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33화 (33/86)

<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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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건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마틴.”

유창한 영어에 지나가던 남자가 흘끗 돌아본다. 준영은 가로등 밑에 끌고 있던 캐리어를 잠시 세워 두고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새벽 1시 28분.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녀의 귀와 입은 쉴 새가 없었다.

피곤해 죽겠네, 정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녀는 지금 샌디에이고에 무려 3박 4일 일정으로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게다가 출장을 가기 전에도 사흘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이런 스케줄이니 길에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쓰러진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상상해 보면 겁이 나서 쓰러질 생각도 달아나는 것 같았다.

- 아니, 나는 당신 뜻이 필요해, 준. 그걸 알면 일의 향방을 알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렇게 생각한다면 난 더더욱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어요. 이달 말 전에 팀 검토 후 진행 여부가 결정될 겁니다.”

- 준. 한 마디면 된다니까.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잖아. 매각은 다음 주 안으로 반드시 진행해야 돼. 어차피 당신 의견이 보스 의견 아니야?

“입조심해요, 마틴. 같은 얘기만 한 시간 넘게 들었으니 나도 할 만큼 한 것 같네요. 끊을게요.”

- 잠깐, 준…….

통화를 마친 준영은 휴대폰을 무음 모드로 변경했다. 이런 시간에까지 그녀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전화는 딱 두 사람의 것인데, 한 명은 밤 10시면 수면제를 먹고 잠들고, 다른 한 명은 오래도록 별일이 없었다.

둘 다 요즘 컨디션이 좋았으니, 그들에게 전화가 올 확률은 거의 없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준영이 뻐근한 손목을 두어 번 풀고는 다시 캐리어를 끌었다. 밤이긴 해도 여름이라 그런지 불어오는 바람도 유쾌하진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눈을 감은 채 목덜미를 주물렀다. 5층에 내려 비밀번호를 누른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의 미간에 언뜻 주름이 잡혔다.

거실이 환했다.

“왔어?”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준영은 소리를 내지 않고 차오른 한숨을 삼켰다.

뻐근한 눈을 비비며 그녀는 구두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뒤로 돌아 묵직한 캐리어를 잡아당기는데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캐리어를 훌쩍 들었다.

“12시 전에는 올 줄 알았어. 10시 10분 도착 비행기였잖아.”

에어컨의 서늘한 바람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반팔 티셔츠에 베이지 톤의 면바지를 입은 승운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준영은 느릿느릿 걸어가 소파 위에 노트북 가방을 던져 놓았다.

“공항에서 급한 이메일 좀 보내느라.”

“TANDOZ 건?”

“웬일이야?”

식탁 위에 놓인 와인병과 글라스, 치즈 접시를 본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캐리어를 한쪽 구석에 밀어 둔 승운이 식탁 앞에 있는 의자를 그녀 쪽으로 돌린 뒤 등받이를 감싼 채 앉았다.

“우울해서 한잔할까 하고. 오늘 너 오는 날이기도 하고, 내일은 토요일이잖아.”

부드럽게 흘러내려 이마를 덮고 있는 헤어스타일 아래 순진한 강아지 같은 눈매가 살갑게 웃고 있었다. 오랫동안 규칙적으로 운동을 해 온 그의 몸은 한 번도 불필요한 살이 붙어 본 적이 없다. 그가 사내 행사에 참석할 때면 늘 주변이 시끌벅적하곤 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화사한 외모에 서글서글한 성격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나이에 경영기획팀의 팀장을 맡았어도 그다지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그가 나현식 부사장의 외동아들이라는 배경 때문이기도 했다.

준영은 부엌으로 가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어깨가 돌처럼 딱딱했다.

“주인 없는 집에 그만 드나들어. 특히나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더더욱.”

“일이 잘 안 됐어? 마틴 그 자식이 혹시 귀찮게 군 건 아니지? 지난번 미팅 갔을 때도 담당자는 성 팀장인데 너만 물고 늘어졌잖아.”

시차 무시하고 줄창 전화해 대는 마틴이나, 이런 시간에 아무도 없는 집에 버티고 있는 너나.

피곤하긴 했지만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만큼 분별없지는 않았다. 와인 글라스를 들고 온 승운이 그녀에게 내밀었다.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비행기에서 마셨어.”

“어머니가 모레 식사하자고 하셔.”

은근한 거절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승운이 글라스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하는 말에 준영은 미간을 좁혔다. 어깨를 짓누르는 돌이 순식간에 덩치를 키운 느낌이었다.

“……나도?”

“얼굴 보고 싶으신가 봐. 꽤 됐잖아.”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녀는 낮게 신음했다.

좀 쉴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또 시작이다. 홍 여사는 이런 식사 자리를 통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사내 안건들을 보고받는 것을 좋아했다. 아무래도 회사에 직접 나타나면 오빠인 홍 사장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 중 하나였다.

씻고 차가운 커피나 한 잔 타서 책상 앞에 앉아야겠다. 머릿속으로 할 일을 생각하며 준영은 소파에서 일어섰다.

