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신랄한 그녀의 말에 범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만해.”
“뭘.”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눈매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준영은 이를 갈듯 말했다.
“넌 몰라서 그래. 저 사람이랑 둘이서 살아온 세월이 어땠는지,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난 아무것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아무것도 누릴 수가 없었다고. 저 여자만 아니었어도 나는…….”
두 번째다. 범진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감쌌다. 가볍게 당기는 힘에 이끌린 준영은 그의 가슴에 이마를 박았다.
뒤로 넘어간 모자가 바닥에 떨어졌다. 범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울 거면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차오르던 한숨이 울음이 되어 단말마처럼 터져 나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범진의 가슴에 토해 내며 준영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미처 막지 못한 눈물만이 흘러내리며 범진의 티셔츠를 적실 뿐이었다.
엄마는 왜.
도대체 왜.
온갖 감정과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지만 그런 단편적인 말들만 머릿속을 맴돈다. 울음을 참고 있던 준영은 제 손등에 닿아 오는 범진의 손을 느꼈다.
범진은 으스러져라 쥐고 있는 그녀의 주먹을 천천히 펼쳤다. 주먹이 열리자 순식간에 온몸의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안 아프냐. 피 났다.”
“……나.”
떨리던 입술이 저절로 열렸다.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 순간 잊지 않을 거야.”
이런 일 당장 그만두라고 엄마를 끌고 나오지 못하는 나를.
그리고 정말로, 무슨 이유에서든 저 일을 하고 있는 엄마를.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스스로 다짐하는 듯 잦아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범진은 말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무자비하게 느껴질 정도로 맑았다.
* * *
“……어요. 그러니까 그 주식은 진즉 팔라고 했잖아. 알았어. 일단 다음 주까지 지켜보는 걸로 해요.”
창문 밖을 바라보던 승운이 턱을 괴었다. 근처에 밥 먹으러 나가자고 해 놓고는 또 멀리까지 다녀올 생각인 모양이었다. 엄마가 충동적인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통화를 마친 그녀에게 어디로 갈 거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엄마는 또다시 휴대폰을 귀에 가져가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인 승운의 시선은 다시 창밖으로 돌아갔다.
“팀장님. 나예요. 용인 공장은 어떻게 됐어요? 다음 달 말? 아니, 그거 좀 뜯어서 베트남으로 옮기는데 뭐가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나는 도통 이해가 안 가네. 요즘 다른 일에 신경 쓰느라 이쪽 일 처리가 늦어지는 건 아니에요? 사장님이랑 회식 자주 하신다면서.”
엄마가 사장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외삼촌이다. 하지만 2년 전 부사장 자리에 있는 아빠가 아니라 외삼촌이 사장 자리에 오른 이후로 엄마는 절대 외삼촌을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 일도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수익 내려면 5년은 족히 걸릴 텐데 일단 베트남 건부터 빨리 마무리 짓는 게 낫지 않을까요? 회장님께 하반기 예상 실적 보고드릴 때 조금이나마 예쁜 그림을 보여 드리려면. 설마 내가 영영 이쪽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창문에 비친 엄마는 손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승운은 이어폰을 가져올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엄마가 저런 식의 말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 괜히 제 심장이 다 조여드는 것 같았다.
“2주 안에 끝냅시다. 아, 그리고 지방에 자리 하나 알아봐 줘요. 최 팀장이 늙었나, 요즘 영 감을 못 잡네. 괜찮은 사람 좀 찾아보고.”
드디어 용건을 다 끝낸 모양인지 엄마가 휴대폰을 가볍게 가방 안에 던져 넣었다.
“어휴, 하나같이 쓸 만한 사람들이 없어. 아들, 엄마 힘들어 죽겠다.”
“어깨라도 주물러 드려요?”
승운이 돌아보며 말하자 곱게 립스틱이 발린 입술을 휘며 웃어 보인 그녀가 승운의 볼을 콕 찔렀다.
“아들 힘들게 그런 걸 시킬 순 없지. 김 실장, 오후에 스파 좀 가야겠어.”
“전화 넣어 놓겠습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김 실장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안해진 승운이 몸을 틀었다.
“점심 먹으러 어디까지 가실 건데요?”
“장어 좀 먹을까 했는데. 왜, 오후에 무슨 약속 있어?”
“약속은 무슨. 수영이나 갈까 했죠.”
흐음, 하고 목소리를 길게 빼며 저를 빤히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에 승운은 입술을 비죽였다.
“왜요.”
“그 애랑은 어떻게 지내니? 요 며칠은 또 그 애 얘기를 안 하네. 싸웠어?”
엄마의 말에 저절로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승운은 다시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싸울 만큼 친하지도 않아.”
“어머. 사흘 만에 반 애들을 다 휘어잡던 우리 아들은 어디 가고?”
“준영이는.”
놀리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창문을 통해 바라보며 승운이 불퉁하게 말했다.
“다른 애들이랑 달라요.”
“좀 다른 것 같긴 하더라.”
의외로 엄마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승운이 그녀를 휙 돌아보았다.
“엄마. 그날 걔랑 무슨 얘기 한 거예요? 갈아입을 옷 엄마가 직접 가져다줬다면서. 그러고는 급하게 가 버렸잖아.”
“너한테 말 안 하던?”
“그렇게 안 친하다니까.”
