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수업이 끝나자마자 준영은 일어서서 가방을 챙겼다. 급하게 확인할 게 있는 것뿐이라고 했으니까 만약 경찰서에서 나왔다면 범진은 분명 그 집에 있을 것이었다.
무슨 일이든 빨리 듣고 털어 버려야지, 이대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방을 낚아챈 그녀가 잰걸음으로 교실을 나섰다.
“준영아.”
복도를 얼마 걷지 않아 뒤쫓아 나오는 승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영은 무시하며 그대로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1층 현관을 벗어날 때쯤 급하게 달려온 승운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 가?”
“집에.”
“할 얘기가 있다고 했잖아.”
“해. 짧게. 가면서.”
승운을 비스듬히 지나치며 준영은 계속 걸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몇몇 아이들이 보였다. 그 집으로 가는 빠른 길은 학교 뒤쪽으로 빠져나가야 했지만 승운이 있으니 조금 돌아서 가야 할 것이었다.
“뭐가 그렇게 급한 거야?”
늘 반듯하던 승운의 목소리에 날이 선 것처럼 느껴진다. 준영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대꾸했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1분이라도 아껴서 공부하고 싶어. 그러니까 별 용건 아니라면 그냥 가던 길 가 줄래?”
“경찰서에 가는 건 아니고?”
학교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준영의 발이 제동이라도 걸린 것처럼 멈췄다. 미간을 치켜세운 그녀가 승운을 돌아보았다. 승운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내가 왜 경찰서에 가지?”
반문하자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승운이 천천히 말을 뱉었다.
“권범진 걱정하고 있잖아.”
“내가 왜 걔를 걱정하는데?”
“그거야 너희는……!”
승운이 언성을 높이자 옆에 지나가던 아이가 움찔하며 쳐다본다. 그 아이가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린 승운이 조용히 말했다.
“친한 거 알아. 본 적 있어.”
순간 준영의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본 적 있다고? 어디서?
범진과 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봤다는 건 그 집의 존재도 안다는 뜻이다. 언제 들켰지? 날 따라왔었나?
나승운이 그렇게까지 음침한 짓을 하는 성격이었나? 왜 그렇게까지 한 거지?
“잘못 봤겠지.”
거짓말의 기본은 시치미다. 단호하게 말하며 준영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승운의 둥그런 눈매가 찌푸려졌다.
“아니. 똑똑히 봤어.”
“내가.”
날카롭게 눈을 고쳐 뜨며 준영이 비딱하게 웃었다.
“권범진이랑 언제, 어디서 같이 있었는데?”
“그건…….”
“그리고.”
한 발 다가가자 승운의 눈동자가 덜컹거린다.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준영이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쿡 찔렀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시선이 부딪치자 승운의 입술이 희미하게 떨린다. 준영은 쐐기를 박듯 그를 노려보았다. 팽팽한 대치를 깨뜨린 것은 외부의 목소리였다.
“도련님.”
흠칫 놀란 승운이 시선을 옮겼다. 준영도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김 실장님.”
천천히 몸을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안경을 끼고, 검은색 바지 정장을 입은 여자.
“김 실장, 이면 됩니다. 모시러 왔습니다.”
인형처럼 표정이 없는 여자가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긴장이 조금 풀린 승운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오늘 어디 갈 일이 있었나요? 엄마한테 들은 적 없는데.”
“당분간 야간 자율학습 없이 집으로 바로 모실 겁니다. 안전을 위해서요.”
“안전요?”
놀랐는지 승운의 목소리가 위로 조금 튀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준영을 곁눈질한 김 실장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며칠 전 시내 근처에서 퍽치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용의자로 도련님의 동급생이 지목된 모양이더군요. 여러모로 주의하는 게 좋겠다는 사모님의 판단입니다.”
“네?”
승운의 반듯한 입술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퍽치기, 용의자처럼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사고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의 머리는 김 실장이 말한 동급생이 누구일지를 도출해 냈다. 눈이 저절로 준영을 찾아 돌아갔다. 안 그래도 하얀 그녀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어서 가시죠.”
“잠시만요.”
김 실장을 붙잡은 것은 승운이 아니었다. 커다란 눈을 부릅뜬 준영이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물었다.
“그 용의자가 누구예요?”
김 실장은 준영을 위아래로 짧게 훑어보고는 돌아섰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승운이 서둘러 다가섰다.
“김 실장님.”
재촉하듯 부르는 말에 가볍게 고개를 숙인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권범진이라는 학생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나오자마자 준영이 그것을 짓밟을 듯한 기세로 말했다. 승운은 그제야 꽉 쥔 준영의 주먹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치 온몸으로 김 실장의 말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앤 그런 일 하지 않아요.”
준영이 또박또박 말했다. 표정만큼은 흔들림이 없어서 그녀가 떨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부정했던 범진과의 관계를 드러냈다는 것만으로도 승운은 준영이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저렇게까지 권범진을 믿다니.
……권범진이 왜? 솔직히 덮어 놓고 아니라고 할 만큼 결백해 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잖아.
