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너무 더워지기 전에 한 번 더 하자고 해야지.
탁 트인 곳에서 바람을 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늘 있던 집에서 고작 몇 발짝 나왔을 뿐인데도 가슴 벅찰 만큼의 해방감이 있었다.
평일에는 어차피 저녁에 가니까 안 되겠고, 그럼 또 토요일에 하자고 할까. 식빵은 그 전에 다 먹을 것 같은데. 집에 참치캔이 있긴 한데 가져다 놓을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동안 학교에 도착한 준영은 천천히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눈이 순간 부드럽게 이지러졌다.
그러고 보면 범진은 늘 일찍 학교에 온다. 교실에 들어올 때는 항상 엎드려 있는 그의 등을 볼 수 있었다.
고개라도 들고 있지. 그럼 인사라도 할 거 아냐.
입술을 비죽이며 범진을 지나치던 준영은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왜 자꾸 요즘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작게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은 그녀는 책을 꺼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늘 해야 할 공부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눈앞이 조금 어두워졌다. 고개를 들자 제 자리 옆에 서 있는 승운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나승운이 생각보다 집요한 성격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안녕.”
저 서글서글한 얼굴도 무표정해지면 제법 섬뜩하다는 것.
“할 얘기가 있는데, 학교 끝나고 잠깐 보자.”
입가를 끌어 올려 짧게 웃어 보인 승운은 그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준영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할 얘기라니. 나승운이 나한테 할 얘기가 뭐가 있지?
시원찮은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면.
홍미향 여사가 무언가 전언하라고 시켰다든지.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저를 따로 불러낼 리가 없지 않은가. 분위기도 왠지 심상치 않고.
흠, 하고 준영의 입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갔다. 성가시지만 상대 못 할 것도 없다.
가볍게 펜을 돌리며 그녀는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잠시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곧 차분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공부를 향한 준영의 집중은 오래가지 못했다.
“저기, 범진아.”
수학 공식을 막힘없이 적어 내려가던 준영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온 신경이 순식간에 뒤로 날아갔다.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안 된다, 생각했지만 어차피 제 앞에 있는 아이들도 다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이 정도는 합리적인 호기심의 선 안에 있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입술을 질근거리며 버티는 준영의 귓가에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때 물어봤던 거 말이야.”
혜수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챔과 동시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언제 일어났는지 눈을 반쯤 뜬 범진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의 옆에 선 혜수가 빙긋 웃고 있었다.
……웃어? 권범진 앞에서?
앞의 아이들이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준영의 이맛살이 서서히 구겨졌다.
오혜수와 범진은 어떤 접점도 없다. 애초에 공주 과인 혜수는 범진을 없는 사람 취급 하는 수많은 아이들 중 하나였다. 혹시라도 생길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단 하나의 접점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날, 범진이 혜수를 옥상에서 데리고 간 날.
하지만 범진의 말에 의하면 저를 간접적으로 구하기 위해 그랬던 거라고 했으니 별다른 대화를 했을 리는 없다.
그런데 혜수가 내비치는 저 친근감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심지어 범진아, 라고 불렀다.
나도 그렇게는 불러 본 적이 없는데?
“내가?”
늘어지게 하품을 한 범진이 혜수를 똑바로 바라본다. 목소리가 또렷한 걸 보면 역시 또 눈만 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준영의 눈에 혜수가 내미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쪽지였다.
“여기 적어 놨어. 애들 앞에서 말하면 네가 민망해할까 봐.”
아이들의 숙덕거림이 한층 격렬해진다. 준영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입술을 기울여 범진을 향해 예쁘게 웃어 보인 혜수가 돌아섰다. 그리고 준영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구겼다.
“뭘 봐.”
사납게 속삭이고는 혜수는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준영의 눈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심드렁한 표정으로 쪽지를 펴 보는 범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쪽지를 본 범진의 눈썹이 순간 들썩이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픽 웃는다. 고개를 드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준영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제자리를 놓친 심장이 작게 덜컹거리는 것 같았다.
어느새 떨어뜨린 펜을 더듬어 다시 쥐고 습관적으로 책을 봤지만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곧 수업이 시작되었는데도 준영의 펜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신이 내내 다른 데 팔려 있었기 때문에 중간중간 그녀를 흘끔거리던 승운이 뒤에서 문지기처럼 버티고 있는 범진과 계속 눈이 마주치고 있다는 것도 물론 몰랐다.
하지만 그날의 놀라운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 * *
“권범진. 잠깐 나와 봐라.”
