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개인적인 취향을 묻는다면 머리를 푼 쪽이 낫다. 그러니까 이런 핀으로 한쪽 머리를 고정한다면 머리를 풀고 있는 날도 조금은 늘어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졸린 오후, 교실 창문으로 불어온 바람에 그 머리칼이 날리는 것을 보면 문득 꿈처럼 느껴지곤 했다.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꿈.
어쨌든 분명 얼굴을 보면 성질을 낼 텐데 이런 걸로 달래지면 다행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범진은 산을 올랐다. 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간 그는 미간을 좁혔다. 평소와 다른 냄새가 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는 범진의 눈에 지난 피크닉의 흔적이 들어왔다.
여름날 며칠이나 방치된 탓에 식재료가 상해 가고 있었다. 다 좋은데 이곳에는 냉장고가 없었다.
잠깐. 그럼 그동안 준영이도 여기 안 왔다는 뜻인가?
그날 들고 왔던 봉투에 그대로 상한 식재료들을 쓸어 넣어 정리하던 그의 귀가 쫑긋 섰다. 평소보다 성급하게 집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그는 봉투를 든 그대로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는 준영을 마주 보았다.
“…….”
말간 뺨이 평소보다 붉어져 있었다. 커다란 눈이 유령이라도 목도한 듯 홉떠 있다. 보기만 하고 말을 안 하니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범진은 봉투를 여미며 덤덤한 척 물었다.
“왜 뛰어와? 배고파?”
“이…….”
순간 준영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본 범진이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녀가 냅다 던진 비닐 봉투를 가까스로 받아 낸 것은 순전히 그의 반사신경 덕분이었다.
두 손 안에서 물컹, 하고 부서지며 무언가 얼굴과 가슴팍에 조금 튀었다. 담백하고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 두부였다.
민망한 웃음을 터뜨리기도 전에 준영의 사자후가 집을 날려 버릴 기세로 날아왔다.
“야, 이 바보 멍청아! 넌 뇌가 없지? 생각이란 걸 안 하고 살지? 왜 말을 안 해? 왜 말을 안 하냐고! 그대로 있다가 수상쩍다고 꼼짝없이 범인으로 몰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대한민국 경찰 일 잘해. 일주일도 안 돼서 범인 잡았잖아.”
“그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사실을 말해야지! 없는 말 지어내라는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말했어야지. 그럼 내가 널 원망이라도 할까 봐? 물론 원망이야 했겠지! 나쁜 새끼 입 한번 가볍다고. 하지만 이해도 했을 거야! 어느 누가 그런 상황에 입을 다물어?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말이 귀를 때린다. 범진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윤준영.”
“거기 간 거 나 때문이잖아. 나 때문에 가서 그런 오해를 샀는데, 나 때문에 입을 다물어? 제정신이야? 그럼 내가 고마워라도 할까 봐? 그래, 고맙지. 아주 고마워 미치겠어! 무릎 꿇고 절이라도 할까? 참고로 난 절은 무조건 두 번 하는 주의라서. 기분 나빠하진 마.”
“준영아.”
“친한 척 성 떼고 부르지 마, 이 미친놈아!”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 퍽, 하고 가차 없이 그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학교에서는 아무리 어이없는 일을 당해도 침착하고 냉정하게 대처하더니 지금은 이성을 잃고 날뛰는 고슴도치가 따로 없다.
또다시 날아온 주먹이 가슴과 윗배 언저리에 꽂혔다. 이번 거는 제법 매웠다.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시험 사흘 남았는데 공부는 하나도 못 하고. 나 이번에 1등 놓치면 다 너 때문이야. 내 인생에 1등 아닌 성적은 필요 없는데, 너 때문에 못 하게 생겼다고! 내가 이걸 지금까지 어떻게 지켜 왔는지 알아?”
폭격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범진은 슬쩍 두부 봉투를 한 손으로 옮겨 쥐고는 다른 손으로 얼얼한 가슴팍을 문질렀다.
거기까지 책임을 물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준영이 얼마나 공부에 매달리는지 잘 안다. 어지간한 일에는 깨지지 않는 그녀의 집중력도.
그러니 공부를 못 했다면 제 책임이 맞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자꾸만 표정이 풀어지려고 해서 범진은 애써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널 누가 이겨, 이 학교에서. 너무 걱정 마라. 원래 시험은 평소 공부로 결판나는 거야.”
“웃기고 있네. 공부라고는 해 본 적도 없는 주제에 뭘 아는 척이야?”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는 거냐고 핀잔을 듣기 마련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준영이 화가 났다는 거니까.
“알았어. 뭐든 네 말이 맞으니까.”
범진은 보란 듯이 잔뜩 눈을 치뜨고 있는 준영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울지 마, 윤준영.”
커다란 눈동자에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진다. 빨개진 눈으로 여전히 그를 노려보며 준영이 이를 갈았다.
“우는 거 아니야. 짜증 난 거지.”
“그래 보이네.”
여기서 웃으면 정말로 끝장이다. 아무리 준영이 귀여워 죽겠어도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범진은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며 온 힘을 다해 엄숙하고도 겸허한 표정을 유지했다. 조만간 뺨에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너 진짜 짜증 나.”
“많이 듣던 소리…….”
