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21화 (21/86)

<21화>

아, 하고 준영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를 가지고 나올 생각은 못 했다. 집에 모자가 없기도 하지만.

“네가 못 가리잖아.”

“너무 붙지 말고 따라와.”

제 할 말만 내뱉은 범진이 순식간에 걸음을 빨리해 멀어졌다. 헛웃음을 흘리며 준영은 천천히 그를 쫓았다. 골목 안쪽으로 걸어가는 그를 따라 오른쪽으로 돌자 벽에 기대선 범진이 보였다.

어둑한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건너편에 보이는 골목에 모텔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래서. 뭘 알아보려는 건데.”

범진이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다. 사실 이렇다 할 계획은 없었다. 준영은 모텔들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저기 어딘가에 있을 거야. 어디에서 나오는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이 말만으로는 제가 엄마의 무엇을 의심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이었다. 범진이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오실 때까지 지켜보려고?”

“들어가서 물어보려고 했지.”

“뭐? 미쳤냐?”

내내 일부러 낮추고 있던 범진의 목소리가 위로 튀었다. 준영의 한쪽 눈썹이 추켜 올라갔다.

“제정신인데?”

“모텔들 돌기는커녕 한 군데만 들어가도 소문 다 퍼질 거야. 안에 타지 사람들도 있겠지만 동네 사람들도 있을 수 있어. 널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무슨 소문이 어떻게 퍼질지 모른다고.”

날카롭게 세운 눈매로 말하는 범진의 목소리에는 박력이 있어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준영이 멀뚱히 눈을 굴렸다.

“그럼 언제 어디서 나올지도 모르는데 계속 기다리라고? 이 시간에 모텔에 사람이 뭐 얼마나 있겠어? 그리고 저길 다닐 만한 사람 중에 내 얼굴 아는 사람은 있지도 않을 텐데.”

“오늘 아침이 제일 호황일걸. 어제가 금요일이었으니까.”

막힘없이 대꾸하는 범진을 미심쩍게 보며 준영은 미간을 좁혔다.

“넌 그런 건 또 어떻게 알…….”

“그런 소문은 문신처럼 남아. 아니라는 게 밝혀져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욱 자극적으로 부풀려지지. 그런 소문 속에서 평생 살고 싶어?”

윽박지르는 게 아니었지만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준영의 얼굴이 천천히 펴졌다. 그녀는 차갑게 느껴지는 범진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물었다.

“혹시 네 얘기야?”

범진은 대답이 없었다. 그녀를 보지도 않았다. 어색하게 흐르는 공기에 준영은 긴장을 털어 내듯 한 번 어깨를 들썩이고는 범진의 팔을 툭 쳤다.

“알았어. 그냥 해 본 말이야. 설마 내가 진짜로 저길 들어갈 생각을 했을까. 근데 너 내 걱정 엄청 한다?”

다소 장난스러워진 그녀의 말에 굳어 있던 범진의 뺨이 그제야 조금 풀어졌다. 그는 못마땅한 눈으로 준영을 흘끗 보며 말했다.

“넌 대체로 똑똑하지만 가끔은 멍청해지니까.”

……뭐가 어째?

다른 말도 잘 안 참는 편이지만 멍청하다는 말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눈썹을 실룩인 준영이 비딱하게 범진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니까 네가 예전 학교에서 재떨이로 선생님 뒤통수를 기절할 때까지 때렸다는 건 자극적으로 부풀려진 소문이라는 거지?”

놀랐는지 범진이 그녀를 휙 돌아본다.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에 준영이 짓궂은 얼굴로 씩 웃었다.

“알고 보면 권범진 무서워할 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야. 키랑 덩치 큰 거 빼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성격도 친절하고. 아, 인상이 험악해서 어쩔 수 없나.”

범진의 인내심이 또다시 요동치는 게 보인다. 깊이 숨을 들이쉰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까분다.”

“더 까불면 뭐 어떻게 할 건…….”

준영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의 뒤통수를 감싼 범진이 재빨리 몸을 돌리며 제 가슴팍에 그녀의 머리를 짓눌렀던 것이다. 헐렁한 모자가 위로 들려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

얼결에 그의 품에 파묻히게 된 준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온몸의 신경이 순식간에 곤두섰다. 심장이 어디론가 튕겨 나가 버린 것 같았다.

“사람.”

나직한 범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준영은 미처 숨도 내쉬지 못한 채 눈을 굴렸다.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얼굴이 뜨겁다. 범진의 체온이 지나치게 높은 탓이다. 아니, 닿지도 않은 목덜미가 뜨거운 건 그럼 뭐야. 그거야 권범진 손이 내 뒤통수를 꽉 붙잡고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의미 없는 생각들을 하는 와중에도 쿵쿵대며 뛰고 있는 게 제 심장인지 범진의 심장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이 지나갔는지 제 머리를 누르는 손의 힘이 조금씩 풀어지고 나서야 준영은 크게 숨을 쉴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범진이 얼른 뒤로 물러선다. 당장이라도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은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모자를 다시 눌러쓰며 고개를 옆으로 틀어 지저분한 벽을 멀거니 바라보던 준영이 퉁명스레 말했다.