“이제 그만 가. 그리고 한 번만 더 나 없는 집에 들어와 있으면 비밀번호 바꿀 거야. 이건 프라이버시 문제야. 이해하지?”

“준영아.”

매달리듯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불길함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시무룩하게 축 처진 눈꼬리가 보였다.

“나 여기 아니면 숨 쉴 데가 없어. 주변에는 다들 날 어렵게 생각하거나 이용하려고 하거나 둘 중 하나뿐이야. 아무 계산 없이 속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너뿐이라고. 알잖아.”

친구.

친구라.

그녀는 널찍한 어깨를 움츠리고 서 있는 승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준영은 그가 팀장으로서 회사에 있을 때 얼마나 당당하고 거칠 것 없는 사람처럼 구는지를 알기 때문에 저런 모습이 썩 와닿지는 않았다.

물론 확실히 그는 어중간했다. 지독하고 철저한 교육을 받아 온 다른 재벌 후계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당연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과 막역한 사이가 되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친구 타령이나 하는 것은 어릴 때나 가능한 일이다. 성인이 되고 대학에 오면서부터 승운은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소용돌이에 던져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홍 여사는 그가 잘 이겨 나가길 바랐고, 또 그렇게 됐다고 믿고 있을 테지만 사실은 다르다. 겉으로야 어쨌든 그녀의 여러 처사는 승운의 심리적인 고립감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 꼴이었다.

……속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라니.

너는 있다는데 나는 없으니 참 아이러니하군.

비딱한 생각을 하며 준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씻고 정신 좀 차리고 올게. 상대해 주는 건 딱 한 병뿐이야.”

그녀의 말에 승운의 입술이 금세 매끈한 곡선을 그렸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부엌으로 향했다.

“알았어. 과일 좀 꺼내 놓을까?”

“됐어.”

고개를 저으며 준영은 방으로 향했다. 잠옷이 아닌 티셔츠와 긴 바지를 꺼내던 그녀는 잠시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하루가 참 길다.

더 끔찍한 건 아마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것이었다.

* * *

날씨가 화창했다. 눈부신 햇살은 사람을 몽롱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너무 튀지 않는 패턴의 블라우스에 흰 스커트를 매치한 준영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일어섰다.

“이사님.”

“뭘 또 그렇게 격식을 차려. 앉아 있어.”

미향은 각이 잡힌 새하얀 블라우스에 시원해 보이는 파스텔 톤의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메이크업부터 헤어스타일까지 흠잡을 데 하나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너도 참 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 사람 편하게 대하는 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뻣뻣하긴.”

준영은 핀잔을 주며 자리에 앉는 미향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고등학교 때 이미 깨달았다.

너그럽고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대하는 이미지가 미향이 추구하는 바이지만, 정말로 그래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걸 구분 못 하고 선을 넘었다가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당장이라도 몇 개쯤 댈 수 있었다.

그녀가 제게 눈치 없고 요령 없는 역할을 주었다면 그렇게 연기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미향과 편한 사이가 되는 것은 이쪽에서 사양이었다.

“준영이한테 또 왜 그래요.”

한발 늦게 들어온 승운이 끼어들며 슬쩍 준영을 향해 눈웃음을 보낸다. 가늘게 뜬 눈으로 아들을 지켜보던 미향이 혀를 찼다.

“말끝마다 준영이, 준영이. 너 설마 회사에서도 그러는 거 아니지?”

“공사 구분은 합니다, 어머니.”

미향의 어깨를 가볍게 누른 승운이 의자에 앉고 나서야 준영도 자리에 앉았다. 미리 주문해 둔 코스 요리가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래서 얼마 전에도 싱가포르에 다녀오셨지만, 그쪽 회사에서는 경기 부양 목적으로 아시아 인프라에 투자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지방 정부를 중심으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부채 부담을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고, 그래서 생각보다 조금 더 장기적인 안목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그 부채 비율을 낮추기 위해 정부에서 내놓은 매물 중에 괜찮은 것들을 몇 개 추려 봤어요.”

준영은 들고 온 가방에서 클리어 파일을 꺼내는 시늉을 했다. 예상대로 미향이 질렸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얜 정말 일벌레야. 밥 먹자고 부른 자리에 이런 걸 꺼내 놓으면 밥이 들어가겠니?”

“죄송합니다. 옆에 두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준영이 옆자리에 파일을 내려놓았다. 통 젓가락에 손을 대지 않는 그녀를 주의 깊게 보던 승운이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 준영아. 그만하고 밥 좀 먹어. 어제도 늦게 자서 피곤했을 텐데.”

낮게 눈을 내리깔고 있던 준영의 손이 움찔했다.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미향을 보았다. 역시나 음식을 먹고 있던 미향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딱 멈춰 있었다. 미간을 치켜세운 그녀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승운을 돌아보았다.

“어제 혹시 준영이 만났니? 출장 다녀온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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