준영이 무슨 욕을 해도 그는 고개를 끄덕일 참이었다. 하지만 살벌하게 말을 던져 놓고는 그대로 다가와 와락 제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에 범진의 사고는 그대로 정지했다.
으아앙, 하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가슴이 뜨겁게 젖어 든다. 등허리를 짓누르는 그녀의 손을 따라 열기가 후끈하게 자국을 남기는 것 같았다.
간당간당 손가락에 매달려 있던 두부가 떨어졌다. 하지만 범진의 귀에는 그 소리도, 울음소리 중간중간 섞여 있는 욕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저를 걱정한 누군가의 눈물이 얼마나 뜨거운지만 느껴질 뿐이었다.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갈 곳을 잃고 잠시 멈춰 있던 손이 제 품에 안긴 준영을 천천히 끌어안았다. 비어 있는 것도 몰랐던 가슴 속의 어딘가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윤준영.
준영아.
조용히 가슴으로 부르며 범진은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젖어 있는 머리칼에 파묻힌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9
준영은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눈이 부었는지 영 뻑뻑하다. 살면서 이렇게 울어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과 속에 쌓여 있던 앙금이 개운하게 사라진 느낌이 공존하고 있었다.
후루룩, 하고 남은 라면을 한입에 몰아넣은 범진이 그녀를 흘끗 보며 물었다.
“왜. 두부 넣고 끓인 게 별로야? 먹고 싶어서 사 온 거 아니었어?”
저게 진짜.
흘겨보았지만 눈썹을 들썩인 범진이 태연하게 국물을 들이켜는 것을 보자 눈에서 저절로 독기가 빠진다. 혀를 차며 준영은 마지막 한 젓가락을 입에 밀어 넣었다. 이 집에서 라면을 먹는 게 너무 오랜만인 것 같았다.
입을 우물거리며 그녀는 범진을 훔쳐보았다. 눈매가 조금 움푹해진 것 빼고는 멀쩡하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칼도, 까만 티셔츠에 청바지도.
하긴, 유치장에서도 자기 집처럼 드러누워 자고 있던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범진이 풀려났다는 소식은 종례 시간에 담임에게 들었다. 시험 준비 잘하라는 엄포를 놓던 그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처럼 말을 흘렸다.
‘내일부터 권범진은 학교 다시 나올 거니까 그렇게들 알고 있어라. 쓸데없는 소문들 그만 퍼뜨리고. 그럴 기운이 있으면 공부나 하란 말이야. 알겠냐?’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준영은 두부를 사 와 이곳으로 올라왔다. 천 원이나 지출했지만 아깝지 않았다.
물론 던질 생각은 아니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서 있는 범진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몇 날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공부도 못 했는데 원인 제공자가 너무 멀쩡한 얼굴로 서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그 경찰 아저씨가 아주 사기꾼은 아니었나 봐. 수사를 잘한다고 하더니.
“할 말 있으면 해. 갑자기 폭발하지 말고. 그렇게 난리 치고도 더 할 말이 있을까 싶다만.”
다 먹고 일어난 범진이 그릇을 치우며 말한다. 준영은 입술을 비죽였다.
“반도 안 했지만 봐줄게.”
“그럼 내가 하지.”
다시 돌아온 범진이 책상에 걸터앉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준영이 뾰족하게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그 경찰을 만나서 무슨 얘길 한 거야?”
“네가 안 한 얘기.”
“뭘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해? 가만있었어도 진범 잡히면 풀려날 거.”
미간을 좁힌 범진이 훈계하듯 말한다.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리며 준영이 팔짱을 꼈다.
“몰랐나 본데, 내가 그 경찰 아저씨한테 얘기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들 사이에서 네가 범인이었어. 네 알리바이 확실해지니까 마음 놓고 다른 데 파다가 범인 잡은 거 아냐.”
“그 정도로 잡힐 범인이면 어차피 잡혔어. 그 사람이 괜한 말 떠들어 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널 어떻게 볼지 몰라? 너까지 오물을 뒤집어쓸 필요는 없잖아.”
날렵한 눈매가 저를 향하자 어쩐지 뺨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준영은 헛기침을 하며 눈을 굴렸다.
“아무 말 안 할걸. 내가 한 말이 밖에 드러나는 순간, 그 아저씨는 경찰로서 바보 멍청이가 되는 거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하여튼.”
말을 자르며 준영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난 그런 거 아무렇지 않아. 남들이 멋대로 뒤집어씌우는 오물 같은 건 신경 안 쓴다고. 이미 오물 구덩이에 처박혀 있는데 좀 더 묻는 게 어때서? 그리고 어쨌든 무사히 풀려났잖아. 중요한 건 그거지. 내 덕인 줄 알아라?”
“그러게.”
뻔뻔한 그녀의 말을 의외로 순순히 수긍하며 범진이 턱을 어루만졌다.
“공부밖에 모르던 윤준영이 그 좋아하는 공부를 못 할 정도로 날 신경 썼다니, 고마워서 절이라도 해야겠는데.”
흘끗 저를 보는 그의 눈길에 준영은 또다시 목덜미가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시선을 비스듬히 틀었다.
“아니, 그건 꼭 너를 신경 써서라기보다.”
“너 나 좋아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