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승운의 손에서 젓가락이 흔들렸다. 집어 들었던 비트 샐러드가 툭 떨어져 식탁보를 붉게 물들였다. 그는 놀란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둘이 친해? 지난번 반성문 때 같이 엮였던 사이라며.”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린 승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향이 부드럽게 말했다.
“엄마가 말했잖아. 걔는 마음에 드는 만큼 딱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 사는 환경 무시 못 한다. 엄마가 준영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뭔지 알아?”
“몰라. 그리고 엄마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상관 없…….”
“미련한 점이야.”
손가락 하나를 곧게 세우는 미향을 바라보며 승운은 그럴 기분이 아닌데도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엄마. 준영이가 우리 학교 1등인 건 아시죠? 전국 석차도 저보다 높아요.”
“미련하다는 게 멍청하단 뜻은 아니야.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너랑 같은 선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모르니까 미련하다는 거지. 똑똑한 애가 그러면 안쓰럽기 마련인데, 걔는 사람 동정 살 줄도 모르고 영 재주가 없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승운아.”
언성을 높인 아들을 훈계하듯 부르며 미향이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네가 착한 거 싫지 않아. 높은 곳에 오를 사람일수록 남을 도울 줄 아는 마음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게 범죄자랑 엮이는 일이라면 엄마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잖니.”
제대로 저녁 먹기는 틀렸다. 승운은 의자를 뒤로 밀며 불퉁하게 말했다.
“저 권범진이랑 말도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어요. 안 친하다고요.”
“그런데 일부러 경찰서에 전화까지 해서 무슨 사건인지 시시콜콜하게 물어봤어?”
엄마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할 때 더 소름이 끼칠 때가 있었다. 승운의 시선이 그녀의 옆에 서 있는 김 실장에게로 날아갔다. 꼿꼿하게 고개를 든 김 실장은 그와 애매하게 비껴 나간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미향은 그를 다독이려는 것처럼 식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물론 네가 필요한 건 김 실장에게 뭐든 말하면 돼. 단지 하나만 알아 두렴. 흙탕물을 지우는 것보다 애초에 물들지 않게 관리하는 게 덜 힘들단다.”
“생각 없어요. 나중에 먹을게요.”
자리에서 일어선 승운은 그대로 자기 방으로 향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힘차게 걷은 그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당연한 일이다. 김 실장은 엄마의 사람이다. 제가 엄마의 아들이기 때문에 존중은 하지만 복종은 하지 않는다.
그가 답답한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승운은 어둠에 잠긴 마을 풍경을 내려다보며 김 실장이 알아 온 정보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술집 골목에서 퍽치기를 당한 남자는 현재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뒤통수를 두어 차례 흉기로 얻어맞은 데다 넘어질 때 벽에 심하게 부딪쳐서 중상을 입었다.
의식이 오락가락했는데 정신이 들었을 때 짧게나마 경찰에게 진술하기로는 범인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검은 옷을 입고 키와 덩치가 커 보였다고 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난 토요일 오후였고, 근처를 탐문하던 경찰은 철물점 주인으로부터 증언 하나를 확보했다. 검은 옷을 입은 키와 덩치가 큰 남자가 그날 낮에 철물점에서 방수 시트에 대해 물어봤다는 것이었다.
남자의 옆에는 검은 모자를 눌러쓴 여자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학생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두 사람이 모텔 골목 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세상 말세라고 혀를 찬 기억까지 분명하게 난다는 철물점 주인은 남자의 얼굴을 제법 잘 기억하고 있었다.
몽타주를 우연히 본 경찰 한 명이 단박에 권범진을 알아봤다. 생활안전과에 있는 그는 고등학교 선생님인 친구에게 골치 아픈 애가 들어왔다는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른 일도 아닌 폭력 사건에 휘말렸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서류를 잘 봐 두었었다. 게다가 권범진은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인상이 강렬해서 기억에 잘 남는 얼굴이었다.
학교에서 경찰과 맞닥뜨린 범진은 그저 한숨만 한 번 내쉬었을 뿐 반항을 하지는 않았다. 그 태도는 찔리는 구석이 있다기보다 성가신 일에 휘말린 게 귀찮다는 것에 가까워서, 은근히 긴장하고 있던 경찰도 그 순간에는 직감적으로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 범진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토요일 낮, 그의 행적에 관한 질문을 했을 때였다.
경찰은 범진에게 정확히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인지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저 토요일 낮에 뭘 했냐고 물어봤을 뿐인데 그 이후로 범진은 입을 굳게 다물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뭘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미심쩍긴 했지만 처음에는 참고인 정도로 취급하려던 경찰의 태도도 그 반응 후로 달라졌다. 아직까지는 명확한 목격자도, 증거도 없었지만 이미 범진은 용의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그가 자백을 하거나, 정신을 찾은 피해자가 그를 범인이라고 지목하지 않으면 범진은 풀려날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피해자가 경찰서장의 동생이고, 그의 아들은 중학교 때 학교 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학교의 소위 문제아들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품고 있었다.
