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아저씨.”
나직한 목소리에는 서늘함이 배어 있었다. 그 한 마디로 남자는 제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준영은 새카만 눈동자를 느릿하게 깜빡이며 말했다.
“전 지갑 찾으러 온 거예요. 그런 질문 받으러 온 게 아니라.”
“뭐?”
“그래도 혹시나 생각나는 게 있으면 알려 드릴게요. 연락처 있으세요?”
영악하다. 아니, 그런 말로는 부족했다. 아까처럼 그냥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려 했다면 의심을 품은 채 붙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제 쪽에서 오히려 연락처를 요구하고 있었다.
당신에게만 할 말이 있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러면 안 보내 줄 수가 없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남자는 품에서 꺼낸 명함을 내밀었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준영과 눈을 맞춘 채 속삭이듯 말했다.
“이 아저씨가 수사도 잘하지만 그것보다 더 잘하는 게 뭔지 아니? 바로 비밀 지키는 거다. 걱정 말고 생각나는 거 있으면 바로 연락하렴.”
준영은 하얀 손을 내밀어 명함을 받아 들었다. 한기룡, 이라고 적힌 글씨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직 진범을 못 잡은 걸 보면 별로 신뢰가 가는 말은 아니네요.”
눈을 들어 뾰족한 시선을 한 번 맞춘 준영이 그대로 뒤돌아 경찰서를 나갔다. 정통으로 일격을 맞은 기룡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만약 저 애가 사건 시각에 범진과 함께 있었다면 범진의 알리바이는 증명된다. 그리고 함께 있었던 장소가 모텔이라면 둘 다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여자애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저렇게 날뛴 거라면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구만.
……그나저나 대낮부터 미성년자를 손님으로 받은 모텔이 대체 어디야?
미간을 찌푸리며 기룡은 혀를 찼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 주름진 눈가에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 * *
뜨거운 한낮의 햇빛이 정수리를 태워 버릴 것 같았지만 준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길은 점심을 일찍 먹고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가 있었으나 딱히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다른 생각뿐이었다.
멍청이. 권범진은 멍청이다.
꼭 철창 안에 갇힌 맹수처럼 난폭하게 날뛰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무섭기는커녕 바보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떠올리면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오르면서 가슴 한구석이 바짝 조여들어 괴로웠다.
모텔.
범진이 입을 열지 않은 것은 그것 때문이다. 앵무새처럼 모텔, 모텔 반복해 대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날 모텔 골목에 가서 엄마가 일하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창고 집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그게 사실의 전부다.
하지만 과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학교에서 알은척하는 것도 좋을 거 없다며 끔찍하게 싫어하던 범진이다. 심지어 전혀 친분이 없어 보이던 두 사람이 버려진 집에서 매일같이 노닥거리는 걸로 모자라 모텔 골목까지 갔다면 사람들이 그려 낼 시나리오는 불 보듯 뻔했다.
운 나쁘게 범진도 그녀도 모두에게 주목받고 있는, 씹기 좋은 대상이었으니까.
저와 함께 있었다는 게 밝혀지면 범진은 경찰서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몰라도 동네와 학교는 떠들썩해질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엄마도 알게 될 것이다. 그날, 엄마가 모텔에서 일하는 걸 제가 보러 갔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그런 것에 수치심을 느낄지는 알 수 없다. 의외로 아무렇지 않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나라면, 그 자리에서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싶을 만큼 싫을 것 같았다.
범진이 거기까지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경찰서에서의 난동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준영은 얼굴을 감쌌다. 머릿속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소문이 퍼지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모텔 건에 대해 만약 설명한다고 해도 학교에서 믿어 줄지는 의문이었다. 게다가 범진이나 저나 선생님들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으니 도움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어쩌면 정학을 맞을지도 모른다. 그럼 시험은? 그게 대학 입학에 영향을 주진 않을까?
그리고 그 집. 그 집이 밝혀지면 다시는 못 가겠지. 아마 범진과는 학교 외의 아무 곳에서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둘이 붙어 있기만 해도 사람들이 수군거릴 테니까.
다시는 그런 피크닉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둘이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티격태격하는 일도, 막대기 양 끝을 잡고 서로에게 의지해 어두운 길을 내려오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그 집에 놔둔 식빵과 잼, 달걀은 그렇게 버려진 채 썩어 갈 것이었다.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온다. 범진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알리바이가 증명되지 않는다고 해도 진범을 잡게 되면 결국 풀려날 테니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범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머릿속 한편에는 그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를 지적하는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피해자가 경찰서장의 동생이라고 했다. 서장은 범진을 이미 범인이라고 점찍고 소년원으로 보내 버릴 생각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당연히 말을 해야 한다. 범진의 결백을 증명하는 게 우선이다. 설사…….