“애가 고집이 좀 있더라.”
손톱이 영 마음에 안 드는지 또다시 손톱을 바라보며 엄마가 중얼거렸다.
“마음에 드는데, 딱 그만큼 마음에 안 들어.”
김 실장이 백미러로 흘끔 뒤를 확인한다.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승운도 알 것 같았다.
엄마에게 가족 이외의 사람은 쓸 만한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나뉜다. 마음에 든다는 표현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그것도 10대 여자애에게는 더더욱.
신호에 걸린 차가 천천히 멈춘다. 턱을 괸 채 창밖으로 눈을 돌린 승운이 나직하게 말했다.
“엄마 마음에 들 필요는 없잖아.”
“어머. 벌써 그런 말을 하네. 너 그래 봐야 결혼할 땐 엄마 마음에 드는 애랑 하게 될걸. 한 가족이 될 건데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니?”
결혼은 무슨, 하고 짐짓 이맛살을 찌푸린 승운의 입술이 애매하게 기울었다. 한순간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준영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쑥스러워 그는 턱을 괸 손으로 입술을 슬쩍 가렸다. 뺨이 조금 뜨거워지고 있었다.
결혼은커녕 곁을 내주지 않으니 말도 붙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른 애들처럼 평범하게 말을 받아 주기만 해도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준영은 늘 사방에 벽을 치고 있다. 그 벽을 허물기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뭔가 계기가 있으면.
준영이 제대로 대화를 받아 주는 사람은 기껏해야 오혜수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녀의 말에는 성의껏 대꾸를 해 줬으니 말이다. 그리고.
……도무지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권범진.
준영과 범진은 학교에서 눈 한 번 마주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둘은 분명 아는 사이다. 뿐만 아니라 아주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게 도대체 어떻게인지를 알 수가 없으니 요즘 승운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어?”
인상을 찌푸리고 횡단보도 쪽을 보고 있던 그의 눈이 일순 커다랗게 뜨였다. 한산한 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권범진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승운의 눈을 고정시킨 것은 그의 옆에 서 있는 여자애였다. 줄무늬 티셔츠에 하얀 반바지를 입은.
까만 모자를 푹 눌러쓴 데다 고개까지 숙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본능이 알려 주고 있었다.
오토바이 한 대가 옆으로 지나가자 안쪽에서 걷고 있던 범진이 순간 여자애의 팔을 잡아당긴다. 무어라 말하며 그가 바깥쪽으로 나오자 그녀가 범진의 팔을 툭 치는 게 보였다. 옆에 있는 게 익숙한 사람들에게 나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머리로 한순간에 열이 치솟았다.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 이전에 이미 그의 손은 차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난 여기서 내릴게요. 맛있게 먹고 와요, 엄마!”
“뭐, 얘, 승운아? 승운아!”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승운은 건너편에 있는 그들에게 시선을 못 박은 채 걷기 시작했다.
저건 윤준영이다. 키, 반듯한 자세, 모자 뒤로 길게 튀어나온 새카만 머리카락이 그의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해 주고 있었다.
게다가 권범진의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걸을 수 있는 또래의 여자애가 달리 누가 있겠는가.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길을 건너서 쫓아갈까? 이름을 불러 인사를 해 볼까? 횡단보도까지의 거리를 재던 승운의 눈앞으로 버스 한 대가 지나갔다. 정류장이었는지 잠시 멈춰 선 버스를 피하려 걸음을 빨리하던 승운의 표정이 이내 망연자실해졌다.
사라졌다.
골목으로 들어갔나. 아니면 어디 가게로 들어간 걸까.
“제길!”
답답한 마음에 익숙하지 않은 말을 내뱉으며 승운은 발을 굴렀다. 머릿속을 하얗게 만드는 이 격렬한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느껴 본 적 없는 화가 가슴 속 어딘가에서 끓어오르며 열을 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참 후 차를 돌려 돌아온 엄마가 그를 다시 부를 때까지도, 승운은 그 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움켜쥔 주먹만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7
산 아래에 비하면 시원한 편이었지만 문을 다 닫아 놓으면 은근히 후텁지근했다. 준영은 코를 훌쩍이며 눈을 바짝 치떴다.
“됐다니까? 내가 한다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범진이 물었다.
“진심이야? 손에 밴드 붙였잖아.”
“아프지도 않다니까 괜히. 걸리적거리니까 좀 비켜 줄래?”
그녀는 미간을 좁힌 채 식빵 봉지를 뜯었다. 아니, 내가 샌드위치도 하나 못 만들 거 같나. 굽고 뭐 할 것도 없이 대충 재료만 올리면 되는 걸.
햄과 양상추, 치즈와 잼도 있으니 구색은 갖춘 셈이다. 식빵을 꺼내던 준영은 옆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는 범진을 향해 눈을 흘겼다.
“감시하는 것처럼 계속 거기 서 있을 거야?”
“해 본 적은 있냐?”
“샌드위치는 예습이 필요한 종목이 아니거든? 문이나 열어 줘. 더워.”
턱짓을 하자 눈썹을 비딱하게 올리고 있던 범진이 혀를 차며 문으로 걸어간다. 이 집에 머무는 동안 문을 열어 두는 것은 처음이었다.
혹시라도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이 들여다볼 수도 있을 거라는 걱정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뭐가 됐든 거칠 것 없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