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사부작사부작 걷는 소리가 가볍다. 늘 걷던 길, 늘 잡던 나무 몽둥이인데도 뭔가 이상하다. 준영은 슬쩍 눈을 들어 어둠에 잠긴 범진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권범진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까는 혜수 때문에 너무 짜증이 나서 그런 건데 성질 더럽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사람이 오해를 하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러니까 미리 설명을 해 주면 좋았잖아. 물론 그럴 상황이 아니었지만.
입술을 비죽이며 준영은 몽둥이를 고쳐 잡았다. 손에서 땀이 나서 그런지 미끄러웠다.
이 집에서 공부한 것치고 오늘처럼 효율이 엉망이었던 날이 없었다. 공부에 집중하다가도 범진의 말들이 불쑥불쑥 떠올라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으려던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모조리 날려 버렸던 것이다. 실로 가공할 만한 파괴력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서 널 알은척할 수는 없잖아.’
은근히 목소리가 좋아. 무섭다는 선입견만 빼고 보면 말이야.
‘나랑 아는 사이 돼서 너한테 좋을 거 없어.’
준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이유가 창고 집의 존재가 들통날까 봐, 라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소문 때문에 내 평판이 나빠질까 봐 그러는 거라면.
“내 이미지도 이미 바닥인데.”
중얼거리자 앞서가던 범진이 그녀를 흘끗 돌아본다. 준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몽둥이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보였다.
“손에서 자꾸 땀 나.”
“테이프가 아니라 손수건 같은 걸 감아야겠네.”
범진은 훌쩍 몽둥이를 반대로 돌려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가 쥐고 다니던 부분에는 테이프가 감겨 있지 않았다.
미끄럽고 끈적해진 테이프보다야 버석버석한 나무가 좋다. 순순히 쥐자 방금까지 잡고 있었던 범진의 체온이 느껴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준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너 친절하다는 소리 들어 본 적 있어?”
“졸려? 무슨 헛소리야.”
무덤덤한 대꾸에 준영이 미간을 구겼다. 제가 노려보는 것도 모르고 어둠 속을 잘도 걸어가는 범진의 뒤통수가 얄밉다. 눈을 굴리던 그녀가 비딱하게 웃었다.
“주말에도 올 거야?”
“왜.”
“난 못 올 거 같아서.”
“왜?”
“시내에 볼일이 있어.”
“시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는 듯 범진의 걸음이 느려진다. 거리가 좁혀진다. 준영은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속삭이듯 말했다.
“모텔 골목 쪽에.”
말이 떨어지자마자 범진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소리 없이 키득거린 준영이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았다.
“왜 그래? 미끄러졌어?”
얼른 균형을 잡은 범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디에 볼일이 있다고?”
“못 들었으면 됐어.”
사실 범진을 놀려 주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해서 꺼낸 말이기도 했다.
엄마가 그런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그곳에 드나드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오혜수의 입은 막아 놨지만 정확한 상황을 알아야 유사시에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골목은 아무래도 낮에는 통행이 많지 않고 빛이 잘 들지 않는다. 밤에 가는 것보다야 낮에 가는 게 그래도 나을 테지만 혼자 가자니 조금 무서운 게 사실이었다.
이럴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엄마에 관련된 모든 것은 제 약점이다. 가능하면 평생 누구에게도 보이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 그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홀로 짊어지고 갈 테지만, 그녀에게는 우연히 치부를 들킨 범진이 있었다.
……그 순간엔 정말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는데,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할 날이 오다니.
그래도 입을 떼기가 쉽진 않다. 머뭇거리던 준영이 걸음을 옮기려 하자 이번에는 범진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거길 왜 가는데.”
세기의 문제아가 선생님 흉내를 내네.
엄중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준영이 눈썹을 까닥였다.
“못 들은 거 아니었어?”
“왜 가냐니까.”
붙잡힌 손목이 조금 더 조여든다. 준영이 웅얼거렸다.
“알아볼 게 좀 있어서.”
“네가 모텔에서 알아볼 게 뭐가 있…….”
“엄마 일로.”
사나워지던 범진의 말이 뚝 끊겼다. 어두워서 꽤 가까이 서 있는데도 표정이 잘 보이진 않는다. 준영은 조용히 눈을 굴렸다.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같이 갈 수 있냐고 꼭 물어봐야 하나. 그렇게까지 구질구질해지기는 싫은데.
“몇 시에 갈 건데.”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짧은 한숨과 함께 범진이 퉁명스레 물었다. 눈을 번쩍 뜬 준영이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왜? 같이 가려고?”
“그러려고 말 꺼낸 거 아냐?”
하여튼 눈치가 없진 않다니까.
체념이 배어 있는 듯한 목소리에 씩 웃은 준영은 그에게 잡힌 손목을 앞뒤로 흔들었다.
“11시쯤? 내가 햄버거 사 줄게.”
“됐다.”
“왜? 시내까지 나가서 설마 라면 먹을 거야? 내가 크게 인심 쓰는 거라니까.”
“그러니까 됐다고.”
고개를 내저은 범진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잡혀 있을 땐 압박감이 심하더니 정작 놓아주니 허전하다. 준영은 제 손에 다시 내밀어지는 몽둥이를 보았다.
그냥 손을 잡고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다 기겁한 준영이 얼른 몽둥이 끝을 잡았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헛기침을 했다.