토요일 낮, 그리고 검은 모자를 쓴 여자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소름이 끼쳤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면 그대로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승운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창밖만 바라보며 김 실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그날이다. 엄마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제가 차에서 뛰어내렸던 그날. 범진은 준영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근처가 분명 술집 골목이었다.
피해자가 일을 당한 시간은 정확하지 않았다. 대략 한 시간 정도의 오차를 감안한다면 제가 범진과 준영을 목격한 시간도 포함이 된다.
물론 범진이 준영과 헤어진 다음 그런 일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방금까지 친구와 함께 있다가 갑자기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고?
어둠 속을 내려다보는 승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범진이 적극적으로 준영과 만나서 무얼 했는지 설명했다면 경찰도 저와 같은 의구심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준영과 함께 있었음을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둘의 관계를 숨겨야 하는 거지? 배다른 남매라도 되나?
승운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로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그 두 사람은 재회한 오누이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피구를 하다 쓰러진 준영을 선생님과 함께 부축하여 돌아섰을 때 승운은 하마터면 바로 뒤에 서 있던 범진과 부딪칠 뻔했다.
그는 체육 시간에 제대로 참여하는 일이 없었다. 선생님도 굳이 범진을 신경 쓰지 않았기에, 늘 멀찌감치 떨어져 매트 위나 계단 위에 드러누워 자기 일쑤였다.
그런 범진이 어느새 제 바로 뒤까지 달려와 있었다.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당황한 그의 눈길은 준영에게 꽂혀 있었다.
준영이 누워 있는 보건실에 난로를 가져다 두고 창문을 가려 준 것도 아마 그일 것이다. 거기다 준영을 괴롭히는 수학에게 농구공을 냅다 던지기까지 했다. 소문이야 어쨌든 승운이 제 눈으로 범진이 무언가 과격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준영의 마음은 모르지만 범진은 그녀를 좋아한다. 하지만 혜수가 범진에게 말을 걸었을 때 동요하는 준영을 보고, 어쩌면 그녀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내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준영 때문에 저 역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도.
윤준영을 좋아하니까.
승운은 문득 얼얼한 느낌에 손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는지 하얗게 질려 있던 손바닥이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 탁하게 고여 있던 숨을 크게 뱉어 내며 승운은 돌아섰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만약 제가 범진이 그때 친구와 함께 있는 걸 봤고, 둘은 어디론가 가고 있었는데 금방 헤어질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말을 한다면 경찰은 귀 기울여 들을 것이다. 제가 경찰서장보다 높은 사람의 직통 번호를 알고 있는 홍미향의 아들이기 때문에.
특히나 자신은 범진과 친분이 없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신빙성 있는 증언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컸다. 거기에 준영이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면 권범진의 혐의는 즉시 벗겨질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도 동시에 밝혀지겠지만.
“내가 말을 안 하고, 권범진도 입을 안 연다면.”
무심코 중얼거리던 승운은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다고 설마 정말로 권범진이 감옥에 가진 않겠지. 무엇보다.
“준영이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는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제가 나서지 않아도 어차피 준영이 그날 일을 밝힐 것이었다. 누구보다 범진의 결백을 믿고 있으니.
……하지만 만약 어떤 이유 때문에 준영이 나서지 않는다면?
책상 위에 있는 펜을 습관적으로 빙그르르 돌리던 승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스스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입술이 느슨하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8
준영은 눈앞의 건물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익숙한 마크가 붙어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녀는 전에도 이곳 앞을 서성인 적이 있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였다.
정신을 놓은 엄마에게 처음으로 심하게 얻어맞아 입술이 터졌던 날. 어깨에 멍이 들고 손이 벌벌 떨리던 밤.
하지만 들어가지 못했다. 두려웠다. 무언가가 달라질까 봐. 혹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까 봐.
한참을 배회하다 결국 그녀는 집으로 돌아갔었다. 그렇게 혼자 버텨 내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그녀는 정보가 필요했다.
범진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 학교에 나오지도 않았다. 담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입이 빠른 아이 몇몇이 어떻게 알았는지 소문을 퍼뜨렸다.
사안이 흉흉하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크게 떠들지 않고 속닥거렸다. 가까운 친구가 없는 준영은 소식을 들을 데가 없었다.
‘내가 알아봐 줄까? 범진이가 어떤 상황인지.’
승운의 말이 자꾸만 메아리쳤다. 그래. 아마 그라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손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 같기는 했다. 정확히는 그가 아니라 김 실장이라는 여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