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아, 잠깐 만나서 와인 한잔 했어요.”
가끔 나승운이 저렇게 나올 때마다 있는 힘껏 따귀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준영은 제게 날아오는 미향의 시선을 되도록 담담한 얼굴로 받아 냈다. 눈을 피하면 무언가 숨기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할 사람이니까.
물론 제가 그런 계산을 하고 똑바로 눈을 마주쳐 올 거라고 예상할 사람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러나저러나 제가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준영을 응시하던 미향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세라 데려다주고 그길로 준영이 만난 거야?”
“엄마, 그건…….”
적잖이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뜬 승운이 황급히 준영을 돌아본다. 미향이 느긋하게 깍지를 끼며 말했다.
“명인일보 둘째 정도면 나쁘지 않아. 뭣보다 언론사 하나는 끼고 있어야 이래저래 마음이 편하지. 걔 미술 한다고 프랑스 돌아다니다 잠깐 귀국한 거 겨우 소식 듣고 자리 마련한 거야. 애가 여간 도도한 게 아니라 아무나 안 만난다는데 네 사진 보고 오케이 했다더라. 잘생긴 얼굴에 감사해.”
“엄마, 그런 얘긴 나중에…….”
“다리 놔 준 준영이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잘해 봐야지.”
목소리를 낮춘 채 속삭이던 승운의 입이 그대로 멎었다. 준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제게로 날아오는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젓가락을 들었다. 이 껄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가장 아무렇지 않아 보일 행동은 그것뿐인 것 같았다.
“준영이가, 다리를 놔 준 거라고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승운이 나직하게 물었다. 미향이 물컵을 들며 대꾸했다.
“너 적은 나이 아니야. 늦어도 1, 2년 안에 결혼할 생각 하고 있어. 괜히 준영이까지 고생시키지 말고 알아서 잘하면 좀 좋아? 안 그러니, 준영아? 세라 꽤 괜찮지?”
미향의 말에 의도가 없는 말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대답하기가 훨씬 편해진다. 준영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네. 흠잡을 데 없습니다. 활기찬 성격에 운동도 좋아해서 승운이랑 잘 맞을 것 같고요.”
“거봐. 누구보다 너 오래 봐 온 준영이가 저렇게 말하잖니.”
이럴 때의 홍미향은 정말이지 악질이다. 저도 딱히 그보다 못하진 않지만 말이다.
준영은 미향이 말하는 동안에도 줄곧 저를 향해 있는 승운의 시선에 결국 고개를 돌렸다. 웃음기 하나 없는 다갈색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잘해 봐. 예쁘던데. 네 일에도 도움이 될 거야.”
꽉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승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속이 안 좋아서. 먼저 가 볼게요.”
작게 중얼거린 그는 그대로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혀를 쯧쯧 차던 미향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쟤는 네 어디가 좋아서 여태 저런다니? 내 아들이지만 취향 참.”
그걸 저도 알았으면 좋겠네요.
젓가락을 내려놓은 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답답한지 미향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아니, 왜, 유학 가 있을 때는 여자도 사귀고 그러더니.”
외로워서 그랬겠죠. 접근하는 여자야 항상 어디서나 많았고.
침묵이 이어지자 미향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게 보인다. 준영이 입을 열었다.
“선 잘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승운이가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니까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준영의 대답에 미향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팔짱을 꼈다.
“나는 너 안 믿어. 네 욕심을 믿지. 지금 네 손에 쥔 것들 다 버리고 싶은 건 아닐 거 아냐.”
물론이죠.
준영은 가만히 미향을 응시했다. 미향의 웃음이 짙어졌다.
“병원에는 종종 가고?”
왜 안 묻나 했다. 준영이 낮게 눈을 내리깔았다.
“네.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 마저 먹자. 여긴 디저트가 맛있어. 달지 않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미향이 손을 까닥이자 점원이 달려왔다. 달지 않아 맛이 없는 디저트가 제 앞에 놓이는 것을 보며 준영은 숟가락을 들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 * *
7시 24분. 준영은 시간을 확인하며 회사 건물에 들어섰다. 다른 팀의 출근 시간은 9시였지만 리스크관리팀은 한 시간이 일렀다.
“수고하십니다.”
경비와 눈인사를 한 뒤 그녀는 사원증을 찍고 사무실로 향했다. 보통 이 시간에 회사에 나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준영은 잠깐이라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오늘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성 팀장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피곤한 얼굴로 커피를 내리고 있던 그가 대충 손을 흔들었다.