비뚤어지는 마음을 따라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져 승운은 황급히 고개를 비틀었다. 김 실장이 그를 흘끗 보고는 서늘하게 말했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죄가 없다면 곧 나오지 않겠니? 가시죠, 도련님. 늦으면 사모님 걱정하십니다.”
명확하게 둘로 갈리는 김 실장의 태도에 준영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마치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다. 준영의 그런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승운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짐작하고 있었다. 전혀 연관 지을 게 없는데도 은연중에 느껴지는 그들 사이의 분위기로. 하지만 아무래도 제가 생각한 것 이상인 모양이었다.
그는 준영이 얼마나 차가운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관심사 외에는 잔인하리만치 냉정하고, 어느 누구도 제 벽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 그런 준영이, 다른 사람도 아닌 권범진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알아봐 줄까?”
입술이 저절로 움직인다. 김 실장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승운은 준영이 저를 바라보기만을 기다렸다. 곧장 제게로 튀어 오르는 눈을 응시하며 승운이 말했다.
“범진이가 어떤 상황인지.”
의외로 준영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지 않았다. 그저 강렬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까만 눈동자를 통해 속을 들여다볼 생각이었지만 역으로 그녀에게 관찰당하는 듯한 기분에 승운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준영이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빠르게 말을 뱉었다.
“됐어. 저분 말대로 어차피 곧 나올 거니까.”
그대로 돌아선 준영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금세 멀어지는 뒷모습에서 승운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김 실장은 ‘죄가 없다면’ 나올 거라고 했다. 그런데 도대체 뭘 근거로 곧 나올 거라고 말한단 말인가. 저렇게나 당연하게.
‘그 앤 그런 일 하지 않아요.’
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권범진이 그 정도의 신뢰를 얻을 만한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만 보면.
……넌 권범진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거야. 그리고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도대체 얼마만큼 사람을 깊이 알아야 그렇게까지 믿을 수 있을까.
“알아봐 줄 수 있어요?”
조용히 묻자 김 실장이 한쪽 눈썹을 살짝 찌푸린다. 승운은 여전히 준영이 사라진 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떤 사건인지, 경찰이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있는지. 고등학생을 수업 중에 경찰서까지 끌고 갈 정도면 어지간히 확실한 거 아니에요? 증거가 있다거나.”
그의 질문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는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쉰 김 실장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도련님. 그런 일에는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사모님이…….”
“김 실장.”
천천히 그녀를 부른 승운이 고개를 돌렸다. 놀랐는지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그녀를 바라보는 승운의 입술이 뒤틀렸다.
“전화 한 통이면 되는 거 알아. 그 정도로 능력 없지 않잖아.”
시선이 한순간 팽팽하게 부딪쳤지만 곧장 눈을 내리깐 것은 김 실장이었다. 그녀의 건조한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알아보겠습니다.”
“저녁 먹기 전까지 부탁해요.”
짧게 말을 뱉고서 그는 걸음을 옮겼다. 집에 돌아가면 곧장 저녁을 먹을 테니 사실상 저녁 먹기 전까지 알아보라는 말은 당장 알아보라는 뜻과 같았다.
휴대폰을 꺼내는 김 실장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승운은 묵직한 한숨을 삼켰다.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땅거미가 진다.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균열이 생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 *
“……제까지 이런 데 있어야 하냐고 묻잖아! 당신이 대체 하는 일이 뭐야? 정신 좀 똑바로 차리란 말이야! 설마 지금 자리가 만족스러운 건 아니지?”
집 안에 들어서던 승운은 현관까지 날카롭게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무언가를 내던지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김 실장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승운은 천천히 발을 뗐다.
“왔니? 미안. 엄마가 신경이 좀 예민해져서.”
한 가닥 흘러내린 머리를 기어코 깔끔하게 귀 뒤로 넘기며 그의 앞으로 걸어온 미향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승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왔습니다.”
“배고프지? 저녁부터 먹자. 당분간 김 실장이 마중 나갈 거야. 촌구석 순박하다는 말도 다 옛말이라니까. 여긴 정신 나간 사회 부적응자투성이야. 고등학생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털어 낸 미향이 부엌을 향해 걸어갔다. 늘씬한 몸에 어울리는 원피스 끝자락이 종아리 가운데에서 살랑거렸다.
바로 그 사회 부적응자투성이인 이곳이 엄마의 고향이 아니냐는 말은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가방을 방에 두고 손을 씻은 승운은 식탁 앞에 앉았다. 샐러드를 접시에 덜며 미향이 그를 흘끗 보았다.
“걔랑 아는 사이야?”
“누구.”
“그 범죄자. 이름이 뭐랬더라? 권씨였는데. 너랑 같은 반이래서 엄마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그 학교 소문난 문제아라며?”
젓가락을 들던 승운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언제 그런 애들이랑 어울리는 거 보셨어요?”
“네가 워낙 착하니까.”
빙긋 웃은 미향은 양쪽 팔꿈치를 식탁에 기댄 채 승운을 보며 웃었다.
“근데 엄마는 그거 물어본 거 아니야.”
그가 고개를 들기를 기다린 것처럼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향이 질문을 던졌다.
“걔랑 그 범죄자가 아는 사이냐고. 윤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