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29화 (29/86)

<29화>

덥수룩한 머리를 털어 내며 범진은 벽에 뒤통수를 쿵, 부딪쳤다. 유치장에 들어온 지 닷새째였다.

처음에는 정말로 곧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제대로 된 알리바이를 대지 않더라도, 어쨌든 범인은 내가 아니니까. 저를 범인이라 확정 짓고 영장을 청구할 게 아닌 다음에야 어차피 48시간을 넘기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에서 지켜보니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가 않았다. 현실은 그가 알고 있는 법조문과 조금 달랐다.

보호자 없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일까. 서장이란 사람이 와서 제 얼굴을 보고 간 다음부터는 더더욱 그랬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말과 저를 보는 경찰들의 눈빛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범진은 뻑뻑한 눈을 감았다 떴다. 회색 벽 위로 준영의 얼굴이 떠오른다. 발광하는 저를 본 뒤, 그대로 돌아서던 그녀의 뒷모습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지 않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날, 갑자기 경찰서에 나타난 준영을 봤을 때는 심장이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쳐지는 줄 알았다.

그는 소문의 성질을 잘 알았다. 그것은 아주 작은 먹잇감만으로도 집채만큼 몸집을 부풀리고, 한번 그렇게 커진 다음에는 더욱 자극적인 것만을 먹잇감으로 삼는다.

그때가 되면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진다.

시시한 진실 따위는 사람들의 눈과 귀와 입을 만족시키지 못하니까.

아무리 조심해도 제 입을 시작으로 한번 밖으로 퍼져 나간 말은 멋대로 변질되어 결국 준영의 목을 조를 것이었다.

모범생인 척하던 여고생의 이중생활. 소문난 문제아와 모텔이나 출입하는 음란한 계집애.

이런 소문은 당연히 저보다는 준영에게 들러붙는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녀에 관한 소문은 온 동네에 다 퍼지게 될 것이었다.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여기서 공짜 밥이나 먹는 게 낫다. 게다가 아무리 그래도 진범이 따로 있으니 곧 풀려날 줄 알았는데.

내가 우리나라 경찰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했나?

심드렁한 표정으로 범진은 턱을 긁적였다. 술집 골목이라고는 해도 대낮에 일어난 퍽치기다. 언뜻 듣기로는 실랑이조차 없었다고 했다. 그저 기척 없이 다가와 갑자기 뒤통수를 내리친 것이다.

세 번쯤. 아직 정확히는 밝혀지지 않은 둔기로.

이런 건 충동적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을 노린 범행에 가깝지 않나. 어쨌든 경찰 서장 동생쯤 되는 사람이니 이런저런 복수의 대상이 될 가능성도 있을 테고. 피해자가 그곳에 간 것이 예정에 있었던 일이었다면 더더욱 원한 관계 위주로 찾아보면 뭐든 나올 텐데.

……그보다 그 바보가 참다못해 또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혀를 차며 범진은 몸을 훌쩍 일으켰다. 걷기라도 해서 생각을 분산시키고 싶었지만 준영의 생각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일단 그날은 제가 왜 입을 다물고 있는지 눈치채고 돌아갔을 테지만, 제가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 애는 바보 같은 짓을 할지도 모른다. 소문에 휩싸이는 것보다 죄책감을 털어 내는 쪽을 선택할 성격이니까.

그날, 한마디만 제대로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차피 풀려날 테니까 아무 말 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그런 생각을 하던 범진의 입술에 쓴웃음이 맴돌았다. 어릴 때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는 아버지를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는 무사히 돌아왔지만.

나는 어떨까.

느려지던 걸음이 결국 멈췄다. 유치장 한가운데 우뚝 서 있던 범진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철문을 열고 낯익은 경찰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여튼 밥은 꼬박꼬박 챙겨 준다니까. 국밥은 이제 질렸는데.

“나와라. 고생했다.”

메뉴를 생각하며 피식 웃던 범진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고생했다는 말이 귀에 걸렸던 것이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며 경찰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범인 잡혔어. 이제 나와도 된다고.”

녀석, 뻣뻣하긴, 하고 중얼거리며 활짝 열린 철문 너머로 먼저 나가는 경찰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범진이 천천히 다리를 움직였다.

음침한 철창을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 그는 제가 그 안에 영원히 갇혀 있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다리 아래로 순식간에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밖에 나왔는데 무슨 표정이 그래. 범인 왜 좀 더 빨리 못 잡았냐고 그때처럼 난동이라도 피우게?”

수더분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소리에 범진이 고개를 돌렸다. 수염이 까칠하게 난 중년의 남자가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안면이 있었다.

“인마. 뭘 멀뚱히 보고 있어? 감사하다고 해야지. 보호자도 찾으러 안 오는데 계장님 아니었으면 넌 꼼짝없이…….”

“에헤이, 또 잠 못 잤다고 쓸데없는 소릴 하네. 조서부터 꾸며. 난 애 내보내고 올 테니까.”

옆에 있던 젊은 경찰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 걸 만류하며 남자가 손짓한다. 범진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걸어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뭘. 경찰이 할 일 한 거지. 진범 못 잡으면 유치장 철창 부서질까 봐 걱정되기도 했고.”

