 불만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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