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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여명일 뿐-27화 (27/86)

<27화>

실제로 몇 번이나 승운을 무심코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승운은 친절한 얼굴로 웃어 보이곤 했다. 그랬기에 준영은 그에게 물어볼까 했던 마음을 깨끗이 접었다.

나승운이 정말로 범진을 걱정했다면 아마 제 발로 걸어와서 소식을 전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웃는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준영이 스스로 걸어오기를. 그렇게 빚을 지기를.

그걸 알아채는 순간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었다. 그리고 준영은 깨달았다. 나승운은 모두에게 친절하고 서글서글한 왕자님이 아니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엄마를 많이 닮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일에 그랬듯이 기댈 사람은 없다. 혼자 힘으로 하는 수밖에.

짧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입구로 사람들이 내려오는 소리에 그녀는 황급히 몸을 피했다. 나무 뒤에 숨어 괜히 바닥을 운동화로 긁어 대는데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피곤해 죽겠네. 상황 뻔한데 우리가 꼭 가야 합니까?”

“그럼, 증거도 없는데 소년원으로 보낼까?”

“솔직히 서장님은 그러실 생각인 것 같던데요.”

“예끼,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증거가 있어야지. 다시 한번 현장 돌고 탐문 좀 해 보자고.”

“아니, 저 자식은 뭘 잘했다고 입을 다물고 있는 건지. 그렇잖아요. 그날 뭘 했는지 말을 하면 서로 깔끔하잖아. 말 안 하는 것 자체가 뭔가 찔리는 짓을 했다는 뜻이지. 저 자식이 범인 맞다니까요.”

“그런 걸로 범인 특정할 거면 수사를 왜 하나?”

어휴, 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린다. 준영은 나무에 바짝 붙어서 귀를 쫑긋 세웠다.

“하필 서장 동생을 건드려서는. 안 그랬으면 초범이고 아직 미성년이니까 대충 합의하고 내보내 줬을 텐데 말이에요.”

“이유가 있겠지. 어쨌든 확실한 건 없으니까 증거든 증인이든 피해자 다시 의식 찾을 때까지 뭐라도 해 보자고.”

“저녁 좀 먹고요. 어제 집에 안 들어왔다고 마누라가 별 의심을 다 해서 얼굴만 금방 비추고 올게요. 퍽치기 수사한다니까 이 동네에 무슨 그런 일이 있냐며 길길이 날뛰어 대서. 마누라부터가 경찰 말을 안 믿어요.”

젊은 경찰이 넉살을 부리며 뛰어간다. 준영은 빠르게 눈을 굴렸다. 그나마 범진에게 우호적인 쪽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저기요.”

“응?”

돌아본 사람은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남자였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주름은 군데군데 있었지만 의외로 눈빛이 날카로워 준영은 잠시 멈칫했다. 남자가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제가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혹시 유실물로 들어온 게 있는지, 아니면 신고 같은 걸 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왔는데요. 정말 중요한 물건이 든 지갑이라서.”

“아, 그래요? 들어갑시다. 돈이 많이 들어 있었어요?”

“엄마 젊을 때 사진이요.”

조용히 말하자 계단을 올라가려던 남자가 뒤를 돌아본다. 준영은 잠자코 시선을 떨궜다. 남자가 할 상상을 도와야 했다. 잠시 뜸을 들인 남자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들어갑시다.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작게 중얼거리며 준영은 고개를 들었다. 경찰서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작은 동네라 TV에서 보는 것처럼 안이 널찍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러 책상들과 각 부서의 명패들이 달려 있는 게 보였다. 준영은 내부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안쪽에 철창에 둘러싸인 공간이 있다. 저기가 유치장이라면 범진은 아마 저 안에 있을 것이었다.

“혹시 지갑 유실물 들어온 거 있어? 어떻게 생긴 지갑이에요?”

남자가 돌아보며 묻는다. 준영은 목소리를 크게 냈다.

“검은색이에요. 아주 흔하게 생긴. 조금 낡았고요.”

그런 지갑이 많을수록 오래 머물 수 있을 것이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준영은 목을 길게 빼고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유치장에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팔을 베고 모로 누워 있는 검은 티셔츠를 보자마자 준영은 이를 악물었다.

저걸 그냥! 사람 속도 모르고 잠이나 자고 있다니!

한숨이 나옴과 동시에 웃음도 나왔다. 저렇게나 느긋한 모습을 보니 맥이 풀린 것이다. 표정을 가다듬던 준영은 다시 제게로 쏟아지는 남자의 시선에 얼른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런 지갑이 있기는 한데, 좀 더 자세히 말해 주겠어요? 특징적인 것들. 언제, 어디쯤에서 잃어버렸는지도.”

“네모난 모양이고, 안에 지폐랑 카드를 넣을 수 있는 칸이 있어요. 잃어버린 건 어제저녁쯤인 것 같고요. 어디서 흘렸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제가 시내 나갔을 때 떨어뜨린 것 같기도 하고…….”

또랑또랑하면서도 묘하게 느릿한 그녀의 목소리에 자리에 앉아 있던 경찰들이 하나둘씩 이쪽을 돌아본다. 유치장을 흘끗 확인하자 범진이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게 보였다.

준영을 보고 있던 남자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크게 말 안 해 줘도 돼요.”

“아, 죄송해요. 크게 말하는 게 습관이 돼서. 작게 말하면 못 알아들으시니까.”

눈앞의 경찰은 좋은 사람이다. 이런 여운을 남기는 말투 하나에 금세 어머니는 안 계시고 집에는 귀가 잘 안 들리는 노인이 있는 환경을 떠올리는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안에 사진 있는지만 확인해 봐. 혹시 젊은 여자분 사진이 있는지.”