“사람이 진짜 지나간 건 맞아?”

“뭐?”

바닥까지 잠긴 듯한 목소리를 뱉은 범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 설마 내가 널 이렇게, 안고 싶어서 그랬다고…….”

“무슨 소리야. 난 내가 까불어서 혼내 주려고 그런 거냐고 하려던 건데.”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준영은 처음으로 범진의 귓가가 붉게 물드는 것을 보았다.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린 범진은 인상을 쓰고 있었다.

“혼내 주다니, 어디 아팠어?”

“아니, 뭐, 그건 아니고. 근데 여기서는 입구들이 전부 보이진 않는데 골목이라도 걸어 다니는 게 낫지 않을까?”

뻣뻣하게 몸을 움직여 골목 끝으로 걸어간 준영은 목을 길게 뺐다. 아무렇지 않은 척 좌우를 둘러보고 있었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범진이 뒤로 다가오는 게 느껴져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걸어 다니진 말고, 내가 저쪽 골목에 가 있을게. 네가 왼쪽을 봐.”

응, 하고 대답하기도 전에 범진이 움직였다. 준영은 시커먼 그가 다다음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길게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한 것도 없는데 온몸의 진이 다 빠진 느낌이었다.

그래.

나는 남자에 면역이 없어. 그래서 그런 거야.

준영은 진지하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버지도, 남자 형제도 없다. 이 정도로 가까워진, 성별이 남자인 사람은 범진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그의 모든 것이 낯설고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특히 몸이 부딪치는 식의 스킨십은 더더욱.

애초에 그녀는 남자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살을 맞대 본 적이 드물었다. 가족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친구들과 부대끼며 놀아 본 기억도 없다.

누군가에게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끌어안겨 본 적이 있었던가?

……사고로 부축을 받아 본 적은 있지만.

승운을 떠올린 준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최근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넌 친구를 특이한 방식으로 사귀는구나.’

그 말이 튀어나온 타이밍을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했다. 오혜수가 접근한 다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혼잣말처럼 들렸다. 무의식중에 중얼거린.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준영은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걸걸한 목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니, 아줌마. 걸레를 제대로 빨아 와야지. 이게 뭐야? 바닥 다 흥건하게!”

제 쪽에 가까운 한 모텔의 문이 열려 있었다. 벽 너머로 슬쩍 고개를 내미는 준영의 귓가를 남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말이나 제대로 알아듣는지. 저기, 저쪽 가서 발로 밟아서 꽉 짜 와. 에이, 싸게 쓰려다 일만 더 늘리네.”

보기 전에 이미 준영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건너편에서 대걸레를 든 채 비척비척 걷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엄마였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하나로 대강 묶은 그녀는 대걸레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지 손을 떨고 있었다. 주차장 쪽으로 가는 그녀를 향해 남자가 사납게 외쳤다.

“그거 다 하고 2층 객실들 쓰레기통 다 비워. 꼼꼼하게 안 하면 점심 없어!”

남자가 습관처럼 덧붙이는 상스러운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준영은 돌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느새 움켜쥔 주먹이 파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당장 가서 저 손에서 대걸레를 빼앗아 내동댕이치고 싶다. 거죽만 남은 여자의 마른 몸을 끌고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 전에 구정물이 담긴 양동이를 저 남자의 머리에 뒤집어씌워 주면 좋을 것이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안다. 평범한 일 중에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저렇게 새벽부터 일해서 하루에 단돈 만 원을 번다 하더라도, 저 일이 없어진다면.

이 동네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워낙 작은 동네고 놀고 있는 청년들도 많은 마당에 굳이 미성년자를 쓰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준영이 오직 공부에 매달린 이유였다.

대걸레를 밟던 여자가 중심을 잃었는지 비틀거리다 앞으로 기우뚱 넘어졌다. 후들거리는 재질의 검은색 바지 끝에 구정물이 스며든다. 엉거주춤 일어난 여자가 불안정한 자세로 다시 걸레를 밟았다. 저러다 말라빠진 다리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소름이 돋아 피부가 오돌토돌해졌다. 기가 막혀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다.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을 때, 눈앞이 까맣게 가려졌다.

“윤준영.”

범진이 조용히 그녀를 다독이듯 부른다.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나 때문에 저러는 건 아닐 거야.”

목소리는 의외로 떨리지 않았다. 제가 듣기에도 냉랭하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저 사람한테는 그런 마음이 없거든.”

“…….”

“허구한 날 발작하며 사람 미치게 만든 지 오래야. 엄마 노릇 같은 건 나도 기대 안 해. 이젠 맞는 것도 이골이 나서, 어질러진 집을 치우는 게 더 귀찮아. 날 위해서라면 그런 것부터 하지 말아야지. 안 그래?”

왜인지 눈물이 다시 차오른다. 그게 짜증 나서 준영은 이를 악물었다. 범진의 가슴팍만 죽어라 노려보자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모셔 올까.”

“왜?”

준영은 비딱하게 웃으며 눈을 들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범진을 향해 이죽거렸다.

“돈 쉽게 버는 사람도 있어? 일한다는 사람 막지 마. 막아 봐야 집에서 발작밖에 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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