설사 다시는 그와 전처럼 지낼 수 없게 된다고 해도.
누군가가 던진 농구공이 막 골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를 악문 준영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접혀 있는 귀퉁이를 펼치던 그녀는 문득 햇빛을 가리고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뭐 해? 덥지 않아?”
승운이 노트로 그녀의 머리 쪽을 가려 주고 있었다. 그가 어디선가 저를 지켜보고 있다가 나타났다는 것에 준영은 돈을 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더는 승운이 겉과 속이 다를 게 없는 단순한 왕자님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 하자 그가 붙잡듯 말을 뱉었다.
“범진이 걱정은 너무 하지 마. 범인이 아니라면 곧 풀려나겠지.”
“범인이, 아니라면?”
냉소를 흘리며 준영이 비스듬히 그를 쏘아보았다. 승운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범진이가 어떤 애인지 잘 모르니까. 또 사람은 충동적으로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고.”
“너도 충동적으로 퍽치기를 할 수 있다는 얘기네.”
싸늘하게 대꾸하는 말에 승운의 눈이 펄쩍 튀어 올랐다.
“어떻게 그런 말을……. 내가 왜 그런 일을 하겠어?”
“너랑 권범진이 뭐가 다른데?”
승운의 다갈색 눈이 크게 흔들린다. 범진에 대해 함부로 떠들어 대는 사람들 대신 그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물러설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입술을 달싹이던 승운이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다른 점 때문에 범진이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의외의 말에 도전적으로 치켜 올라가 있던 준영의 눈매가 움찔했다.
“나.”
조용히 숨을 들이쉰 승운이 똑바로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를 좋아해, 준영아. 너에 대해 알고 싶어. 힘든 일이 있다면 돕고 싶고, 나한테 의지해 줬으면 좋겠어.”
준영은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제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저렇게 말할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돕고 싶다. 의지해 줬으면 좋겠다. 얼마나 꿈같은 말인가. 그리고 그런 꿈같은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는 삶을 살아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음은 고맙지만.”
뻣뻣한 혀를 움직이며 준영이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날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어.”
“있을 거야. 네가 마음을 조금만 열면 분명히…….”
“아니.”
승운의 말을 자르며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날카롭게 뜬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준영은 천천히 말을 뱉었다.
“네가 해 줄 수 있는 일들로는 부족하다는 뜻이야.”
네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몰라도.
뒷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지만 전달된 것 같기도 했다. 부드러운 인상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영은 시선을 돌리며 돌아섰다.
“너희들 관계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갈고리처럼 불쑥 뒷덜미를 채는 말투가 시비라도 거는 것처럼 다소 거칠다. 준영은 미간을 좁히며 비스듬히 승운을 돌아보았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승운의 입술이 딱딱하게 움직였다.
“권범진이 소년원에 간다고 해도?”
등에 땀이 찰 정도의 온도인데도 희한하게 공기가 차갑게 느껴진다. 팔에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준영이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승운은 마치 자기가 범진을 소년원에 보낼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협박하는 걸까. 그의 어머니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는 몰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니 저 말은 의도가 분명한 말이었다.
껍데기만 달랐지 결국은 그 엄마에 그 아들이다. 직접 사람의 멱살을 쥐는 게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무릎을 꿇게끔 만드는 화법.
웃음이 흘러나온다. 승운은 모르겠지만 그는 오히려 준영의 결심에 쐐기를 박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일은 없어. 내가 그러지 않게 할 거니까.”
가볍게 턱을 치켜든 그녀는 승운을 쏘아보며 또렷하게 대답했다. 승운의 뺨이 희미하게 떨린다. 준영은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나승운.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하나밖에 없어.”
떨리는 눈동자가 정확히 초점이 맞기를 기다리던 준영은 얼굴에서 웃음을 깨끗하게 지우고는 내뱉었다.
“제발 우리 일에 신경 꺼. 부탁이야.”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돌아선 준영은 그대로 교실로 향했다. 손바닥이 축축하다. 쥐고 있던 명함에 땀이 배어들고 있었다.
* * *
멍청이. 하여튼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가끔 멍청해진다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범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워낙에 어디서나 잘 자는 편이고, 유치장 안은 의외로 산속의 그 집만큼이나 시원해서 제법 쾌적했다.
심지어 때 되면 밥까지 챙겨 준다. 제가 용의자 취급을 받는 것만 뺀다면 좀 더 있어도 되겠다 싶을 정도였다.
……물론 진짜로 그러면 곤란하다. 그 바보가 눈치 없이 또 찾아올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