준영은 슬쩍 유치장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아까의 목소리로 확신했는지 범진이 철창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준영은 그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는 것을 보았다.

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범진의 입이 그렇게 움직였다.

준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껏 사람이 걱정돼서 보러 왔더니. 남의 속 타는 줄도 모르고!

못마땅한 얼굴로 볼을 부풀리던 그녀는 저를 돌아보는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얼른 입술을 깨물었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남자의 눈이 유하게 휘어졌다.

“아쉽게도 그런 지갑은 들어온 게 없네. 이후에 들어오면 연락해 줄 테니까 여기 연락처 남기고 가요.”

“아뇨. 없으면 됐…….”

“권범진 학생 알아요?”

고개를 내젓던 준영이 멈칫했다. 남자는 웃고 있었지만 눈이 날카로웠다.

역시 들켰다. 여차하면 범진과의 사이가 들통나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건 감수할 수 있었다. 권범진이 왜 아직도 나오지 못하는지만 알 수 있다면.

“같은 반이에요. 잘은 모르지만 쟤 사람 패는 애 아니에요. 쪼다에 가깝지.”

범진의 이미지를 무너뜨리려고 일부러 선택한 단어였다. 흠, 하고 고개를 주억인 남자가 나직하게 물었다.

“혹시 토요일 낮에 범진 학생이랑 같이 시내에 갔었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준영은 천천히 눈을 들어 조용히 남자를 응시했다.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왜 그걸 묻는 거지?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준영의 입술이 저절로 열렸다.

“퍽치기가 있었던 게…… 토요일 낮이에요?”

남자는 말없이 그저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지만 그게 대답이나 마찬가지였다. 준영은 아득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주먹을 꽉 쥐었다. 무언가 생각해야 할 게 있는데 한순간에 머리가 턱에 걸려 멈춰버린 것처럼 하얬다.

토요일 낮.

토요일 낮에 퍽치기가 있었다면 당연히 범진은 범인이 아니다. 그는 그날 저와 같이 있었으니까.

눈부시게 쏟아지던 햇살과 입 안을 마비시킬 정도로 달콤하던 샌드위치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배부르게 먹고 늘어진 표범처럼 신문지 위에 드러눕던 범진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와 똑같이 누워 버렸던 자신.

바람이 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느껴지는 범진의 존재감에 왜인지 실없이 웃음이 났었다.

그런데 왜 나랑 같이 있었다고 말을 안 했지? 설마 이 마당에 그 집에서의 관계가 들킬까 봐 그런 거야?

“등신같이.”

저도 모르게 이를 갈며 준영은 유치장 쪽을 쏘아보았다. 범진이 철창을 부서뜨릴 듯 쥐고 있는 게 보인다. 헛웃음을 흘리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토요일 낮에는.”

“쟤 말 듣지 마세요, 뭐라고 하든. 스토커 같은 애니까!”

갑자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준영을 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범진 학생, 이제 말을 할…….”

“야, 씨발, 지긋지긋하니까 내 근처에 좀 오지 말라고! 이런 데까지 기어들어 와서는 뭐 하자는 거야? 쓸데없는 말 지껄이지 말고 제발 좀 꺼져!”

난데없이 날뛰기 시작한 범진이 철창을 걷어찬다. 깜짝 놀란 경찰 몇몇이 일어나 유치장 쪽으로 달려갔다. 엄청난 힘에 철창이 흔들리고 있었다.

준영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범진의 험악한 고성이 이어졌다.

“씨발, 범인도 못 잡고 애꿎은 사람 이런 데 가둬 놓고 뭐 하는 건데? 나 아니라고 했잖아! 그날 모텔 거리에 간 건 맞는데 내가 사람 친 건 아니라고!”

“인마, 말 좀 가려서 못 해? 이 자식이 여태 입 다물고 있다가 왜 갑자기…….”

“아하, 모텔. 왜 내가 모텔에 갔는지 궁금해? 사내새끼들 하는 짓이야 다 뻔하지. 그런 사생활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죽거리던 범진이 다시금 철창을 걷어차며 난동을 피운다. 작정하고 부숴 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에 결국 경찰이 안으로 진입했다.

“이렇게 굴어 봤자 너한테 좋을 거 없어. 얌전히 있어!”

“얌전히 있으면? 풀어 주나? 증거도 없는데 이래도 되는 겁니까? 네? 답답해 미쳐 버리겠는데 짜증도 못 내요? 어차피 내가 아니라고 말해도 그렇게 들어 주지 않잖아!”

으아악, 하고 발악하는 듯한 고함 소리에 사람들이 귀를 막았다. 제 목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이 공간에 들리지 않게 하겠다는 듯 그는 쉼 없이 날뛰었다. 세 명의 경찰이 몸으로 그를 제압하며 입을 틀어막은 뒤에도 한동안 소란은 이어졌다.

남자는 얼빠진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다 퍼뜩 준영을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의 준영은 철저한 무표정이었다. 고작 10대의 여자아이가 이렇게까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하지만 그의 직감은 범진의 저 발작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아마도 분명 철물점 주인이 목격한 여자애는 그녀일 것이다. 얼굴을 보진 못했다고 했으니 확인은 불가능할 테지만 말이다.

그 정도면 조금 구슬리면 해결될 일이다. 그는 고개를 조금 낮추며 물었다.

“그래서,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할까? 토요일 낮에 범진 학생이랑 같이 있었던 게 학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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