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대걸레를 들고 모텔 안으로 들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준영은 말없이 걸었다. 반걸음 뒤에서 그녀를 쫓던 범진은 큰길로 나오자 불쑥 말을 걸었다.
‘햄버거 먹을래?’
창피하고 민망했지만 혼자 있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못 볼 꼴 다 보인 상황이 아니던가. 게다가 싫다고 했던 햄버거를 제 쪽에서 제안하는 범진의 배려를 조금은 알 것 같아, 그녀는 무뚝뚝하게나마 대꾸했다.
‘밖에서 먹을 기분 아니야.’
‘안에서 라면 먹을 기분은 더 아닐 것 같은데.’
툭 내뱉는 범진의 말에 그녀는 무심코 웃고 말았다. 권범진은 의외로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었다.
어차피 이런 기분으로 갈 곳은 한 곳밖에 없다. 그리고 범진은 당연히 동행할 생각인 것 같았다.
모자 아래 얼굴을 숨기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자 눈을 마주친 범진이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까닥였다. 내내 그녀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피크닉 하자.’
난데없는 말에 범진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제가 제대로 들었는지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뭘 해?’
‘햄버거 살 돈으로 먹을 거 이거저거 사서 피크닉 하자고. 토요일이고 날씨도 좋잖아. 너 돈 얼마 있어?’
물 흐르듯 손을 내미는 그녀를 바라보며 범진의 입술이 두어 번 달싹였다. 깊이 숨을 들이쉬는 그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이제 나한테 삥도 뜯냐.’
‘지금 내가 못 할 게 있을 거 같아?’
가만히 중얼거리자 범진의 눈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지금 경계선에 서 있었다.
복잡한 생각들이 끓고 있는 준영의 머릿속은 용광로 같았다. 그걸 충동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멋대로 소리를 지를 수도, 상점들의 유리창을 모조리 깨부숴 버릴 수도, 아까 그 모텔로 돌아가 남자의 얼굴에 구정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 조금만 고삐를 느슨하게 쥐면 무슨 짓을 할지 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삭여 보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범진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눈치챈 것 같았다. 짧게 한숨을 내쉰 그가 뒷주머니에서 꺼낸 지갑을 가볍게 던졌다.
‘다 써라.’
왜인지 낡은 지갑을 받아 든 순간 감정이 크게 울컥였다. 입술을 깨문 채 준영은 잠시 들썩이는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지갑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불퉁하게 말했다.
‘야. 3만 원이 있으면 그냥 3만 원을 꺼내 줘. 뭘 재벌처럼 지갑째 주면서 다 쓰래, 사람 설레게. 은근히 허세가 있단 말이야.’
앞서가던 범진이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끝이 올라가면 가끔 섬찟할 때가 있었다.
‘마트가 어딨더라?’
눈을 굴리며 중얼거린 준영은 종종걸음으로 그를 지나쳤다. 범진의 인내심의 지표인 긴 한숨 소리가 등 뒤를 스치는 것을 듣고서야 그녀는 작게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친구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런 존재는 솔직히 감사했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평온함을 되찾고 위안을 얻을 수 있다니. 그리고 나에게 그런 사람이 있다니.
피식 웃으며 식빵에 잼을 두텁게 바르던 준영은 다시 옆에 와서 서는 범진을 올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또?”
“손이 느려, 너. 저녁밥 만드냐?”
결국 범진의 3만 원은 동전 몇 개만 남았다. 그러니 적어도 만드는 건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물을 틀어 놓고 양상추 잎을 뜯어내는 범진을 보던 준영은 괜히 입술을 비죽이며 다시 식빵에 잼을 발랐다.
나란히 서서 같이 뭘 만들고 있자니 뭐라도 된 것 같다. 목덜미가 간질거리고 자꾸만 입꼬리가 늘어지는 것을 단속하느라 준영의 손은 더욱 뻣뻣해졌다.
그녀가 햄과 치즈를 올리는 동안 범진은 양상추를 손질하고 달걀까지 삶았다. 순식간에 달걀 껍질을 깐 범진이 으깬 달걀에 설탕과 마요네즈를 듬뿍 넣고 비비는 것을 본 준영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요리에 재주 있나 봐.”
“확실히 너보다는 그런 거 같다.”
자꾸만 치즈의 비닐을 벗기려다 미끄러지는 그녀의 손가락을 바라보던 범진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준영은 제 손에서 치즈까지 빼앗아 가려는 범진을 피해 몸을 반대쪽으로 기울였다.
“치즈는 내가 다 했어. 이제 와서 숟가락 얹으려고 하지 마.”
허, 하고 웃음을 흘린 범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상한 데 고집은.”
“잔소리하지 말고 밖에 신문지나 깔아 줘. 나가서 먹을 거란 말이야.”
“양상추나 올려.”
제가 잘 찢어 놓은 양상추를 가리키고는 범진은 신문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미 태양이 가장 뜨거운 시간이었다. 그는 적당한 응달을 찾아 바닥에 박힌 돌 몇 개를 파낸 뒤 신문지를 깔았다.
이런 걸 제 손으로 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땀이 이마에 송송 배어났다. 지나치게 넓게 깐 신문지를 바라보던 범진은 몇 장을 걷어 가운데에 더 두껍게 겹쳐 놨다.