성 팀장은 마케팅팀에서 일하다 작년에 리스크관리팀의 장을 맡은 사람이었다. 그는 홍 여사의 오빠인 홍인섭 사장과 같은 대학 출신으로 그가 지사에서 일할 때 한 팀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회사에는 암묵적으로 파가 갈려 있었다. 사장직을 맡고 있는 홍인섭과 부사장직을 맡고 있는 나현식. 성 팀장이 어느 쪽에 서 있는 사람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 보통은 일개 평사원의 의견 같은 것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준영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가 한경장학재단 출신인 데다 부사장의 아들인 현 경영기획팀 팀장의 친구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능력을 인정받아 최연소 리스크관리팀에 입성했고, 홍 사장의 동생인 홍미향 이사가 종종 불러들인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미향도 승운도 회사에서 그녀와의 관계를 감추려 들지 않았다. 미향은 제 손으로 키워 낸 인재라는 이미지를 씌우고 싶어 했고, 승운은 회사에서 처음 그녀와 마주치자마자 웃으며 손을 흔들어 댄 바보였다.
그러니 어쩌면 그녀가 부사장 집안의 새로운 식구가 될 거라고 점치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았다. 물론 미향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그런 말에 콧방귀를 뀌곤 했지만 말이다.
애초에 사람들은 내 생각에는 관심이 없지.
좋을 대로 판단하면 될 일이다. 어차피 승운이 결혼을 하게 된다면 사라질 소문이었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던 준영의 눈이 잠시 휴대폰에 머물렀다. 음식을 먹다 말고 그냥 나가 버리던 승운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 후로 연락은 없었다.
결국 그는 어머니의 뜻에 따르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으니까.
대학 때의 전공과 부전공, 유학을 가려는 학교, 그때 살 집, 그 학교를 가는 시기까지 전부 승운과 미향의 의견은 달랐지만 결과는 늘 미향의 뜻대로였다. 승운은 제 의견을 피력하기는 했으나 굳이 엄마의 고집을 꺾으려 하지는 않았다. 딱 그 정도였던 것이다.
게다가 승운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한 번도 저를 향한 감정을 입 밖에 드러낸 적이 없었다. 사실 미향과 그녀도 짐작을 하고 있을 뿐이지, 확실한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여자 친구를 사귄 적도 여러 번 있었고, 귀찮게 굴기는 했지만 스킨십처럼 선을 넘는 행동은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준영에게도 거절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가끔씩, 승운은 말로 내뱉는 것 이상의 확신을 주는 행동을 할 때가 있었다.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나 가까이 있을 때 그녀를 챙기는 태도, 그리고 어제처럼 제게 여자를 소개해 준 것이 그녀라는 것을 알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 때처럼 말이다.
누군가 그의 호의를 지금까지 이용한 적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그것들은 아주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승운을 잡아 오너 일가가 될 계산은 안 해 봤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아니라고 대답할 테지만, 그것은 준영에게 있어서 그다지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나승운은 미향의 말대로, 그녀가 지금 쥔 모든 것을 버릴 만큼 욕심나는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윤 대리.”
“네, 팀장님.”
상념을 깨뜨리며 날아온 무뚝뚝한 부름에 준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깨와 머리 사이에 낀 수화기를 틀어막은 성 팀장이 빠르게 말했다.
“부산 공장 이전 현장에 좀 다녀와. 시 공무원이 뭘 잘못 먹었는지 지난번 사고 건을 가지고 계속 물고 늘어지는 모양이야.”
준영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제가 책상 위에 펼쳐 둔 자료를 흘끗 보며 물었다.
“부산에요? 저는 오전에 TANDOZ 쪽과 미팅이 예정되어 있는데…….”
“그건 내가 진행할 테니까 다녀오라고. 공장 일정에 단 하루도 차질 생기면 안 되는 거 알지? 마무리 지을 때까지 아예 그쪽에 내려가 있어. 행정부에 있는 우리 쪽 사람들도 좀 만나 보고. 하루 이틀 사이에 해결될 것 같지 않아.”
갑작스러운 말에 무어라 반박하려 했지만 성 팀장은 이미 살갑게 웃는 얼굴로 수화기 너머의 상대와 통화를 재개한 뒤였다. 준영은 헛웃음을 흘리며 쥐고 있던 펜을 가볍게 던졌다.
이런 식이지. 다 된 프로젝트 빼돌리기.
2주 동안 출국만 세 번을 하는 스케줄을 소화하며 동분서주했더니 이제는 부산행이다. 기가 막혔지만 지금은 성 팀장에게 따지고 들 힘도 없었다.
게다가 쥐어짜 보자면 아주 장점이 없지는 않다. 내려가는 동안 잠깐이나마 눈을 붙일 수 있을 테고, 또 언제 불쑥 찾아올지 모를 승운을 피할 수도 있을 테니까.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가방을 챙겼다. 이제 하나둘씩 출근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하면서 사무실을 나서는 준영의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복도를 울렸다.
* * *
커피 한 잔만 마시면 소원이 없겠다. 속으로 되뇌며 준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덥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공기가 축축해서 속옷이 몸에 들러붙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부지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폐업한 공장을 인수해서 편의에 맞게 내부를 뜯어고치는 중이었는데 지난달 초에 사고가 한 건 있었다. 지붕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인부 한 명이 약 10미터 아래로 추락한 것이다.
다행히 목숨은 부지했지만 그는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크게 다쳤다. 수술 후 회복을 하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가능성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