피곤한지 남자가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 범진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남자가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툭툭 쳤다.

“저 서류에 서명만 하고 가면 된다.”

“단순 퍽치기 아니죠?”

펜을 집어 들며 불쑥 내뱉는 말에 남자가 눈을 끔벅인다. 범진은 제 이름을 적으며 중얼거렸다.

“일부러 그 사람 노린 거 아니에요?”

흘끗 보자 눈썹을 들썩인 남자가 빙긋 웃어 보였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빠르게 속삭였다.

“너네 잘 어울리긴 하는데, 앞으로 무슨 이유든 그런 데서 만나는 건 자중해라.”

“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범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를 돌아보았다. 주름진 눈가에 아직 아이 같은 순수함이 남아 있는 남자가 또다시 그의 등을 친근하게 두드렸다.

“녀석. 그렇게 안 생겨서는 순정파라니. 여자 친구한테 잘하고.”

“제 여자 친구가 누구…….”

무심코 반문하던 범진이 멈칫했다. 날카로운 모양새의 그의 눈매가 홉뜨이는 것을 본 남자가 픽 웃었다. 고개를 휙 돌린 범진이 바짝 다가섰다.

“혹시 윤준영 만나신 겁니까?”

“쉿.”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린 남자가 그의 어깨를 반쯤 떠밀며 작게 말했다.

“너무 야무져서 무섭더라. 괜한 말 하면 호되게 혼날 것 같으니 이야기는 너희끼리 풀어. 난 비밀을 지키기로 해서.”

기가 막혀 범진은 헛숨을 내뱉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준영이 이 사람을 만나 그날 일을 털어놨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그 앤 그런 애 아닙니다. 저랑 그런 데 가는 사이 아니에요.”

“안다. 왜 갔는지.”

남자의 태연한 대답에 범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갔는지도 안다고? 그런 이야기까지 윤준영이 했단 말인가? 흔들리는 그의 눈을 보며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무 말 안 할 테니 걱정 마라. 내가 입을 열면 그땐 경찰의 위신 문제가 되거든.”

어느새 경찰서 입구까지 떠밀린 범진은 제게 손을 두어 번 흔들고는 돌아서서 길게 기지개를 켜는 남자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불어오는 바람은 여름임을 알리듯이 후텁지근했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상쾌하게 느껴졌다. 헛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린 범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과 없이 쏟아지는 햇빛이 그의 눈을 찔러 대고 있었다.

윤준영.

너 대체 뭘 한 거야.

* * *

평일 낮 시간에 이 집에는 아무도 없다. 적막한 공기에 뒤덮이자 잠이 몰려와 범진은 몇 시간쯤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 유치장에서도 단잠을 잤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를 맡아 주고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사실 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가 삼촌이라 불렀던 남자가 안전한 곳이라고 알려 줘서 오게 된 것뿐이다.

제가 뭐라고 소개됐는지는 모르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태도는 딱히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그가 무심코 손동작을 크게 하기라도 하면 움찔거리며 피했다. 폭력을 어떤 식으로든 겪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래서 범진도 최대한 그들과 마주치는 시간을 줄였다. 여기 올 때 삼촌이 들려 준 가방에는 지폐가 적잖이 들어 있어서 딱히 그들과 대화를 섞을 용건도 없었다.

물론 돈에는 한계가 있다. 삼촌은 정리되는 대로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되도록 범진은 돈을 아껴 쓰고 있었다.

깨끗하게 씻고 나와 빨아 둔 티셔츠로 갈아입은 그는 옷장 위에 얹어 놓았던 가방을 꺼냈다. 허리가 아픈 할아버지는 손댈 수 없는 곳이다. 처음에야 그런 계산으로 가장 높은 곳에 뒀지만 범진은 곧 가방을 눈앞에 꺼내 놔도 할아버지가 손대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가난보다 폭력이 두렵다는 것을 학습한 사람들이기에.

몇 년을 썼지만 절반도 넘게 남아 있다. 범진은 평소보다 많은 지폐를 지갑에 옮겨 담고 다시 가방을 올렸다. 그대로 나가려던 그가 걸음을 멈췄다. 시선은 잡동사니를 넣어둔 낡은 서랍장에 가 있었다.

손을 뻗어 두 번째 서랍을 열자 작은 봉투 하나가 나왔다. 짧게 혀를 차며 범진은 그것을 챙겼다. 손가락 끝에 도톰하고 뾰족한 부분이 만져졌다.

……리본이라도 달린 걸로 살 걸 그랬나.

아니, 그건 거추장스럽다고 뜯어 버릴 것 같아서.

피식 웃으며 그는 집을 나섰다. 학교가 끝날 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오혜수가 알려 준 곳에는 어차피 갈 생각이 없었다. 꼭 사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날 준영과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동네에 몇 개 없는 팬시점이 눈에 띈 것은 정말로 우연이었다.

준영은 머리를 묶는 일이 많다. 공부할 때 방해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끈을 잃어버렸는지 머리를 풀고 왔을 때는 하루 종일 흘러내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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