헛기침을 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접시에 샌드위치를 옮겨 담던 준영이 또 왜 오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범진은 흙이 묻은 손을 들어 보였다.
“나올 때 우유.”
한입에 넣기 버거울 만큼 커다란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 두 개를 양손에 든 준영이 밖으로 나가며 외쳤다. 제가 흙을 밟아 평평하게 만들고 돌들을 골라내며 신문지를 까는 동안 그녀가 겨우 양상추를 올렸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지만 범진은 그저 혀를 차며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작은 우유 두 팩을 들고 나가던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불어온 바람에 싱그러운 초록의 나뭇잎들과 새카만 준영의 머리칼이 흔들린다.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앉은 그녀가 접시를 내려놓는다. 만족스러운지 입가에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모든 순간을.
범진은 조용히 서서 준영을 바라보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가기 마련이고, 같은 순간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찰나라도 좋으니 손안에 쥐고 언제든 꺼내어 볼 수 있다면.
“왜?”
샌드위치를 손에 든 준영이 멈춰 있는 그를 향해 외친다. 흙탕물처럼 혼탁한 감정의 밑바닥 어딘가에 침잠해 있던 무언가가 싹을 틔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저를 바라보는 준영을 조용히 응시하던 범진이 성큼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심장이 묵직하게 울리고 있었다.
“윤준영.”
단숨에 가까이 다가가 부르자 막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려던 준영이 움찔한다. 입을 마저 다물지 못한 채 동그란 눈을 치뜬 그녀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뒤엉킨다. 애초에 말로 표현이 가능한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준영의 눈에 담겨 있던 단순한 불만이 의문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며 범진이 입을 열었다.
“맛있냐.”
“아직 못 먹은 거 안 보여? 너 때문에.”
커다랗게 눈을 부라린 준영이 보란 듯이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물었다. 범진은 오물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색도 선도 고운 입술이 곧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완전 맛있어! 우리 이거 나중에 또 해 먹자. 어차피 식빵이랑 다 남았잖아. 넌 돈도 있으면서 왜 맨날 라면만 가져왔던 거야? 아, 싫었다는 건 아니고. 나야 얻어먹는 입장이니까.”
재잘거리며 준영이 다시 한번 샌드위치를 물었다. 그러면서도 빨리 먹어 보라는 듯 눈으로 샌드위치를 가리킨다. 피식 웃은 범진이 그녀의 곁에 앉아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갑작스레 허기가 몰려든다. 준영을 따라 그도 샌드위치를 가득 베어 물었다. 맛을 보던 그의 눈썹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입 안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너 잼을 얼마나 바른 거야?”
우유를 뜯으며 서늘하게 묻자 준영이 씩 웃었다.
“양껏. 맛있지?”
“단맛밖에 안 나잖아.”
“단걸 싫어하는 줄은 몰랐네. 그러게 예전에 내가 싫어하는 거 있냐고 물어봤을 때 알려 주지 그랬어?”
눈이 재미있어하는 게 뻔히 보인다. 심심하면 라면에 넣는 달걀의 일부를 터뜨리는 제게 드디어 복수할 방법을 알았다는 듯한 눈이었다. 입맛을 다시며 범진이 엄중하게 정정했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거 있냐고 물어봤다.”
“그럼 못 먹는 건 아니라는 뜻이네. 먹다 보면 맛있어. 더 먹어 봐.”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며 준영이 샌드위치를 잔뜩 입에 밀어 넣는다. 기가 막혀 범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저 어이없는 말을 꼬투리 잡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깐일지라도, 다른 생각 없이 순수하게 행복해 보이는 준영의 웃는 얼굴이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웃어만 준다면야.
기계적으로 샌드위치를 먹으며 범진은 우유를 들이켰다. 들쩍지근한 단맛에 입 안이 마비되는 것 같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윤준영에게 맞을 일을 만들지 말자, 에 더해 윤준영에게 요리를 시키지 말자, 가 그의 머릿속에 새겨지고 있었다.
* * *
가방을 챙기던 준영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담요를 덮은 엄마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새벽에 들어왔는지 술 냄새가 방 안에 넓게 퍼져 있었고, 그녀의 가방 옆에는 만 원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겨우 만 원에 그동안 쌓였던 원망이 풀릴 리가 없다. 왜 갑자기 이제 와서 일을 하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설마 나 대학 갈 때가 다가와서 그런 건 아닐 테고.
애초에 이런 푼돈이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제가 죽도록 공부를 하는 이유는 오로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서울의 대학에 가기 위해서니까.
그런데도 왜 자꾸 담요 밖으로 튀어나온 저 손이 눈에 걸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손마디가 툭툭 불거진 불그스레한 손. 가방을 어깨에 걸친 준영은 결국 어깨 아래로 미끄러진 담요를 끌어당겨 엄마의 몸을 덮어 주고는 집을 나섰다.
제 처지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오히려 얼마나 비참한지 눈으로 확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며 걷는 준영의 입가에 비스듬히 미소가 걸렸다. 미간을 찌푸린 채 샌드위치를 먹던 범진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