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31화 (31/86)

<31화>

불현듯 날아온 심드렁한 말투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입이 무방비하게 벌어졌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준영이 급작스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 내가? 네가 날 좋아하는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가 퍽치기범으로 몰리고 있는데, 어? 내 이미지 깎아 먹을까 무서워서 알리바이를 안 밝힌다는 게 말이 돼?”

냅다 소리치며 삿대질을 하려던 준영이 움찔했다. 성질껏 일어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일어나고 보니 책상에 걸터앉아 있는 범진과 지나치게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은근슬쩍 뒤로 한 발 물러서려던 그녀를 붙잡듯 범진이 중얼거렸다.

“말이 안 되지.”

“그러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준영의 미간에 천천히 주름이 잡혔다. 바닥을 향해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범진에게로 향했다.

“뭐?”

유난히 까맣게 느껴지는 눈동자가 고요한 밤바다 같다. 범진이 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마음은 내가 아니까 네 마음을 물어보는 거잖아.”

갑자기 밀어닥친 침묵이 흘렀다.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지만 제대로 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번에는 범진이 팔짱을 꼈다.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가끔 왜 그렇게 멍…….”

“그게 무슨 말이야.”

겨우 달라붙어 있던 입술을 뗀 준영이 더듬더듬 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왜?”

의외의 말에 범진의 눈썹이 실룩였다.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나도 그게 의문이다.”

순식간에 준영은 얼굴을 구겼다.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던 기분이 곤두박질치는 기분이다. 그녀는 금세 눈을 치뜨며 따지듯 물었다.

“그런 게 어딨어? 사람을 좋아하면, 그, 좋아하게 되는 순간 같은 게 있는 거잖아.”

흠, 하고 무언가 떠올려보는 것처럼 위쪽을 바라보던 범진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저었다.

“생각나는 게 없는데.”

막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온갖 험한 말을 애써 꾹꾹 누르며 준영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게 뭐가 좋아하는 거야?”

“자나 깨나 네 생각밖에 안 나는데.”

어깨를 으쓱인 범진이 그녀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좋아하는 게 아니면 미친 거겠지.”

권범진은 웃기는 재주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 입을 막는 재주도 있었다. 한참 만에 준영은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무의식중에 뒷걸음질을 치던 준영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얼이 빠진 것 같은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범진이 피식 웃고는 책상에서 내려왔다.

“할 말 끝났으니까 그동안 못 한 공부 마음껏 해라. 난 좀 자야겠다.”

“저기.”

준영은 산만하게 흩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범진을 돌아보았다. 계단에 막 오르려던 그가 고개를 돌린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이 튀어 나갔다.

“나는 시험 끝나고 대답할게. 1등 하면.”

사실은 지금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심장이 너무 뛰어서 제대로 된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범진이 꺼낸 공부 이야기에 지금 제가 집중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했고, 또.

떨리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은 이 솜사탕 같은 기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기도 했다.

그녀의 단서 조건을 들은 범진이 느릿하게 숨을 들이쉰다. 미간을 좁힌 그가 불쑥 물었다.

“만년 2등이 임현태였나?”

“그건 왜 물어봐?”

“묻어 버리게.”

고개를 까닥인 범진이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간다. 입술이 저절로 호선을 그리며 당겨진다. 아랫입술을 콱 깨문 준영이 애써 웃음을 참으며 외쳤다.

“야, 너 오늘 유치장에서 나왔거든? 위험한 말 좀 자중해 줄래?”

“그러니까 1등 해, 윤준영. 자존심을 걸고.”

오래지 않아 침대에 털썩 드러눕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려 의자에 바로 앉은 준영은 소리를 내서 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기분이 두둥실 떠오른다. 손등을 뺨에 가져가자 얼굴이 상기된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루 사이에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이렇게나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널 누가 이겨, 이 학교에서.’

범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준영은 천천히 가방을 열고 책과 펜을 꺼냈다. 책을 펼치자 그 안의 모든 글자들이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눈에 박히는 것 같았다.

“당연하지.”

나직한 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을 짧게 울렸다. 펜을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의자에 앉은 준영의 허리가 반듯하게 펴지고 있었다.

* * *

종이 울렸다. 범진은 손가락으로 돌리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 시험날의 마지막 시험이 끝난 것이다.

사실 그가 공부를 제법 열심히 하던 시절도 있었다. 수학과 과학에 꽤 흥미가 있었고, 암기도 곧잘 해서 성적이 나쁘지 않았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죽고 그의 생활이 어그러지기 전의 일이었다.

언제 이곳을 떠나게 될지, 또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르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핑계라고도 할 수 있을 테지만 범진은 그런 생각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요즘은 자꾸만 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든다. 매일같이 미친 듯이 공부에 매달리는 준영의 뒷모습을 봐 온 탓일지도 모른다. 특히 그녀의 최근 며칠간의 집중력은 정말이지 저러다 책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공부할 때의 준영은 마치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 같다. 펜으로 종이를 긁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존재하는 세상. 누구도 함부로 깨뜨릴 수 없는, 묘한 자기장 속에 둘러싸인 세상.