“그럼 대신 반성문 쓰는 거 도와줄게. 아직 안 썼지?”
“냈어.”
짤막하게 돌아온 대답에 준영의 눈이 둥그레졌다.
“뭐? 진짜? 언제? 한 번에 통과했어? 뭐라고 썼는데?”
“농구공은 선생님을 향해 던진 게 아닙니다.”
천천히 걸어가며 범진이 나직하게 하는 말에 준영은 눈을 끔벅였다.
“설마 그렇게만 썼어?”
“고의로 던졌다면 선생님은 다치셨을 겁니다.”
“……그렇게 썼는데 한 번에 통과했다고?”
“응.”
“왜? 어떻게?”
“집에 찾아가서 냈거든.”
나른하게 중얼거리듯 말하며 범진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우편함에 꽂아 놨지.”
입을 딱 벌린 준영이 제자리에 멈췄다. 기가 막혀 헛숨을 내뱉은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 그거 반성문이 아니라 협박문으로 읽힐 것 같은데?”
“반성문이라고 썼어. 위에.”
범진의 목소리는 무심했다. 하지만 그 효과를 노리지 않았을 리 없다. 준영의 입술이 어이없이 허물어졌다. 그걸 읽는 수학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던 것이다.
“풋, 푸하하! 너무 웃겨! 야, 생리통 이후로 진짜 최고야.”
“그 얘기 이제 좀 그만해라.”
범진이 낮게 목소리를 깔았지만 이미 준영은 웃음이 터진 후였다. 낭랑한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범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친 듯 고개를 내젓는 그의 입꼬리도 슬며시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 * *
준영은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었다. 날씨가 화창하다 못해 햇빛이 무서울 정도로 내리쬐고 있었다.
줄무늬가 들어간 티셔츠 아래에 반바지를 입었다 벗고, 치마를 입었다 벗기를 대여섯 번 반복하던 준영은 결국 반바지를 입었다.
놀러 가는 게 아니다. 제 예상이 틀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상상 이상의 끔찍한 꼴을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도 권범진과 함께.
물론 최악의 상황이 되더라도 범진이 그걸로 자신을 놀리거나 협박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있었다. 아예 못 본 척할 수도 있다. 그녀는 오직 제가 느낄 수치심만 신경 쓰면 될 것이었다.
길게 심호흡을 한 뒤 준영은 집을 나섰다. 엄마는 새벽에 이미 홀연히 사라진 후였다. 생각해 보면 엄마가 토요일마다 집을 비운 지 제법 된 것 같았다.
시내까지 나가는 버스를 타러 걸어가면서도 준영은 주변을 살폈다. 책을 사러 종종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누군가의 눈에 띄기 싫었다. 다행히 이 어중간한 시간에 길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범진과는 모텔 골목에서 조금 떨어진 상점가에서 만나기로 했다. 말이 상점가지, 시내 중심 쪽에 생긴 쇼핑몰 때문에 주말에는 절반은 문을 닫는 곳이라 다소 썰렁했다.
머리도 너무 길었는데, 미용실에서 자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버스에서 내린 준영은 영업 중인 미용실을 지나치며 생각했다. 물론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거기서 머리 자를 돈이면 책을 사는 게 이득이니까.
……이런 식의 비교는 중학교 때 이미 그만뒀다고 생각했는데.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스스로를 비난하듯 냉소적으로 중얼거리며 준영은 눈썹을 곧추세웠다.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 보폭을 넓혀 성큼성큼 걸어가다 문득 고개를 든 그녀의 잇새로 순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철물점 앞에 범진이 서 있었다.
늘 그렇듯 새카만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까만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그가 권범진이라는 것은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이제는 설사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밖에서 보니까 왜 이렇게 어른 같지.
철물점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느라 허리를 조금 굽히고 있는데도 유달리 키가 커 보인다. 팔짱을 끼고 있는 그를 곁눈질하며 준영은 슬금슬금 다가갔다.
“왜? 뭐 필요해?”
조용히 묻자 범진은 보고 있던 것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미동 없이 대답했다.
“지난번 비 올 때 보니까 집 천장에 방수 시트가 찢어진 것 같아서.”
“어느 집? 우리 그 집?”
그녀의 말에 흘끗 눈길을 돌린 범진의 눈이 희미하게 웃는 것 같았다. 모자챙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준영도 따라서 안쪽을 들여다보았지만 뭐가 뭔지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 건 어떻게 알아?”
“해 보면 알지.”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운 범진이 모자를 벗었다. 준영은 제 머리 위로 푹 눌리는 모자를 엉겁결에 붙잡으며 범진을 올려다보았다. 범진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털어 내고 있었다.
“왜…….”
“뭐 줄까?”
“방수 시트 한 롤에 얼마예요?”
“이거? 3만 원. 어디, 지붕에 깔게? 몇 개나 줄까?”
“아니에요, 지금은. 다음에 올게요.”
인기척에 밖으로 나온 철물점 주인에게 인사를 한 범진이 돌아섰다. 모자를 눌러쓴 준영도 그의 뒤를 따랐다.
“왜 이걸 날 줘?”
“얼굴 가리라고.”
“내 얼굴이 어때서?”
눈을 깜빡이자 짧게 한숨을 내쉰 범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지금 우리가 어딜 가려는지 잊었냐.”