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32화 (32/86)

<32화>

심장이 뛴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내 억누르고 있었던 기분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순간 준영이 천천히 손목을 비트는 느낌에 그는 화들짝 놀라 손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그대로 거두어갈 줄 알았던 준영의 손은 미끄러지듯 내려와 그의 손가락 끝을 잡았다.

이제는 심장이 손끝에서 뛰고 있었다. 아득해진 시야에 개구쟁이처럼 씩 웃는 준영의 말간 얼굴이 박히듯 들어왔다. 그 어떤 것에 호되게 얻어맞아도 이런 기분일 수는 없을 것이었다.

“딸기잼 빼먹으면 가만 안 둬.”

속닥거린 준영이 그의 손을 놓고는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범진은 뻣뻣해진 목을 돌려 그녀의 뒷모습을 좇았다. 팔락팔락, 걸음걸이가 날아가는 나비처럼 가벼워 보였다.

다시 고개를 숙여 제 손을 흘끗 내려다본 범진의 잇새로 그제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온몸이 간질거리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다.

이렇게까지 귀여운 건 반칙 아니냐, 윤준영. 사람 정신 차릴 여유는 줘야지.

흐르는 미소를 막지 못하고 눈을 들어 올리던 그의 눈가가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문밖에서 승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승운은 무표정한 얼굴을 돌려 그대로 사라졌다.

다 봤나? 잡아서 물어봐야 할까? 괜히 들쑤시는 꼴이 되려나.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범진이 턱을 어루만졌다.

근데 저런 표정을 짓는 녀석이었나. 반성문 쓰는 법을 알려 주겠다는 말을 할 때의 실없는 얼굴이 기본값인 줄 알았는데.

가방을 챙겨 든 범진은 다시 한번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손은 못 봤겠지.

봤더라도 동네방네 떠들 캐릭터는 아니고. 준영이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니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범진의 입술이 또다시 기울었다. 준영의 심통 난 듯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기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서 알은척도 못 하는데 이래서 연애를 어떻게 해?’

연애.

연애라니.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교실을 나서는 그는 결국 소리 내어 짧게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한동안 이 입술은 통제가 안 될 것 같았다.

* * *

이상한 징후를 느낀 것은 돈을 챙기러 가는 길에서였다.

지갑에 돈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걸 좋아하니 케이크 하나 정도는 있어도 좋을 것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대답을 듣기로 한 때는 성적이 확정된 후였다. 하지만 아까 준영의 태도로 대답은 이미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 고백 아닌 고백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더 공부에 집중하는 것으로 준영은 이미 대답을 하고 있었다.

샌드위치 재료를 사 들고 집에 들어가면 잊지 말고 선물부터 꺼내야 한다. 가지고 다니다가는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는 라면을 보관하는 찬장에 머리핀을 미리 넣어두었다.

웃으면서 받아 줄까. 쓸데없는 걸 사 왔다며 면전에 던져 버리는 건 아니겠지.

촌스럽긴 해도 성의가 있는데. 물론 그 까탈스러운 성격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그림이긴 하지만.

이런 간지러운 생각들을 하는 자신이 낯설지만 싫지 않았다. 겸연쩍은 표정을 애써 억누르며 걸음을 옮기던 범진이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는 집 앞에 낯선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까맣고 낡은 세단이다. 군데군데 찌그러진 모양새가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평범한 차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차에는 여간해서는 야구 배트로 내리친 것 같은 자국이 여러 개 나 있지 않으니까.

순식간에 온몸에 경계심이 돋는다. 신경을 곤두세운 범진은 차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두어 걸음 물러났다.

숨을 죽이고 몸을 조금 낮추는데 집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덩치가 크고 시커먼 남자였다.

눈이 마주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삼촌?”

“범진아!”

턱이 넓적한 남자의 얼굴에는 덥수룩한 수염이 나 있었다. 근육으로 울룩불룩한 몸에 고집스레 까만 정장을 입고 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눈을 끔벅이는 사이 그의 앞까지 곧장 달려온 삼촌이 그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보았다.

“멀쩡하냐? 별일 없었고?”

“별일이야 있을 게 뭐…….”

반사적으로 대꾸하던 범진이 입을 다물었다. 삼촌이 고개를 주억이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가자.”

어딜, 하고 묻지 않았다. 이미 삼촌을 발견한 순간부터 범진의 머리는 이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 단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뿐이었다.

“지금, 바로?”

겨우 목소리를 내어 묻자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삼촌이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것저것 챙길 시간이 없어. 바로 부두로 가야 한다.”