쉬는 시간. 1교시는 통째로, 2교시는 절반쯤 놓쳤다는 사실을 깨닫고 빠르게 노트 정리를 하던 준영은 고개를 들었다. 담임이 앞문에 서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담임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입꼬리에 일부러 힘을 주고 있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주름진 눈꼬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 권범진 보면서 웃는 사람이 왜 이리 많아?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들려 준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훌쩍 일어난 범진이 뒷머리를 가볍게 털며 걸어가고 있었다.
물어볼 일이 두 개나 생겼네.
입술을 비죽이며 그녀는 다시 펜을 쥐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다음 수업 시간이 끝나도록 범진은 돌아오지 않자 점점 신경이 쓰였다.
왜 안 오지? 무슨 일이 있나? 혹시 집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다던가.
점심시간이 끝나도 범진의 빈자리는 그대로였다.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커지는 것과 함께 준영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었다.
아무도 나서서 선생님에게 범진이 어디 간 것인지를 묻지 않았다. 준영도 몇 번이나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별일이 아닌데 괜히 애들의 관심만 끌면 어떡하지. 내가 이런 걸 묻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조금만…….
“야, 씨발, 대박. 권범진 경찰한테 끌려갔대!”
다급히 교실로 달려 들어온 아이가 냅다 외치는 소리가 천둥처럼 귓가를 울렸다. 준영의 손에서 펜이 미끄러졌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 몰려들었다.
“뭐? 왜?”
“패싸움이라도 했나?”
“야, 이 동네에서 권범진한테 덤빌 사람이 어디 있어?”
누군가의 말에 순순히 수긍하는 듯한 분위기가 퍼졌다. 잠시 사그라드는 것 같았던 수다가 다시 점화되었다.
“사고 쳤나?”
“무슨 사고?”
“뭐든 그저 그런 일은 아니겠지. 경찰이 학교까지 쫓아온 걸 보면. 도망칠 위험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냐?”
“에이씨, 맨날 교실에서 폼 잡고 있는 것만도 쫄려 죽겠는데. 진짜로 사고 친 거면 퇴학당하려나?”
“이참에 당해 버려라. 선생들도 좋아할걸. 권범진한테는 꼼짝도 못 하잖아.”
자기들끼리 키득대던 아이들은 갑자기 끼익,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준영이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녀는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는 아이들을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시끄러워 죽겠네. 그만 좀 떠들 수 없어?”
준영은 눈에 띄긴 했지만 스스로 나서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공부 말고는 관심 없는 걸 알고 있는 몇몇은 어색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였고, 몇몇은 코웃음을 쳤다.
“뭐야, 윤준영. 지가 뭐라고.”
“너 권범진 좋아하냐?”
학기 초 준영에게 접근하려다 실패한 민호가 이죽거렸다. 냉랭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준영이 입을 열었다.
“좋아해.”
순식간에 아이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소리 없는 경악의 물결이 교실 안으로 퍼진다. 준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너만큼 안 떠드니까.”
“저, 저게 진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민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승운에게 앞을 가로막혔다.
“그만하자. 아직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잖아. 범진이가 꼭 무슨 일을 저지른 쪽이 아닐 수도 있고.”
민호는 한쪽 손으로 저지하듯 제 어깨를 가만히 잡는 승운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걔가 당할 놈이냐?”
흥, 하고 돌아서는 민호를 보며 쓴웃음을 지은 승운이 준영을 흘끗 돌아보았다. 준영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다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제 정수리에 와닿는 승운의 시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 거슬렸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담임의 수업 시간이 되고 나서야 아이들은 봇물 터진 듯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권범진은 왜 안 와요?”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경찰에 잡혀갔다면서요? 사고 친 거죠?”
득달같이 달려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담임은 지친 얼굴로 손뼉을 쳤다.
“자자, 조용히들 하고. 그냥 뭐 좀 급하게 확인할 게 있다고 해서 간 거니까 신경들 쓰지 마라.”
“경찰서에 갔다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선생님,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좀처럼 진압되지 않는 소란에 오만상을 찌푸린 담임이 교탁을 거칠게 내리쳤다.
“이것들이, 너희가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때냐? 시험 준비들은 잘했어? 얼마 안 남았다. 아무리 너희가 대학 진학에 뜻이 없어도 옆 반한테 지면 단체 기합 받을 줄 알아!”
불만에 찬 목소리로 웅얼대는 아이들을 무시한 채 담임은 수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준영은 한숨을 삼키며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별일 없겠지. 별일 없을 거야. 별일 있을 게 뭐가 있겠어?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공부에 집중하려 했지만 정신이 산만했다. 노트 위에 놓인 그녀의 펜은 끝없는 소용돌이만 그려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