그걸 지켜보고 있으면 그 세상을 지켜 주고 싶기도, 제 손으로 깨뜨리고 싶기도 한 모순적인 기분에 휩싸인다.

범진은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저는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었다.

윤준영과 함께하는 미래가 보이지는 않는다. 그녀와 저는 갈 길이 너무 다르다. 하지만 만약에 준영의 마음이 자신과 같다면.

그렇다면 조금 더. 아주 먼 미래는 몰라도 가까운 미래까지는 함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조금씩 가다 보면 먼 미래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들 수고했다. 진짜 수고했는지는 채점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하여튼 정리 잘하고, 이상한 데 몰려다니지 말고. 이상.”

담임의 간단명료한 종례와 함께 아이들이 와아, 하며 우르르 일어섰다. 결과야 나중 일이고, 일단 이른 시간에 학교를 벗어날 수 있음을 기뻐하는 것이다.

뭘 할지 들뜬 목소리로 의논하며 가방을 챙겨 재빠르게 학교를 빠져나가는 아이들 속에서 범진은 웬일로 느릿하게 짐을 챙기고 있는 준영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교실이 거의 빌 때까지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가방을 멘 채 준영에게 무어라 말을 걸려던 승운이 범진을 흘끗 보고는 천천히 밖으로 나가자 교실에는 어느새 둘만 남았다.

복도가 시끌벅적하다. 팔짱을 낀 채 반듯한 준영의 등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 좌우를 돌아본 그녀가 느긋하게 일어나는 게 보였다.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아 범진은 낮게 눈을 내리깔았다. 곧 준영의 발소리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배고파.”

대뜸 말을 거는 소리에 범진이 눈을 치떴다. 교실에 다른 사람이 없음을 알고 있었는데도 자연스레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어이가 없어 헛숨을 내쉰 그가 미간을 좁혔다.

“시험은.”

“잘 봤냐고?”

코를 찡긋거린 준영이 그의 앞자리에 앉는다. 자리 하나가 가까워졌을 뿐인데 마치 교실이 아닌 그들의 집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범진은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임현태가 어디 있는지 찾아봐야 하냐고.”

그의 말에 눈을 둥글게 뜨던 준영이 이내 픽 웃는다. 조금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눈빛은 맑았다. 도톰한 입술을 비죽 내민 채 그녀가 투덜거렸다.

“시험 다 본 뒤에 애를 묻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아예 못 보게 했어야지.”

“자신 없단 소리야?”

도발하자 금세 눈꼬리를 바짝 추켜올린 준영이 눈을 부라렸다.

“하. 기가 막혀서. 야, 임현태를 누구한테 갖다 대? 걔가 날 이길 수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됐고. 먼저 나가. 애들 본다.”

턱짓하자 불퉁한 얼굴로 일어난 준영이 아, 하고 손뼉을 쳤다. 얼굴을 조금 낮춘 그녀가 작게 입을 가린 채 속삭였다.

“샌드위치 먹고 싶어.”

“그 단걸 왜 또……. 재료 다 버렸어.”

“또 사면 되지. 돈 없어?”

손을 당당하게 까닥이는 폼에 저절로 실소가 흘러나온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범진이 나직하게 말했다.

“사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그럼.”

“왜. 같이 가면 되잖아.”

“윤준영.”

태연하게 말하는 준영을 날카롭게 바라본 범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유치장에서 나온 지 며칠 안 됐다. 돌아다니다 달걀이나 안 맞으면 다행인 줄 알아.”

“네가 뭘 모르나 본데, 이 동네에 너한테 대낮에 달걀 던질 만큼 간 큰 사람 없어. 그리고 달걀을 그런 식으로 버릴 만큼 돈 많은 사람도 없고. 별걱정을 다 하네.”

준영이 비웃듯 어깨를 으쓱인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물러서는데 그럴 기미가 안 보인다. 범진의 눈썹이 가파르게 치솟았다.

“내가 뭘 걱정하는지 몰라서 그래?”

“신경 안 쓴다고 말한 것 같은데.”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를 내려다보던 준영의 입술이 비죽 나온다. 뺨을 둥글게 부풀린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사람들 앞에서 알은척도 못 하는데 이래서 연애를 어떻게 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단어에 순식간에 머릿속이 멍해진다. 느릿하게 눈을 한 번 깜빡인 범진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뭘 해?”

“못 들었으면 됐어. 난 갈 거야.”

“야, 잠깐. 윤준영!”

다급하게 일어선 그는 휙 돌아서는 준영의 손목을 제때 낚아챘다. 손아귀에 잡힌 손목이 참 가늘다. 그의 코앞에는 잔뜩 눈을 뾰족하게 뜨고 있는 준영이 서 있었다. 뺨이 발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