어릴 때 거인 삼촌이라고 불렀던 그와 어느새 이렇게 눈높이가 같아진 걸까. 방금까지 발을 딛고 서 있었던 현실이 지난밤의 꿈처럼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둔해지는 귓가에 삼촌의 칼칼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집에 두고 가는 거 있어? 그것만 들고 나와.”

집에 두고 가는 것.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생각나는 건 하나뿐이었다.

내가 집이라고 생각하는 곳에는, 윤준영이 있는데.

무언가를 판단할 겨를도 없이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시간 얼마나 있어요?”

“5분. 늦어질수록 위험하다.”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삼촌이 초조하게 말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렇게 가는 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적어도 한 마디라도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한 마디가 비록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라도.

“잠깐만 어디 좀 다녀올……. 다쳤어?”

주먹을 움켜쥐고 막 뛰어갈 결심을 하던 범진의 눈가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삼촌의 손등에서 말라붙은 핏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냐. 범진아, 어딜 다녀올 시간은 없어. 이대로 가야 한다.”

땀과 먼지로 젖은 삼촌의 얼굴에 드러난 긴박감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퀭한 눈가가 피곤함과 경계심으로 찌들어 있었다.

자세한 상황은 몰라도 그가 삶보다 죽음과 가까운 곳에서 왔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제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어리광을 부릴 때가 아니다. 제 결정에 저 하나만의 삶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떠올리자 말아 쥐고 있던 주먹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그의 시선이 저절로 산 쪽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밤까지 저기 있다가 어두워지면, 혼자 어떻게 내려오나.

“범진아.”

띠띠, 하고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한결 다급해진 목소리로 삼촌이 부른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범진이 자동차 문을 잡았다.

“가요.”

삼촌이 운전석에 올라타고 곧장 시동이 걸렸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범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차가운 물 속에 가라앉은 것 같다. 잘 다져지지 않은 땅을 달리느라 차가 덜컹거리는데도 그의 시선은 점점 멀어지는 산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 다시 올 수 있을까요?”

범진을 흘끗 쳐다본 삼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핸들을 틀며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럴 수 있겠지. 살아 있으면 언젠가.”

따지고 보면 긍정적인 말이었지만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제가 원하는 만큼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윤준영이 저를 완전히 잊기 전에 말이다.

낯익은 풍경이 지나간다. 이 동네에 처음 와서 막막한 마음에 배회하던 길. 익숙한 곳에 있는 익숙한 트랙터. 마을 사람들이 주말마다 모이던 교회.

믿음교회를 바라보던 범진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가 창문을 두드렸다.

“삼촌, 잠깐만. 잠깐만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가 급격히 속도를 줄였다.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고 범진이 뛰어내렸다. 그는 곧장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에게 달려갔다.

“나승운!”

굴러온 바윗덩이처럼 묵직한 목소리에 승운이 자전거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범진을 발견한 승운의 눈의 휘둥그레 떠졌다. 그는 저를 한 대 칠 것처럼 다가오는 범진과 검은 세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깨가 저절로 오그라들고 있었다.

“권, 권범진?”

방법이 없다. 하지만 뭐라도 남겨야 했다. 비록 상대가 나승운이라도.

“준영이한테 미안하다고 전해 줘.”

대뜸 내던지듯 말하자 승운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서글서글한 느낌을 풍기는 두 눈이 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뭐라고?”

“혼자 둬서, 미안하다고.”

할 말은 더 많지만 시간이 없었다. 범진은 금세 서늘해진 승운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고개를 숙였다.

“부탁한다.”

당부하듯 마지막으로 시선을 한 번 더 마주하고는 그는 그대로 돌아섰다. 왔던 길을 달려가 열어 두었던 차 문 안으로 급히 들어섰다.

전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손에 쥐고 있어야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아함과 반감이 뒤섞인 얼굴로 저를 응시하는 승운을 지나치며 차는 빠르게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범진은 무거운 한숨을 삼켰다.

다시 만나자고 말하고 싶었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고.

하지만 그런 뜬구름 잡는 말이 준영에게 무슨 의미로 남을까. 정말로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기는 할까.

그리고 다시 만나는 게 과연,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까.

자신은 정상적인 삶이 틀린 놈이다. 반듯한 길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당당하게 걸어갈 윤준영과의 교차점은, 아마도 없을 것이었다.

돈 아끼지 말고 펑펑 쓸걸.

달걀 같은 건 하나도 터뜨리지 말걸.

단걸 좋아한다는 걸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조금만 더 일찍…….

좋아한다고 말했더라면.

그는 준영이 잡았던 제 손가락 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불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일이 벌써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선명하게 남아 있는 줄 알았던 그녀의 온기가 너무 빨리 사라지는 것 같아 범진은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며 눈을 감았다. 신음과도 같은 소리가 꽉 다문 입술 새로 낮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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